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과 스릴러 장르 고전 영화의 거장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1964년 각각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붉은 사막 Red Desert>(1964)을 히치콕 감독은 <마니 Marnie>(1964)를 만들었는데 두 영화는 제작 시기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두 감독이 추구하는 미학과 스타일이 다른 만큼 그 차이가 영화 안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안토니오니는 의심의 여지없는 모더니즘 감독이지만, 히치콕을 단순히 고전 영화감독으로만 분류할 수 있을지는 의구심이 든다. 따라서 비슷한 시기에 나온 미학과 스타일이 다른 두 영화의 짧은 비교분석을 통해 과연 히치콕을 모더니스트 감독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배우는 학생으로서 세세한 비교분석은 어렵지만, 명백히 드러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두 영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안토니오니의 <붉은 사막>이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1960년대를 풍미한 모더니즘 영화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붉은 사막>은 산업시대의 공장지대를 삭막하고 황폐한 이미지로 그려내며 산업사회로 접어들며 도시가 빠르게 발전하고 환경이 파괴되는 사회상을 디스토피아적 시각으로 드러낸다. 주인공 ‘줄리아나(모니카 비티)’는 자동차 사고 이후로 잦은 신경증적 증상을 드러낸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남편의 직장동료인 ‘코라도 젤러(리차드 해리스)’와 불륜관계에 빠지게 되는 것도 다 신경증에서 기인한 결과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줄리아나의 신경증 원인이 자동차 사고라는 것이다. 자동차는 산업화의 산물이자 대도시의 발전과 함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대표적인 공산품이다. 따라서 자동차 사고로 신경증을 얻은 줄리아나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급변하고 발전하는 사회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사막>은도시화와 관련된 소재를 통해모더니즘적 특성이 드러날 뿐 아니라 예술적 기법에서도 모더니즘적 특성이 드러난다. 모더니즘 이전의 유럽 영화는 현실의 모습이나 대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리얼리즘이 주를 이루었다. 이와 더불어 할리우드는 정형화된 양식으로 찍어낸 고전 영화들을 양산했다. 모더니즘 시기에는 이러한 사실적 재현, 그리고 종래의 규격화된 기법이나 형식이 아닌 새로운 예술적 양식이 등장한다.<붉은 사막>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부터 모더니즘의 예술적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삭막한 공장지대의 풍경들을 보여준다. 이때 포커스는 아웃됐다. 보통 아웃포커스는 카메라가 초점을 맞춘 대상은 선명한 대신 주변은 흐릿하게 보여줘, 찍으려는 대상을 강조할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붉은 사막>의 공장지대 전경엔 초점을 맞춘 대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 흐릿한 풍경들이 나열되고 있을 뿐이다. 흐릿함 속에서도 차가운 금속성의 철골들과 매연을 뿜는 굴뚝, 전반적인 도시의 이미지들을 확인할 수 있다. 황사 안개가 낀 듯 누런 색감의 배경은 쌀쌀맞고 황량한 느낌을 가중해준다. 이런 이미지들에 깔린 사운드도 평범하지 않다. 여성의 날카로운 고음으로 구성된 멜로디가 오프닝 타이틀과 이미지와 함께 깔리는데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용될 법한 기묘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오프닝 타이틀이 끝남과 동시에 컷 전환이 되는데 이때 컷 전환이 상당히 거칠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흐름을 뚝 끊고 다른 장면을 연결함으로써 깔끔하고 정갈한 모더니즘 시대 이전 영화들의 편집 문법과 차별점을 보인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공장지대를 걸어 다니는 줄리아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영화는 줄리아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있고 황폐한 풍경들을 보여주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춘다. 오프닝 시퀀스의 서사만 살펴보자면 아들과 함께 공장지대를 걷다가 행인에게서 빵을 사 공장 뒤편 부지에서 줄리아나가 몰래 빵을 먹는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서사의 중간마다 앞서 오프닝 타이틀에서 본 이미지와 비슷한 빈 풍경들이 병치되어 등장한다. 대신 이번엔 아웃포커스는 아니다. 그리고 인물을 잡을 때도 기존 영화들처럼 프레임안에 안정적으로 담는 것에 주력하지 않는다. 이동하는 장면에서는 어떨 땐 인물이 프레임 아웃되고 빈 풍경들이 남기도하고 어떨 땐 빈 풍경 속에 인물이 프레임 인되기도 한다(이때 배경은 아웃포커스 상태일 때도 있다). 정지된 장면에서도 인물은 프레임에서 잘려 보이거나 아슬하게 모서리에 걸치기도 한다. 예시를 주로 오프닝 시퀀스로 들었지만, 이러한 특징들은 <붉은 사막> 전반적으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붉은 사막>은 아방가르드나 실험영화와는 달리 어느 정도의 서사는 갖추고 있다. 다만 앞서 언급한 리얼리즘 영화나 일반적인 고전 영화와는 다른 모더니즘 영화의 예술적 특성들이 서사의 몰입을 방해하고 영화를 보며 사유할 수 있는 장을 형성해준다.
