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 장도 남지 않은 하룸(하룻밤의 룸메이트)
하룸과 함께 했던 이틀(하룻밤을 걸친) 동안의 사진을 핸드폰 사진에서 찾아보았다.
우리는 투 샷의 사진을 찍지 않았을뿐더러 서로 사진도 찍어주지 않은 것도 확실했다. 그렇지만 내 사진 어딘가에 하룸의 뒷모습이라도 찍힌 사진이 있을까 찾아봤지만 어디서도 하룸의 흔적은 없었다.
내가 하룸을 만났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으니 내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의심을 한다 해도 증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나는 그날 분명히 혼자 자지 않았고 룸메이트가 있었다.
그래도 하룸을 떠올리게 하는 사진이 몇 장이 있기는 했다. 하룸이 '시집'을 산 '이상의 집'의 진열대 사진 한 장과 그날 함께 읽었던 <<시와 산책>>(2020) 중 두 페이지를 찍어놓은 사진 세 장이었다. 그 두 페이지 내용을 지금 보니 그날 내가 생각했던 하룸과 나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우리가 헤어질 때도 '언젠가 다시 만나겠지요.'라는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이 나눌 법한 인사를 나누었다.
드라마에선 그 대사가 복선이 되어 다시 우연히 만난다지만 현실에선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요.'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당연히 우리는 지금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고, 다시 만났다고 하더라도 알아보기는 꽤나 힘들었을 것 같다. 혹시나 하룸이 내 이름을 기억한다면 몰라도.
하룸과의 만남
생각해 보니 하룸의 나이를 알고 있다! 나보다 10살 아래였다.
하룸과 만난 곳은 조계사의 '템플 스테이'에서였다. 나는 재작년 겨울, 코로나가 한창이던 기간 '예술인 패스' 소지자에게 제공했던 무료 템플 스테이를 계기로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템프 스테이'에 빠져서 아이와 여러 절의 템플 스테이를 체험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내가 꼭 혼자만 참여하고 싶은 '템플 스테이'가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닌 '북 템플 스테이'였다.
책과 템플스테이가 연계된 프로그램은 그 당시 조계사가 유일했고, 남편에게 아이를 하루 봐달라고 부탁(협박)을 하고 참여했다.
얼마 만의 혼자 여행인지 기대에 한껏 부풀었고 혼자 신청했으니 혼자 방을 쓸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2인 1실이었고, 내 룸메이트는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 사이 나는 템플 스테이 진행자가 갖고 있던 명단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어 보게 되었는데 나와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이름 란에는 '닉네임'이 쓰여 있었다. 영어 같은 두 글자였는데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 신청을 하면서 본명이 아닌 닉네임을 쓰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을 하면서 이름 옆에 쓰여있는 나이를 보게 되었다. 나이를 보면서 '10살 아래'라고 생각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룸과의 하룻밤
하룸은 조금 늦었고 우리는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끝내고 방 배정을 받고 함께 입실했다. 하룸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태도로 나에게 먼저 인사를 했다.
"인사드려요. 하룻밤 잘 지내요~"
공손한 말투이지만 밝았다. 그리고 닉네임을 쓰는 하룸이란 걸 알았기에 나도 호구 조사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하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끝끝내 알 수 없었고 나도 하룸에게 글 쓰는 사람이란 것도 밝히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템플 스테이 참여자들과 함께 경복궁 앞을 지나 처음 '보안 책방'을 갔다. 그곳에서 함께 읽을 책인 <<시와 산책>>을 샀다. 미리 책 제목을 알려주지 않아서 어떤 책이 지정도서일까 궁금했는데 다행히도 불교와 관련 없는 책이라 마음의 부담을 내려놓았다.
그 후에 <라 카페 갤러리>에서 차를 마셨는데 마침 그곳이 내가 십 년 동안 기부를 하고 있는 <나눔문화>가 운영하는 곳이라 그곳 연구원-와 보기 전에는 그분들은 말 그대로 연구만 하는 줄 알았는데 카페에서 직접 차를 만들고 서빙을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에게 처음 찾아왔노라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2층에 올라가서 빅노해 시인의 '나의 작은방'이라는 사진 전시를 관람하고 책 한 권을 샀다.
아마도 그다음에 '이상의 집'을 갔었던 것 같다. 서촌 골목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걸었던 기억이 나서 날짜를 보니 오늘과 같은 4월 9일이었다. 어머나, 이런 우연이!
하룸은 '이상의 집'에서 이상의 시집을 샀다. '날개'라는 제목의 시집이었을 거다.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서 시집을 사지 않았기에 하룸이 왜 그곳에서 시집을 사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도대체 하룸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 후에 한 군데 더 작은 서점에 들렀고,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와 '시와 산책'을 읽었다. 그때 아마도 포스트잇을 붙여가며 열심히 읽었을 텐데 그래도 사진까지 남긴 두 페이지가 있었다.
그 두 페이지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난다.
그러니 성별도 세대도 달랐지만, 소극적으로 사귀었고 말없이 헤어졌지만, 나는 이것이 우정이 아니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시와 산책>> 중에서
책 사진으로 남은 하룸
아마도 그날, 나는 하룸과의 만남이 '템플 스테이' 자체 보다 더 기억에 남아서 이 페이지를 사진을 찍어 놓은 게 아닌가 싶다. 서로 사진을 찍거나 자신의 사진을 부탁하기도 어색한 사이에서 나는 책의 두 페이지로 하룸을 기억하고 싶었나 보다.
하룸에 대해 조금 더 기억나는 정보가 있다.
남편은 있지만, 아이는 아직 없다고 했다. 템플 스테이를 처음 해봤지만 너무 좋다고 다른 절에 가보고 싶다고 해서 해인사와 봉은사를 추천해 줬다. 하룸은 엄마랑 가보고 싶다고 했다.
하룸이 어떤 사람인지, 또 어떤 속내로 템플 스테이에 왔는지 또 템플스테이에서 뭘 느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타인이 서로가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며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렇다. <<시와 산책>> 이 책을 볼 때마다 나는 '하룸'을 기억할 것이다. 하룸은 나에게 와서 꽃이 된 것이 아니라 책이 되었다. 하룸의 닉네임조차 잊었지만 하룻밤 나와 함께 했던 그 공기가 책장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