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2023 국민 독서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성인의 종합독서율은 43%다. 전자책과 오디오북을 포함한 일반 도서를 1년에 1권도 읽지 않은 성인이 10명 중 6명이다. 읽는 독자나 읽지 않는 비독자로 분명하게 나누어지지만 결국 읽지 않는 시대에 독자든 비독자든 오늘날 냉소의 답변으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분명 독서라는 좋은 무기가 있지만 현실적으로 읽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는 없다. 사회가 원하는 인재는 그 분야의 전문가이지 책을 많이 읽고 지적 가치가 높아도 아무 쓸모가 없는 시대에 사회는 무관심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더 큰 문제로 다가온다.
왜 읽지 않을까? 읽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변만 보아도 책을 읽지 않지만 책에 관심을 가지는 비독자는 많았다. 어린이들도 책을 좋아는 독자와 비독자로 나눌 수 있다.
당장 필요이상으로 독서가 중요하게 와닿지 않는 것과 대화와 토론, 놀이에 아무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독서를 멀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매슈 루버리가 쓴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서 “지각, 언어처리, 주의력, 해독, 이해 등 당연하게 느껴지는 단계 하나만 누락되어도 읽기는 불가능해진다.”라고 말한다.
이런 단계에서 오는 불편함이 책 읽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책 그 자체에서 오는 거부감이 더 크다.
어릴 적 책과 친근하게 접한 어린이는 도서관이나 책방, 책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독서환경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독서하는 의욕을 만들어 줄 역량이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고 알릴 것이냐.
읽기를 바라는 열망은 어디에서 올까. 절반 이상이 교과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에게 책 읽기는 구태연연하게 읽기를 강요하는지 반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읽는다는 것은 복합적 행위에 해당된다. 자율적인 생각과 사고, 뇌의 변화로 인한 인식의 전환 등 나의 세계를 알아가는 힘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갖는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을 만드는 것은 결국 독서밖에 없다. 읽기를 바라는 열망만 있으면 독서는 자연스럽게 열린다.
C.S. 루이스의 <책 읽는 삶>에서 “단순히 타인이 어떠한 사람인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이 보는 것을 우리도 보기 위해서다. 거대한 극장에서 잠시나마 타인의 자리에 앉기 위해서다.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은 작가 덕분이다. 좀체 책을 읽지 않는 친구와 대화해 보면 이 점이 제대로 와닿는다. 안타깝게도 그의 세계는 너무 작다. 우리라면 아마 그 속에서 숨이 막힐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다가 결국 자아 이하가 된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틀로 세상을 바라본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좁은 세상에 갇혀 평가하지만 독서를 좋아하는 이는 시야가 확장되고 가능성이 많다는 긍정의 인식으로 바라본다.
이를 듯 책 읽기의 열망은 우리가 바라는 그 이상의 세계를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가지 못했던 또 다른 세계의 눈을 가진다는 것은 책 읽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 사소하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를 불확실한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접해보는 사람으로 열망을 채워보면 어떨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책을 읽음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라고 했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 나은 삶을 그려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