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리의 두 남자

by 북도슨트 임리나


수많은 우연들이 만든 하나의 사건



우리가 기억하는 한 사건은 대부분 수많은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낸다.


대성리의 그날이 그랬다.


내가 제시간에 도착했더라면,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았더라도 어둠 속에서도 게시판을 볼 수 있었다면, 그곳에 두 남자가 없었다면, 아예 조금 더 미래라서 삐삐라도 있었다면...


지금도 가끔 그날을 떠올리면 나는 수많은 가정을 해보고는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겹쳐서 그날의 사건을 만들어냈으니 어느 하나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살다 보면 이렇게 모든 것이 아귀가 딱 들어맞는 날이 있고, 그날이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만의 우연이 아니라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던 그 해의 나의 선택에 대해서도 가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취업 공부를 선택했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때만 해도 대학교 4학년 11월 첫째 주에는 모든 대기업의 공채가 있었고, 4학년이 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깡다구로 그 선택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닌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순진한 열정이 있었다고 변명해 본다.


그런 내가 선택한 것은 '학생회 활동'이었고 내가 속한 단과대학의 학생회를 찾아갔고 나는 문화부장이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왜 내가 문화부장을 맡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 직책의 활동으로 학교 행사의 사회를 봤고, 그 사진이 졸업 앨범에 실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날 학생회 MT로 대성리에 갔어야만 했다.



대성리의 어둠



나는 다른 친구들과 시간에 맞춰 함께 출발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일주일 4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그날도 과외를 하고 출발했어야만 했다. 지금이야 핸드폰이 있어서 이런 늦은 출발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지만, 삐삐(호출기) 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늦게 출발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마다 대성리 역에서 기다리겠다'라는 게 약속이었다. 그 시절 MT는 소규모가 떠날 경우 역에서 내려 즉석에서 민박을 구하는 방식이었기에 숙소의 연락처가 있을 리도 없었다.



나는 인천에서 과외를 끝내고 청량리역까지 전철을 타고 갔지만, 경춘선 기차 시간까지 맞출 수 없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다고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올 성격의 나는 아니었다. 나는 한 번 더 머리를 써서 버스를 타고 대성리로 출발했고, 버스로 가면 기차 막차 시간까지 맞추거나 조금 늦더라도 친구들이 기다려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버스는 어마어마하게 막혔고 나는 자정 가까운 시간에 컴컴한 대성리 역에 혼자 내리고 말았다.


이때부터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친구들이 없다면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교통편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 나 혼자가 아니었다. 어인 일인지 남자 두 명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나는 그 사람들에게 내 사정을 말했던 것 같다. 여차저차 혼자 도착했는데 친구들이 안 나온 것 같다고.


그러자 그 사람 중에 한 명이


"우리도 누구를 기다리려 나왔는데 오지 않네요. 우리랑 같이 가요. 부인이랑 아이들이랑 놀러 왔어요."


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결정해야 했다.


그냥 대성리 역에서 밤샐 각오를 하든지, 아니면 이 남자 둘을 따라가야 하는지.


짜장과 짬뽕도 아니고, 뉴욕과 파리도 아닌, 죽느냐 사느냐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그리고 살면서 이렇게 어려운 결정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친구들과 약속은 이미 기차 막차 약속까지만 지켜진 것 같았다. 이 밤중에 친구들이 버스 타고 늦게 올 나를 예상할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 대성리 역 어둠 속에서 홀로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 남자들을 따라가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부인과 아이들도 있다고 하지 하니 말이다. 믿기로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어둠 속의 동행



물가 쪽에 텐트를 쳤다는 그 남자들의 말을 듣고 따라나섰다. 남자들을 따라 한 5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한 남자가 뒤를 돌며 나에게 말했다.


"부인도 아이도 없다고 하면 어떡할 거예요?"


그 순간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 순간 도망을 가야 하는 건지 공포감이 확 몰려왔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의 두려움이 그 남자들에게 전해졌는지 다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부인도 아이도 있어요."


그리고는 다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이 사람들의 부인과 아이들을 볼 때까지는 내 운명이 어찌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십여 분쯤 걸어갔을까. 다행히도 내 눈앞에는 서너 개의 텐트와 부인과 가족들이 보였다.



'살았다.'


아까부터 두려움도 숨기고 있었기에 안심했다는 것도 티 낼 수 없었지만 얼마나 마음이 놓였는지 몰랐다.


일행분들은 나의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이것저것 음식도 주고 잠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공짜 잠자리가 불편해졌다. 그리고 불청객인 내가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그래서였다. 나는 텐트 한 쪽 구석에서 자는 둥 마는 둥. 해가 뜨자마자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그곳을 서둘러 나와 대성리 역으로 갔다.


첫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대성리 역에 도착한 순간, 어젯밤에 보이지 않았던 게시판이 보였고 그 게시판에는 내 이름과 함께 민박집 어디로 오라는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그랬다. 어젯밤에도 그곳에는 이미 게시판과 약도가 있었다. 어두웠기에 보이지가 않았을 뿐이었다.


그 약도를 보자마자 너무 반가워서 또 밤에 발견하지 못한 나 자신을 원망하면서 민박집을 찾아갔고 그 새벽에 나타난 나를 보고 친구들은 혼비백산했다.


친구들은 막차시간까지 내가 오지 않자 약도를 그린 종이를 역 게시판에 붙여두었던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상봉을 했고, 친구들은 나의 무용담을 들으며 대단하다고 했다.


그날의 여러 우연들은 낯선 남자, 낯선 일행과의 하룻밤을 신세 지게 해주었다.



믿음으로 핀 꽃



이제는 핸드폰이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이런 우연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했다면 전화를 하면 되고, 또 혹시라도 배터리가 방전되면 어디선가 충전을 하면 되니까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 그래서 대성리에서의 일은 내 인생에서 단 한 번 일어났던 일이었다.


나를 재워줬던 그 남자들은 그 당시 삼십 대였다면 지금은 육십 대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사람들은 그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중간에 장난으로 '우리 부인도 없고 아이도 없어요.'라고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 말이 스물세 살의 여자에게 주었던 공포감의 무게도.


무서웠지만 정말 감사했다. 그 어둠 속에서 나에게 함께 가자고 손 내밀어 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어떤 밤을 보냈을까. 나는 감사했지만 그때는 어떻게 감사함을 전해야 하는지 생각을 못 한 것 같다. 무섭고 불안하고 불편해서 오로지 빨리 벗어나기만을 바랐던 것 같다. 그래서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고 당연히 연락처도 묻지 않고 나와버렸다.


그렇지만 그날 어둠 속에서 그 사람들이 내민 손을 덥석 잡은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만 그때의 나의 선택과 그 남자들의 배려가 세상을 향한 믿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사람에게 아무 대가 없이 하룻밤의 자리를 내어준다는 호의를 받아본 경험이 그때가 유일무이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람들의 나에게 베푸는 배려와 호의를 의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32년 전이다. 대성리 어둠 속에서 만난 이름 모를 남자 두 분들, 그분들은 나에게 타인에 대한, 사회에 대한 '믿음'이 되었다. 그렇지만 중간의 그 장난은 정말 무서웠다. 아직도 그 순간의 공포는 인생 최고의 공포의 순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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