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홍대용은 1765년 35세 때 사신으로 가는 숙부를 따라 중국으로 갔다.
청나라 문인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모습
홍대용은 중국에서 친교를 맺은 중국 선비 조욱종이 공부방법을 물어보자 자신이 생각하는 공부법을 적어 편지를 보낸다. 이른바, 홍대용의 <여매헌서>다. 매헌은 조욱종의 호다.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이었다.
홍대용의 여매헌서를 통해 과거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공부했는지 알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을 일부 소개한다.
독서는 실로 기억하여 외어 읽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아니지만, 초학자(初學者)로서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더욱 의거할 데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매일 배운 것을 먼저 정확하게 외고 음독(音讀)에 착오가 없이 한 뒤에 비로소 서산(書算)을 세우고, 먼저 한 번 읽고 나서 다음에는 한 번 외고, 그 다음에는 한 번 보며, 한 번 보고 나서는 다시 읽어 모두 3,40번 되풀이한 뒤에 그친다.
매양 한 권이나 혹은 반 권을 다 배웠을 때에는 전에 배운 것도 아울러 또한 먼저 읽고, 그 다음에 외고, 그 다음에는 보되, 각각 서너너덧 번 반복한 뒤에 그친다. 글을 읽을 때에는 소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리가 높으면 기운이 떨어진다.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 눈을 돌리면 마음이 달아난다. 몸을 흔들어서도 안 된다. 몸이 흔들리면 정신이 흩어진다.
글을 욀 때에는 틀려서는 안 되고, 중복되어도 안 되고, 너무 빨라도 안 된다. 너무 빠르면 조급하고 사나워서 음미함이 짧으며, 그렇다고 너무 느려도 안 된다. 너무 느리면 정신이 해이하고 방탕(放蕩)해져서 생각이 부풀어진다.
책을 볼 때에는 마음속으로 그 문장을 외면서 그 뜻을 곰곰이 생각하여 찾되, 주석(註釋)을 참고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궁구(窮究)해야 한다. 만일 한갓 눈만 책에 붙이고 마음을 두지 않으면 또한 이득이 없다.
이상의 세 조목은 나누어 말하면 비록 다르나, 요컨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체득해야 하는 점에서 동일하다. 모름지기 몸을 거두어 단정히 앉고, 눈은 똑바로 보고, 귀는 거두어들이며, 수족은 함부로 놀리지 말며, 정신을 모아 책에 집중해야 한다. 계속 이처럼 해 나가면 의미가 날로 새로워 자연히 무궁한 묘미가 쌓여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공부할 때에 회의(懷疑)를 품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병통이다. 그러나 그 병의 근원을 따져 보면, 뜬생각에 따라 쫓다가 뜻을 책에 전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뜬생각을 제거하지 않고 억지로 배제하려고 하면 이로 인해 도리어 한 가지 생각을 더 첨가시켜 마침내 정신적인 교란만을 더하게 된다. 어깨와 등을 꼿꼿이 세우고, 뜻을 높여 한 글자 한 구절에 마음과 입이 상응하게 되면, 뜬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없어지게 된다.
뜬생각이란 하루아침에 깨끗이 없어질 수는 없다. 오직 수시로 정신을 맑게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흑심기가 불편하여 꽉 얽매여 없어지지 않으면, 묵묵히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배꼽 근처에 집중시킬 때 신명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뜬생각은 사라지게 된다. 과연 이러한 방법을 잘 실행한다면 얼마 안 가서 공부하는 것이 점점 익숙해지고 효험이 점차 늘어나 오직 학식만이 날로 진척될 뿐 아니라, 마음이 편안하고 기운이 화평(和平)하여 일을 함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에만 힘쓰고 정밀(精密)하게 된다. 위로 이치에 통달(通達)하는 학문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의리(意理)는 무궁한 것이니 함부로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문자를 거칠 게 통한 사람은 반드시 의문이 없게 마련인데, 이는 의문이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궁구(窮究)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문이 없는 데서 의문이 생기고, 맛이 없는 데서 맛이 생긴 뒤에라야 능히 글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중략)
인생 백 년간에 근심과 괴로움이 쉴새없이 찾아들어 편히 앉아 독서할 시간이란 거의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진실로 일찍 스스로 깨달아 노력하지 않고, 구차스럽게 살아가다 가는 쓸모 없는 재주로 끝나고 말 것이니, 만년에 가서 궁박한 처지에 놓였을 때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