간병을 해줄 사람이 있나요?

내가 암?

by 북도슨트 임리나

지금은 퇴원을 하고 일상 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병원에 있다.

조만간 퇴원을 하고 일상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쓰려고 하고 있지만 선뜻 쓰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 완전한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있었다.

'퇴원'이라는 건 내가 더 이상 환자가 아니라 완벽한 '일반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보증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생활 속에서 나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생활 리듬이나 활동을 할 수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지만 바로 회복이 어렵다는 건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그 더딘 회복 덕에 글의 진도가 나가지 못하고 있다.

마음은 100미터 달리기를 하고 있는데 몸은 경보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난 병원 생활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막상 입원 생활을 하고 보니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병실 장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깨달았다.

드라마 속 병실은 대부분 1인실이고 아주 깔끔하다. 6인실에 보호자 침대까지 붙어 있는 병실은 다큐멘타리에서조차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보호자들 중에 간병인까지 나오는 프로그램은 본 기억조차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입원 생활은 침대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다닥다닥 붙어 있는 침대 사이는 보호자 침대가 있고 얇은 커튼 하나만이 가끔의 사생활을 보장할 뿐이었다.

마치 시장 바닥 한 가운데 몸을 눕힌 느낌처럼 내 알몸이 다 드러나는 것만 같고 온갖 소음이 내 귀를 점령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요양병원에 와서 내 공간이 넓어지자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시장바닥에서 기숙사로 온 느낌이었다.

이런 병실 생활에서 드라마에는 빠져 있는 것 중에 하나가 '간병인'이 아닐까 싶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면 더구나 수술을 위한 입원이라면 당장 '간병'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물론 요즘에는 몇 개의 병원에서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라는 것을 운영해서 간병의 부담을 줄인다고 하는데 그 병실에 입원하려는 환자가 많아서 들어가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간병인을 고용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기억이 그리 좋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태도나 우리 가족에 대한 태도, 돈에 대한 문제 등등. 결국 아버지의 마지막을 그런 사람에게 보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삼형제가 돌아가며 간병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열흘도 되지 않아 돌아가셨기에 우리는 그 결정에 대해 잘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남의 손'에 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 그 때 생각이었다.

그 후로 간병에 대한 것은 나에게는 '가족이 해야하는' 신념처럼 자리잡고 있었고 남편도 그 신념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내가 입원을 하게 되었을 때 '간병'이 문제가 되었고 남편은 최대한 간병사를 쓰지 않는 쪽으로 계획을 짜려고 했다.

그러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남편과 내가 기대했던 '간호간병통합서비스병동'은 자리가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포기했다.

내가 포기했다는 것은 간병인을 쓰기로 했다는 의미다.

그렇게 간병인에 대해 부정적이던 내가 간병인을 쓰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입원하는 동안 아이를 누가 돌보느냐의 문제에 대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엄마 다음 아빠이고 그나마 출퇴근이 자유로운 편이라 아이를 돌봐야할 적임자는 남편이었다.

그러니 누군가 나의 간병을 해야 하는데 결국 간병인밖에 답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장장 12일간 간병인과 단 둘이 입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1인 보호자만 입실이 가능하기에 혹시 남편이 중간에라도 오면 교대가 복잡해지는 문제도 있고 남편이 나에게 오려면 아이를 두고 와야 하니 또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겨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니 나는 왠만하면 간병인과 지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처음부터 간병인을 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1차적으로는 가족을 생각할 것이고 가족이 간병이 불가할 때 간병인을 생각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간병인을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간병인의 첫인상은 좀 무서웠다.

나보다 나이도 한참 많으신 어른이셨는데(엄마와 동갑인 74살)체격도 크신 편이라 '과연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되었다.

어쨌든 남편은 나를 입원시키고 아이 때문에 가봐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바로 간병인과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내 성격은 처음 본 사람과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그 분은 나중에 알고보니 직업상 환자에게 맞추는 스타일이라 별 대화가 없었다.

그런데 처음에 나에게 정확히 한 얘기가 하나 있었는데

아침 8시~9시는 아침 시간이고, 점심은 1시~2시고, 저녁은 6시반에서 7시반이에요


시간에 대한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저 말을 공식적으로 하기에 나는 '쉬는 시간'으로 이해해서 최대한 그 시간은 지켜드리려고 노력했다.

오죽하면 내가 수술하며 들어가면서도 '저녁 드시고 기다리세요'라고 했다.


