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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유현 Jul 06. 2022

<역마차> - 영화는 이미 완성되었다

Stagecoach, 1939 - 존 포드

 영화사 초기부터 등장한 서부영화는 1910년대 초에 이미 자리를 잡았다. 실제로 미국의 서부에는 무법자, 카우보이, 원주민 부족들이 존재했으니 서부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영화라고도 볼 수 있다. 서부영화가 인기를 얻은 이유 중의 하나로 이런 장르 자체가 가진 시의성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초기 서부극은 카우보이/원주민, 역마차/철도, 말/카누, 총/화살 등의 이항대립을 영화적 문법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문명/야만의 키워드를 강조했다. 질서 정연한 문명과 무법천지인 야만의 대립 속에 주인공에 해당하는 영웅(무법자, 카우보이, 선한 악당)은 끝내 질서의 유지를 도우며 안정과 진보에 위협들에 대항하여 싸운다.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거장으로 손꼽히는 ‘존 포드(John Ford)’ 역시 무성영화 시대에 초기 서부영화들을 찍은 바 있다. 그리고 그가 유성영화 시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만든 서부영화인 <역마차>(Stagecoach, 1939)는 장르의 역사를 넘어 영화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훌륭한 영화로 평가받고 있다. 존 포드나 <역마차>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만큼 연구된 것도 많고 수많은 해석이 있어 다루기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너무 놀랍고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이 많았기에 피하기보단 정면으로 부딪쳐 본인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나열해보고자 한다.     


  <역마차>는 1939년에 나온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미 이 시기부터 기술을 제외한 영화의 내러티브나 캐릭터는 완성이 되어있었구나’였다. 심지어 기술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클라이맥스의 액션 시퀀스의 연출은 80년이 넘은 요즘에 봐도 촌스러움이 없다.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선 『수학의 정석』을 배워야 하는 것처럼 영화를 보고 공부하는 사람도 정석을 보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런 의미에서 <역마차>는 장르 영화의 정석이라고 감히 이야기해보고 싶다.  

    

 영화는 톤토라는 한 마을에서 시작한다. 원주민들과 정착민들이 계속 서로를 죽이며 싸우고 있고 원주민 중에서 ‘아파치 부족’의 ‘제로니모’가 악명을 떨치고 있다. (아파치 부족은 실제로도 용맹하기로 소문난 부족이고 제로니모 역시 실제 아파치 부족에서 가장 위상을 떨쳤던 인물이다) 아직 철도가 놓이지 않은 이 시대에 주요 교통수단은 말이 끌고 다니는 역마차다. 톤토에서 로즈버그라는 마을로 가는 역마차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함께하게 된다. 원주민과 싸우러 떠난 남편을 찾아 로즈버그로 가는 귀부인, 그런 그녀의 호위를 자처하고 나선 사기꾼, 돈을 빼돌려 달아나려는 은행가,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나는 매춘부와 주정뱅이 돌팔이 의사, 주정뱅이 의사에게 붙잡혀 같이 가게 된 위스키 판매원, 탈옥수를 잡으러 떠나는 보안관, 그리고 마부, 이렇게 총 8명이 함께 길을 떠난다. 로즈버그로 가던 중 탈옥수 ‘링고 키드(존 웨인)’가 합류하고 이들은 아파치 부족의 위협을 뚫고 목적지인 로즈버그까지 험난한 길을 내달린다.     


 줄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역마차>의 캐릭터 구성은 다양하다. 성별과 나잇대도 어느 정도 다양성을 띤 편이지만 그보단 직업군의 차이가 가장 크게 드러난다. 한 사람도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매춘부와 자본주의의 상징인 은행가도 포함되어 있다. 총 쏘는 보안관과 마찬가지로 총을 쏘는 무법자(탈옥수)가 한 공간에 있다. 귀부인을 호위하는 게 사기꾼인 점도 재밌다. 의사와 위스키 판매원 캐릭터는 재밌는 것을 넘어 신선하기까지 하다. 의사라는 직업은 천대받는 것이 아님에도 그 인물이 온종일 술만 마시는 주정뱅이인 데다 돌팔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멸시당한다. 위스키 판매원은 목사님처럼 생긴 인상에 사람들에게 잘 기억되지 않는 존재다.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인 ‘피콕’으로 불리지 못하고 심지어 총도 맞는 비운의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런 위스키 판매원 덕분에 의사는 역마차 안에서도 술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둘은 일방적인 관계인 거 같으면서도 상호보완적인 느낌이 강하게 든다. 어울릴 거 같지 않은 조합인데도 캐릭터의 케미가 상당하다.      