그렇다면 같은 연도에 나온 히치콕 영화 <마니>는 어떨까? <붉은 사막>의 줄리아나의 신경증이 산업화와 대도시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마니>의 주인공 ‘마니(티피 헤드런)’의 신경증은 어릴 때 트라우마로 인하여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무의식에 남은 끔찍한 기억이 현재의 삶에 어떤 병적인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마니는 정신분석학적으로 뜯어볼 수 있는 주인공이다. 마니의 트라우마는 마치 엄마와 관련된 모종의 사건이 있을 것처럼 암시되고 영화의 서스펜스도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사고하도록 유도한다. 결과적으로 미혼모이고 해군을 상대로 몸을 팔던 엄마가 마니를 추행하려던 해군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엄마를 돕기 위해 어린 마니가 해군을 죽이게 되는 게 트라우마로 남은 사건의 자초지종이었다. 너무 어렸을 때라 해당 기억을 잃었었던 마니는 사건이 경위를 알게 된 후에야 무의식에 잠재된 응어리를 풀 수 있게 된다. 이처럼 1960년대 주류에서 소외당하던 여성의 서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풀어내는 히치콕의 영화는 모더니즘을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시대 이탈리아의 안토니오니와 달리 히치콕은 베트남 반전시위, 정치적 격변, 시민운동, 여성운동 등의 영향을 받은 미국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영화의 기법이나 형식 측면을 살펴봐도 안토니오니와 히치콕 영화는 차이가 크다. 우선 이미지와 사운드의 흐름에 맞게 자연스러운 컷 전환이 일어난다. 또한, 인물의 행위나 나타날 상황에 맞춰 프레임의 구도도 알맞게 짜여있다. 안토니오니 영화보다 서사를 잘 이해하고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유할 것이 전혀 없이 수동적 상태로 영화가 보여주는 이미지들만 받아들이는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히치콕 영화에는 서스펜스가 있고 추리할 수 있는 가려진 텍스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의 상황을 통해 관객은 마니가 회사의 돈을 훔친 도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관객뿐 아니라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마크(숀 코네리)’도 마니가 도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마니가 마크의 회사 면접을 보러 찾아왔다. 마니는 물론 마크의 회사에 돈을 훔치러 왔고 자신의 정체를 모를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마니의 정체는 마크도 알고 관객도 안다. 여기에서 서스펜스가 발생한다. 과연 마크가 마니를 어떻게 처분할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즉, 서스펜스는 영화가 관객에게 중요한 정보를 다 줬고 모든 걸 아는 관객이 이후 촉발된 사건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준다고도 볼 수 있다. 서스펜스와 반대의 경우도 <마니>에 존재한다. 번개가 치거나 빨간 것을 보면 경악한 인물의 얼굴에 붉은 조명이 드리우고 우리는 이를 통해 마니가 신경증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녀와 엄마와의 관계, 그녀가 밤마다 꾸는 꿈 등을 통해 문제의 근원이 되는 트라우마 사건에 대해 계속 추리를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정보를 한꺼번에 주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가려놓은 채로 조금씩 그 가림막을 벗기는 형태로 영화가 진행되기 때문에 관객은 순간마다 주어지는 상황적 정보를 통해 가려진 텍스트를 유추해야 한다. 이처럼 히치콕 영화는 때로는 정보를 많이 줘 서스펜스를 만들어내고 때로는 적게 줘 가려진 텍스트를 유추하게끔 하기도 하며 관객을 조련한다.
이를 통해 방법과 사유의 양상은 다르지만, 관객은 안토니오니의 모더니즘 영화를 볼 때와 비슷한 효과를 얻어갈 수 있다. 비록 표본은 적은 편이지만, <마니> 한편만으로도 스릴러 고전 영화의 거장을 넘어 모더니스트 감독으로의 히치콕의 면모를 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주제적인 측면까지 고려한다면 히치콕은 모더니즘을 넘어 포스트모더니즘까지 다루고 있는 거장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