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졸업’에서 수업의 본질에 대한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나는 학교가 아닌 학원에서 독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에 약간의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의구심은 모두의 문제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읽는 방법을 가르칠 거예요. 일대일로 맞짱 뜰 수 있는 생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에요. 문제 풀이 기술이 아니라 시험 지문에 등장한 글을 읽고 본능적으로 답을 찾을 수 있는 본질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풀이 스킬, 예상문제 그런 거 말고 애들이 텍스트를 스스로 읽을 수 있게요.”
수능위주의 획일적이고 주입식 교육이 아닌 오래된 시간을 통한 텍스트를 읽는 능력을 키우는 근육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가 단순 읽기 형식이거나 질보다 양의 독서를 지향했기 때문이다. 질적인 독서가 없다 보니 문해력이 떨어지고 읽기의 기본적인 성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독서가 주는 감동은 읽을수록 나이가 들수록 굵직한 맛이 있다. 읽는 것에 익숙해질 때 삶의 길은 책이 스며들고 더 나은 여정으로 나아가는 힘을 얻는다. 독서는 로망이 아니다. 로망이 되지 말아야 한다. 읽고 쓰는 삶에 흡수하는 아웃풋이 되어야 한다. 독서를 단순히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끌어당겨 활용하는 것이 능동적인 독서이고 진정한 아웃풋을 낼 수 있는 방법이고도 하다.
매슈 루버리가 쓴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인간은 글자를 읽게 진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화 능력과 달리, 문자를 읽고 해독하는 능력을 모든 사람이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이어서 인간의 뇌는 다른 용도로 진화된 기능을 읽기에 전용(轉用)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인구의 대부분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터넷의 확산 이전부터 많은 사람이 다양한 이유로 읽기를 힘들어했다.
힘든 읽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생각하고 비판하고 새로운 인지를 알아가는데 익숙한 결과를 마련해 나아가는 것이 좋은 삶으로 가는 힘이 된다.
마크 세이덴버그 교수는 "우리는 왜 읽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읽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다”라며, "읽기는 여전히 유일무이한 작업으로, 우리가 글자를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다른 어떤 것을 통해서도 얻기 어려운 것들이다”라고 말했다. 또, "아마 미래에도 읽기는 필수적일 것이고 읽기는 다른 정보와 연결되는 통로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읽기가 단순히 수능을 위한 방편으로 삼는다면 독서라는 큰 틀에서 볼 때 성인이 되면 책을 가까이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다. 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획일적인 문장을 외우고 답을 찾아가는 방식이 문제의 다양성을 창출하지 못하였고 비판의 냉소적인 사고를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독서소멸’이라는 불안한 읽기의 미래에서 우리가 놓친 읽기의 중요성을 공론화하고 학교에서는 실효성 있는 독서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니콜라스 카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현대인들에게 경고한다. "인터넷을 사용할수록 훑어보고, 건너뛰고, 멀티태스킹하는 신경회로는 강해지는 반면 집중력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시대에도 깊이 있는 사고 활동을 위해 독서가 중요함을 던지고 있다. 핀란드는 국민의 77%가 매일 1시간씩 책을 읽고, 국민 67.8%의 도서관 이용률이 보여주듯이 매일 저녁 식사 이후에 온 식구가 모여 한두 시간씩 책이나 신문을 읽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장기적인 읽기 투자가 핀란드 독서의 미래를 밝게 했고 독서강국이라는 타이틀이 가진 힘은 곧 나라의 튼튼한 삶의 질을 가져오고 있었다.
불안한 독서의 미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읽는 능력이 부족한 아이에게 읽는 즐거움을 어릴 때부터 키워가는 독서시스템의 전면 개편이다. 지속적인 우리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탄탄한 독서의 진화가 만들어질 수 있는 독서환경을 만들어 보자. 읽기를 미래가 불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