 또한, 캐릭터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새로운 이데올로기도 제시하고 있다. ‘레이디 퍼스트’가 기본예절인 시대지만, 매춘부는 같은 여성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 영화 내내 드러난다. 물을 마실 때 은잔을 주지 않고 밥을 먹을 때도 일부로 자리를 피해 앉았다. 이 매춘부를 제대로 된 여성으로 인정해주는 건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멸시받는 존재들이다. 돌팔이 의사는 마을에서 쫓겨날 때 매춘부의 팔짱을 끼며 “백작 부인 가시죠!”와 같은 대사를 날리며 당당하게 앞으로 걷는다. 그리고 무법자인 링고 키드는 그녀를 잘 대우해주는 걸 넘어 청혼까지 한다. 영화는 이렇게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제시되는 건 귀부인의 출산 사건 이후이다. 예기치 못한 귀부인의 출산에 주정뱅이 의사와 매춘부 여성이 큰 활약을 한다. 의사는 이때 그 좋아하는 술 마시기를 멈추고 이미 마신 술을 게워내는 노력 끝에 완벽하게 아기를 끌어낸다. 같은 여성인 매춘부는 산후조리를 돕고 밤낮으로 귀부인을 간호하며 아기를 알뜰살뜰 돌본다. 이때부터 역마차를 함께 탄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눠진 사회적 계급을 넘어 함께 인생을 나아가는 가족 같은 공동체의 이데올로기가 제시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로즈버그로 가는 마지막 길에서 그들은 아파치 부족의 집중 공격을 당한다. 이때는 또 무법자인 링고 키드가 전방위적으로 활약한다. 모두가 힘을 합쳐 사투를 벌인 후에 조금씩 변화하던 그들은 진정한 하나가 된다. 영화의 엔딩에 이르러 로즈버그에 도착해 링고 키드가 자신의 가족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려 할 때 모두 하나 되어 그를 돕는다. 심지어 보안관은 그를 잡는 것이 목적이었고 그가 복수하는 걸 지켜봤지만 이 모든 걸 용인하며 풀어주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인물들은 이제 행복을 찾아 각자의 삶을 떠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든든한 새로운 공동체를 얻게 되었다.     


 캐릭터뿐 아니라 영화의 내러티브도 훌륭하다. 역마차는 멈추지 않고 로즈버그라는 끝 마을을 향해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확실한 목적지가 정해진 상태에서 나아가는 영화는 역마차처럼 한시도 동력을 잃지 않는다. 장르적으로 충분한 재미를 주는 신(scene)들이 이어진다. 백미는 역시 아파치 부족과 벌어진 싸움이다. 보는 내내 이 장면을 당시 기술력으로 어떻게 찍었을지가 궁금했다. 상당히 현실적으로 그려진 총싸움에 액션과 리액션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아파치 부족과 역마차 둘 다 계속해서 달리는 중에 마상 액션을 펼친다는 게 놀라웠다. 심지어 링고 키드 역의 존 웨인은 마차에서 선두마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말에서 말로 뛰어다니는 놀라운 액션을 선보인다. 날아온 화살이 피콕에 맞으며 시작되는 이 놀라운 시퀀스는 약 6분간 진행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버릴 부분이 없을 정도의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시퀀스의 마무리 또한 깔끔하다. 아파치 부족의 공세에 살 방도가 없다고 느낀 사기꾼은 한발 남을 총알을 귀부인에게 쏘려고 한다. 붙잡혀서 온갖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 이편이 깔끔하다고 느낀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총을 쏘려는 순간 사기꾼은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아 쓰러지고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목숨을 보전한 귀부인이 멀리서 들려오는 군대의 출격을 알리는 나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뜬다. 일행은 출격한 군대 덕분에 목숨을 보전하게 된다.   


 누군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앞서 언급한 캐릭터나 내러티브가 너무 익숙하고 진부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1939년에 나온 영화라는 걸 감안하면 영화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 그만큼 후대에 다양한 변형으로 등장했다는 증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전반부의 역마차를 볼 때는 타란티노 감독의 <헤이트풀8>이 강하게 떠올랐고, 역마차가 머무는 마을에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들이 떠올랐고, 마지막 링고 키드의 복수 장면에선 정말 많은 고전 서부영화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같은 현대의 변형된 서부영화들이 떠올랐다. 아직은 영화감상을 즐기는 석사생이기에 이 정도밖에는 언급 못 했지만, 다수의 씨네필들은 <역마차>가 후대에 어떻게 변형됐는지 장문의 레퍼런스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화는 이미 완성되어있었다. 그리고 후대의 영화는 완성된 것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대체하면서 나름의 명맥을 유지해오는 것 같다. 이렇게 고전 영화를 봐야 할 확실한 이유를 하나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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