솔직히 누군가와 그것도 잘 모르는 사람과 24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용인과 피고용인, 환자와 건강한 자, 또 젊은 사람과 나이든 사람 묘하게 많은 상황들이 그 분과 나 사이에는 있었는데 그 분은 상당히 눈치 빠르게 내 성격과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 분이 편하게 생각되기까지는 나에게는 상당히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분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기까지 아주 공적으로 나를 대했고 나름 정해진 스케줄을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몸무게를 재고 아침을 먹고 산책을 하고 치료 스케줄을 맞추고 저녁에는 몸을 씻고 피부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복을 못입는 나의 잠옷을 손세탁을 해주는 등의 생활을 했다.


그러다 수술 후 위급 상황을 겪은 후 1인실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는 정말 둘만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어느 정도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이 없으니 대화를 하기도 편했다.

1인실이라 tv도 마음대로 볼 수 있었는데 tv를 원래도 보지 않았지만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기에 주로 그 분이 보았는데 그 분은 한참 유행하는 미스터트롯을 즐겨 보셨다.

나도 덕분에 미스터트롯의 노래 그들의 사연들을 주워듣게 되었다. 딱히 트로트를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나는 흥미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분과 미스터트롯의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면 참 한가롭고 여유있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그 분은 나에게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연상하게 했다. 외할머니는 몸집도 크고 씩씩하신 분이었다. 생활력 없는 외할버지를 대신에 자식 여섯을 키우고 해외유학까지 보낸 억척 같은 분이셨다.

첫 손녀였던 나에게는 늘 '착하다 착해'라고 애정을 표현하셨는데 가끔 만날 때는 용돈도 넉넉하게 주셨다. 그리고 '넌 커서 꼭 큰 일을 할 거'라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나에게 실현하려 하신 분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일본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였는데도 바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장례식에 참여했고 장례식 내내 발인까지 외할머니를 배웅했다.


점점 나는 외할머니가 살아돌아오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렸을 때 외할머니네 놀러가면 닭을 좋아한다고 백숙을 해주시던 또 예쁜 옷을 사주시던 그리고 착하다고 칭찬을 아끼시지 않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몸을 못움직여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는 상황임에도 어린 시절 이후로 누군가 이렇게 나를 돌봐준 적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막 어리광을 부리거나 또 그 반대로 딱딱하게 대하지 않았고 그 분도 공적이면서 사적인 경계선이 명확해서 난 참 편했다.

보통 그 분 일의 패턴이 수술 환자가 일주일 정도 입원하니 일주일 일을 하고 쉬는 스케줄로 일을 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입원이 길어지게 되자 휴가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나는 언제 퇴원을 할지 일정이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수술 후 응급상황이 있었던 나는 며칠이라도 더 입원하고 싶었고 쉬지 못하는 그 분의 눈치도 보였지만 이런 나의 고민을 아는지 쿨하게 "퇴원할 때까지 내가 봐주고 갈게."라고 했다.

물론 내가 고용주는 맞다. 그러나 구두 계약도 계약이고 또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노동의 조건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긋날 때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듯이.

그래서 입원이 길어지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 분이 흔쾌히 동의해 줘서 나는 마음 편히 있을 수 있었다.


입원 생활을 하면서 보호자가 환자를 지극 정성 돌보는 것도 보았지만 갈등이 생기는 것도 많이 봤다.

가장 큰 문제는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 1인만 허락되는 상황에서 일주일 혹은 그 이상 온전히 환자에게 붙어서 간병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보호자가 여러 명이 돌아가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교대나 혹은 환자에 대한 정보 전달이 되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이 봤다.


물론 여전히 보호자보다 간병인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내가 전에 가졌던 편견처럼 무조건 간병인은 안쓰겠다는 그런 고집은 오히려 사랑하는 가족들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울러 본인도 가족처럼 질척거리는 관계가 아니라 조금은 공적이고 건조한 관계에서 치료를 받는 것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암환자로서 평소에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고 또 보낼 수 없던 시간들을 보냈다.

수술과 응급상황 그리고 회복에 이르는 12일간 그 분과 함께 보냈던 시간은 지금은 아득하게만 느껴지지만 분명히 나에게는 어떤 형태의 '추억'이 되었다.


참 나는 수술실로 들어갈 때나 또 당장 응급수술을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편더러 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지금 나에게 오는 것보다는 내 마음 편하게 아이를 잘 돌봐주고 있는 것이 나에게 더 힘이 된다는 걸 나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라마와 달리 수술실에 들어갈 때 누워서 가족과 대화를 나누며 수술문이 닫히는 그런 상황과는 참 많이 달랐다. 그래도 몸이 멀쩡하니 휠췌어 정도를 타고 갔고 수술실 문이 닫히자 바로 수술실이 아니었고 환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곳은 또 다른 큰 대기실이었고 그 대기실에서 수술실에 입장하면 꽤 많은 수술실들이 있었다.

수술에 대한 이야기는 또 다음 기회에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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