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천고마비, 등화가친, 일엽지추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사계가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고유한 특색을 드러냈던 시절에 자주 쓰던 말이다. 예전엔 구월 중순만 넘어도 사색과 책 읽기에 적합한 날씨였지만, 이제 가을이 와도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렵다.
새벽에 풀벌레 소리에 잠이 깬다. 가을 새벽은 몸이 움츠리는 계절이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생각이 많아지고 감정이 충만한 시기다. 이럴 때 책과 함께한 시간은 충만함이 더 포갠다. 그 책의 공간에서 즐기는 시간은 고독하지 않다. 문장 한 구절 한 구절 의미를 더했고 되새기는 시간만큼 외롭지 않았고 글귀를 헤매는 순수한 소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지혜로운 노년이 되기도 했다. 길을 잃어도 좋을 만큼 독서는 우리의 삶을 세상에 마주 서게 한다.
‘성공한 사람들이 아침에 하는 일’을 쓴 로라 밴더캠(Laura Vanderkam)은 “아침은 누군가가 당신을 필요로 하기 전, 온전히 나를 위한 시간”이라며 “이 시간에 의미 있는 일을 먼저 해두면 하루 전체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내면을 돌보는 시간인 책과의 동정은 저자가 말한 하루가 달라지고 생산적인 뇌파로 전환해 활발하게 느껴지는 오늘 내일을 힘껏 보낼 수 있다.
낯섦은 뇌가 새로움과 위험을 감수하는 것에 마음을 열도록 미묘하게 신호를 보낸다고 하니 가을 아침에 낯섦의 독서시간을 가지는 것도 우리 일상에 새로운 신호를 감지한다. 문장의 숲에서 길러진 그 힘은 어떤 불확실성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삶의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과연 독서의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종이책이 소멸되어 간다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하는 이유는 내면적 고뇌를 이해받고 싶은 마음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다고 내면적 고뇌를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삶으로 들어가야 하는 끈질긴 고독의 순간을 견뎌내야 한다. 독서가 그리 쉬운 것이라면 우리의 삶은 유순하게 흘러갈 것이다. 어릴 적 읽었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비단 어린이에게만 국한되지 않은 깊은 철학적 가치를 지닌 이야기로 ‘어린왕자’의 삶 속의 사유들은 성인이 되어서 심연 깊숙이 내제된 마음을 품을 수 있었다. 이를 듯 우리의 삶이 복잡하게 얽혀있기에 책에서 마음의 소용돌이를 벗어나는 힘을 길러내야 한다.
‘부자는 책을 가까이하고 가난한 사람은 책을 멀리한다’라는 식의 이야기는 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란 독서에만 한정돼 있지 아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서 얻을 힘을 키워가는 것은 당연한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그것들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오찬호의 ‘납작한 말들’에서 “독서의 효과가 독서일 때, 타인의 생애를 납작하게 찌그러트리지 않는다” 말은 협소한 무지의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이 많아져야 독서의 효과적 가치를 넓혀가는 시간을 채울 수 있다는 말이다. 건강한 독서는 지적 허영심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 나의 무지를 알아가는 단계이다.
그렇다면 책 읽는 시기가 있는가.
특히 가을에 읽은 책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짧지만 강렬하다. 언어 안에 숨겨놓은 문장과 사유는 긴 시간 동안 마음속에 남아 나의 삶을 정직하게 만든다. 니체는 “책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라고 말했다. 가을에 책을 읽는 것은 내 영혼을 담아 새로 써 내려가는 삶의 여운을 채워가는 시간일 것이다. 나의 마음을 섬세하게 포착해 위로해 주는 그런 시간이야말로 불안한 삶을 영혼이 있는 삶으로 극복할 수 있다.
책 읽기 좋은 시기는 가을만이 아니라 내 삶의 적기의 시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거기에 또 다른 시절의 책 읽는 마음이 기다려질 것이고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나는 장면처럼 진정한 관계를 의미를 깨닫는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가 범람하는 시대에 ‘읽는’ 행위 자체가 귀하게 여길지 모르겠다. 읽는다는 것은 손해 볼 일도 아니다. 그저 문장 속 나를 빗대어 생각하고 위로하는 시간을 가져보자. 가을이 책 읽는 좋은 날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