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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행(旅行), 지나간 날의 노트

낯선 곳에 이르면 -----

by 석운 김동찬 Jan 13. 2022

가을 여행(旅行), 지나간 날의 노트


1991년이면 내가 만으로 마흔세 살이 되던 해였다. 마흔 살이 되기 싫어 홍역 앓는 어린아이처럼 온갖 몸부림을 다하며 헛된 몸짓을 했던 88년이 지난 지 어느덧 3년이 된 해이기도 하였다. 


마흔 살을 넘어 사는 것은 너무 지루한 삶이 될 터이니 마흔 이전에 할 일을 다해놓고 미련 없이 훌훌 삶을 마감하자고 젊은 날 친구들과 술잔을 마주 들어 약속했었지만 아무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모두가 마흔 살을 넘겨 살고 있었다.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약속을 들먹이는 사람도 없었고 누구도 마흔 넘어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 대해 힐난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마흔 살이 넘어 살고 있는 나의 삶이 부끄럽기만 했다.


남들은 나를 보고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나 좋으세요? 사업도 잘 되시고 예쁜 부인에 예쁜 딸들에…… 부러우실 게 없으실 것 같아요.’ 사람들이 흔히 나보고 하는 말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때 겨우 마흔 살이 된 나는 중견 무역회사의 사장이었고 크지는 않았지만 서초동에 사층짜리 사옥을 갖고 있었고 회사에서 가까운 청계산 자락엔 아담한 양옥집도 갖고 있었다. 사회에 나온 지 얼마 안돼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지 십 년도 안되어서 일구어낸 결과였으니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나타난 내 외면의 모습에 불과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가 제대하고 나오면서 하고 싶던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사회에 나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사업을 시작하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한 번도 그때 내가 하고 있던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내가 하고 있던 일은, 가장으로서 나이 드신 부모님의 아들로서 회사의 사장으로서 내가 하고 있던 일은, 단지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한 준비 과정 혹은 수단일 따름이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든 그때 하고 있던 일들을 빨리 끝내고 싶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못하였다. 내가 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해야만 되는 일들이 있었고 내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는 곳이 나를 담고 있는 사회라는 곳이었고 나는 쉽게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단 마음을 먹었으면 과감히 발을 빼고 완전히 몸을 돌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전진해야 하는데 나는 그러지를 못하고 있었다. ‘지금 그랬다가는 이것저것 모두 다 잘못될 수도 있고…… 그러니 조금만 더 있다가 그때 그만두고 내 할 일을 하자,’라고 하는 것이 엉거주춤한 내 태도였고 비겁한 내 변명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90년대가 되었고 다시 한 해가 지나 91년이 되었을 때 나는 무척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는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제대로 내 할 일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회사에 나오면 대충 한 바퀴 둘러보고 직원들에게 할 일을 맡겨 놓고는 내 방에 틀어박혀 책과 음악 속에 침잠해 들어갔다. 닥치는 대로 읽고 닥치는 대로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읽고 아무리 들어도 내 속은 차지 않았다. 가슴 한 구석 뻥하니 뚫려 있는 빈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았다.


아마도 그 빈 구멍을 채우고 싶어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지나간 시절의 일기장이나 노트들을 뒤적여 보면 유독 91년에 써놓은 것들이 많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 글들에선 아직도 심할 정도로 외로움이 묻어 나온다. 왜 그렇게 외로워했을까? 지극한 사랑으로 항시 내 곁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고 언제라도 나를 반겨주는 다정한 친구들이 내 삶의 울타리를 든든히 지켜주고 있었는데 나는 왜 그렇게 외로워했을까? 아마도 그 외로움은 나라는 존재의 본질이 아닐까 생각된다. 젊었을 때나 나이 든 지금에나 그 외로움은 항시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나는 때때로는 그 외로움의 한가운데에 또 어떤 때는 그 외로움의 언저리에서 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가을 여행, 지나간 날의 노트가을 여행, 지나간 날의 노트


보다 유익한 아니 보다 보람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외로움과 정면 대결을 했어야 했었다. 그러나 천성이 게으르고 마음이 약한 나는 대결보다는 회피를 택했고 항시 그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소극적인 방법만을 택했던 것 같다. 그 방법 중에 하나가 여행이었다. 그 해 91년에, 방 안에 틀어박혀 책과 음악 속을 내내 헤매다가 마냥 가슴이 답답해지면 밖으로 나와 차를 몰았다. 행선지는 없었다. 서초동 사무실에서 나와 신호등이 켜지는 대로 차를 몰았다.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국도를 달리다가 다시 샛길로 나와 시골길을 달리다가 어디던 마음에 닿는 곳이 나오면 차를 세우고 사방을 서성이다 저물어지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어느 땐 너무 멀리 나오면 아무 곳에서나 하루 이틀 묵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며칠 동안은 마음을 잡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그때 가장 많이 갔었던 곳이 여주 이천 주변, 춘천 가도와 양평 부근, 아 그리고 한탄강이 있었다. 결혼하기 전 아내와 한두 번 갔을 때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기에 자주 그쪽으로 차를 몰았었나 보다. 지금은 관광지로 개발되어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땐 참으로 한적하고 아름다웠었다. 특히 강가의 갈대밭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해 91년 가을, 10월의 어느 날 오후 또 방 안에서 혼자 외로움과 씨름을 하다가 다시 뛰쳐나와 간 곳도 한탄강이었다. 그곳 사람의 자취가 없는 한탄강에 가을은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고 흘러가는 강물은 맑았고 강둑의 갈대밭은 탐스럽게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갈대밭 속을 걸으며 두 손을 내밀어 갈대를 쓰다듬으며 이럴 땐 누구를 만나더라도 쉽게 사랑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런 가을바람 속에서라면 이렇게 부드러운 갈대숲 사이에서라면 옷을 모두 벗고 마음껏 심호흡을 해도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날 저녁 집에 돌아와 시를 썼다. 


가을 旅行


낯선 곳에 이르면 精液을 흩뿌리고 싶다

일상의 衣裳을 훌훌 털고

아무라도 붙잡고 사랑을 나누며

나는 그에게

그는 나에게

낯선 사람이 되어주고

서로의 외로운 냄새를 홀가분히 맡아보고 싶다

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강아지들처럼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라면

가슴을 활짝 피고

音癡인 내 목소리를 마음껏 열어보겠다

自然은 가장 너그러운 암컷

언제든 내 설움을 지극한 官能으로 받아들이고

그땐

불어오는 바람 속에 

흩날리는 내 體毛가 부끄럽지 않다


보라!

낯선 곳에 흩뿌려진 내 精液에 싹이 트면

강가에 흐드러진 갈대이고 싶다

은빛 머리 휘날려 지나는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

바람이 불면 서로의 몸을 비벼 속삭여 주리라


그대의 외로움은 결국 그대의 것이라고 (91.10.30)


2015년 4월에 석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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