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아는 '병숙이 고모'
나는 병숙이 고모의 성을 모른다.
그저 병숙(이름)과 고모라는 조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아버지의 먼 친척이라고 추측한다. 아버지의 친형제라면, 큰고모, 막내 고모 이런 식의 서열을 앞에 붙이는 호칭이고, 이름에 고모를 붙인다는 것은 폭넓게 아버지 쪽 ‘사촌 고모’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병숙이 고모에 대해서 정확히 아무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거니와 나도 묻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물어봤다 한들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형제들만 해도 여섯 명이고, 아버지의 사촌 형제까지 내가 다 알 수도 없거니와 어렸을 때부터 많은 친척들이 오갔기에 그들을 다 정확한 관계로 알기보다는 ‘친척’으로 퉁쳐서 크게 범주화했다.
막연히 내가 짐작하는 ‘병숙이 고모’가 우리 집에 함께 있었던 이유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먼 친척뻘 집에 ‘식모’처럼 일을 하러 온 경우였다.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우리 가족들이 병숙이 고모를 ‘식모’로 대우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 당시는 집안일이 많아서 병숙이 고모만 일할 수는 없었을지도 몰랐지만 엄마와 병숙이 고모는 함께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누구도 병숙이 고모에게 명령조로 말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호칭만 해도 막내 고모는 '병숙이 언니'라고 불렀고, 병숙이 고모는 우리 엄마에게 '언니'라고 불렀다.
병숙이 고모는 그렇게 우리 집에서 일을 하다가 결혼을 했다. 그 당시에는 적당한 혼처가 생기면 일을 해주던 집에서 혼수를 준비해서 결혼을 시켰다. 하지만 병숙의 고모의 결혼 상대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적당한' 남자란 말이 가장 적절했을 것 같다. 본인의 딸이라면 이것저것 재고 알아보고 보냈겠지만, 어린 내가 봐도 적당하다 싶으니 덥석 보내는 그런 느낌이었다.
결혼을 하고 병숙이 고모는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은 우리 남동생보다 한두 살이 어렸던 것 같다. 남동생은 그 당시 모두가 보내고 싶어 하는 사립 유치원에 다녔는데 졸업 후에 그 교복을 병숙이 고모의 아들에게 물려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병숙이 고모가 어떤 사람과 결혼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립 유치원까지 보낼 형편이었나 아니면 무리를 했는지 모르지만 내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병숙이 고모'와의 재회
몇십년 만에 고모를 다시 만난 곳은 막내 고모의 장례식이었다. 막내 고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혼자 살고 있었기에 장례를 치르는 실무를 조카인 내가 담당하게 되었고, 나는 장례식장에 꼬박 있어야만 했다.
그냥 얼굴만 봐도 나는 바로 '병숙이 고모'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친근감을 느꼈고, 병숙이 고모는 나에게 조의금을 건네주었다.
막내 고모의 장례식은 죽음의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인간 관계가 많지 않았던지 간소했고 부음도 거의 하지 않았기에 조의금을 받는 담당도 없었다. 장례비는 막내 고모가 유언과 함께 남긴 현금과 나머지는 큰고모가 부담했다. 그러니 조의금이란 명목으로 나에게 건넨 건 장례식을 치르느라 동분서주하는 나에게 건네주는 용돈의 의미가 컸다. 병숙이 고모에게 받은 조의금을 누군가 줄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을 알면서도 나에게 건넨 이유는, 고모와 내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지만 '병숙의 고모'의 이십 대 시절, 나의 어린 시절의 어느 부분인가 중첩되고 그로 인해 서로 설명할 수 없는 친근감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장례 기간 동안 나에게 조의금을 건넨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병숙이 쟤가 지금은 참 잘 살아. 검정고시로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하고 이젠 아주 똑똑해.’
장례를 치르고 나서 큰 고모가 나에게 한 말이었다.
이 말이 나의 끊어진 기억부터 지금까지 고모의 인생을 다 알려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말이지만, 현재의 모습이 꽤 괜찮다는 말 같아서 듣기 좋았다.
집안이 가난해서 도시의 친척 집에서 일을 하다가 시집을 갔고 자식을 키우고 이제는 자신의 공부를 하고 있다는 성공 스토리로 들렸다.
'병숙이 고모'의 의미
‘병숙이 고모’의 성이 궁금했지만 이제 와 묻기도 어색해서 그냥 넘어갔고, 병숙이 고모를 챙기던 큰 고모도 돌아가신 지금은 내가 궁금하다고 해도 물어볼 집안 어른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병숙이 고모'는 나의 탄생부터 초창기 성장을 지켜본 가족 같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고모는 나의 유년 시절의 동거인 중 한 명이었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아빠, 엄마, 여동생, 남동생이라고만 생각하고 지냈지만 내 기억과 어른 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끔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막내 고모도 어린 시절 함께 살다 시집가면서 출가했다.
우리 집에서 집안일은 엄마와 병숙이 고모가 주로 했으니 어린 나를 돌보기도 했을 것이고 나와 놀아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이름과 얼굴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할 리가 없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 40년쯤 지나 처음 얼굴을 봤는데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병숙이 고모'라고 부르며 인사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늙었음에도 '하나도 안 변했다'라고 느낄 만큼 선명히 기억되는 얼굴이었다.
'병숙이 고모'는 내 유년 시절의 기억만이 아니다. 그녀의 인생은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생이다. 먹고살기 어려울 때 딸(아들이 아니라)을 먼 친척 집으로 보내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던 시절의 '딸'의 인생이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입장에 처한 그 많은 '병숙이 고모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노동력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금은 핵가족화되면서 사촌이 왕래도 적어졌을뿐더러 사촌 집에 아이를 맡아 기르게 하는 경우는 더우기 없다. ‘병숙이 고모’는 나의 유년 시절 기억의 한 조각인 동시에 이제는 사라진 ‘문화’이며 ‘노동’이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으면 꼭 '성'을 물어보고 싶다. 그 시절, 우리 집을 위한 '노동'의 감사함을 세 글자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