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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석운 김동찬 Oct 11. 2024

가을에 읽는 시(詩) 3

김부식의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과 윤동주의 자화상(自畵像)

김부식(金富軾)의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


앞의 글에서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를 감상했습니다. 이 가을에 베를렌의 시와 더불어  읽고 싶은 시는 시간과 공간을 뒤로하여 고려 때의 김부식(金富軾)이 쓴 감로사차혜소운(甘露寺次惠素韻)입니다. 조금 생뚱맞다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이럴 때 같이 읽으면 오히려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분과 같이 감상해 보겠습니다.


甘露寺次惠素韻(감로사차혜소운) 

                      김부식(金富軾, 1075~1151)


俗客不到處(속객부도처)

登臨意思淸(등림의사청)

山形秋更好(산형추갱호)

江色夜猶明(강색야유명)

白鳥高飛盡(백조고비진)

孤帆獨去輕(고범독거경)

自慙蝸角上(자참와각상)

半世覓功名(반세멱공명)

 

감로사에서 시승(詩僧) 혜소의 운을 따라


속세의 나그네는 오지 않는 곳

올라와 보니 마음과 뜻이 맑아진다

산의 모습은 가을에 다시 좋고

강물 빛깔은 밤이라 오히려 밝다

흰 새는 높이 날아 사라지고

외로운 배는 홀로 가볍게 간다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위에서

반평생 동안 공명을 찾았구나

 

김부식은 고려 중기 때의 학자이자 문신(文臣)으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20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한림원 등의 여러 관직에 있으며 높은 문명(文名)을 날렸습니다. 관직을 떠난 후에는 왕명에 의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했습니다. 학문이 높고 시와 글에 능해서 당대에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세상의 칭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이 시는 그가 개성 오봉산(五峯山)에 있는 감로사에 올라 시승 혜소(惠素)가 지은 시에 차운(次韻: 다른 사람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는 것)한 시입니다. 


이 시를 가을에 읽으면 좋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셋째 줄의 山形秋更好(산형추갱호)가 마음에 와닿기 때문입니다. 更을 ‘고칠 경’으로 읽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다시 갱’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김부식은 아마도 가을이 되기 전에 감로사에 몇 차례 올라왔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좋았지만 가을에 올라오니 새로운 느낌을 받아 ‘다시’ 좋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답은 첫 줄과 둘째 줄에 있습니다. 


속세의 나그네는 오지 않는 곳(俗客不到處)

올라와 보니 마음과 뜻이 맑아진다(登臨意思淸)


속세의 나그네는 오지 않는 곳이라 하였지만 이 시를 짓기 전까지의 속세의 나그네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김부식 자신이었습니다. 관직에 있으며 더 높은 자리와 학자로서 더 높은 이름을 좇던 때의 자신이 바로 속객(俗客)이었고 그땐 올라오지 않았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올라와 보았더니 이제껏 안개 속에 있었던 것 같던 마음과 뜻이 맑아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 그의 입에서 탄식처럼 터져 나온 구절이 ‘산의 모습은 가을에 다시 좋고(山形秋)’입니다여기에서 가을은 산에 다가온 계절의 가을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에 다가온 인생의 가을이기도 합니다세상의 잡다한 명리(名利)에 얽혀 살다가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떠나 속객이 아닌 사람이 되어 올라와 보니 가을 산의 모습은 다시(좋아 보이고 마음과 뜻은 맑아졌던 것입니다정신이 맑아지니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았던 강물의 빛깔이 밤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밝게 보였습니다(江色夜猶明).


그다음 연에 나오는 흰 새와 외로운 배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돌아본 자아(自我)를 비유하는 구절입니다. 그러한 마음 자세에서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탄식하듯 토해낸 구절이 마지막 연입니다.


自慙蝸角上(자참와각상) 부끄럽구나, 달팽이 뿔 위에서

半世覓功名(반세멱공명) 반평생 동안 공명을 찾았구나


와각(蝸角)은 달팽이 뿔입니다. 김부식은 분명 장자(莊子) 칙양편(則陽篇)에 나오는 와각지쟁(蝸角之爭)의 우화를 생각하며 이 구절을 썼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니 달팽이 뿔처럼 좁은 곳에서 서로 잘났다고 공명을 다투었던 지난날이 너무 허망하고 부끄러워 이렇게 썼을 것입니다.  


김부식이 이 시를 언제 썼는지 정확한 시기는 모릅니다. 단지 마지막 구절에서 평생이 아닌 반생(半世)이라 하였으니 나이가 들었지만 아주 노년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나이에 벌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공명의 허망함을 깨닫고 부끄러워했으니 학식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 그릇의 크기가 넓고 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생각나는 시가 한 편 있어 같이 감상하고 싶습니다.


자화상(自畵像)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산모퉁이를 돌아 논 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追憶)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는 이 시를 22살 때인 1939년에 썼습니다. 반평생 공명을 추구하다 감로사(甘露寺)에 올라 부끄러움을 느껴 시를 쓴 김부식과 달리 윤동주는 22살의 어린 나이에 외딴 우물을 들여다보며 스스로가 미워져 이 시를 썼습니다. 계절은 같은 가을이지만 두 시인이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다릅니다. 김부식은 헛된 것을 좇아 낭비한 지난 삶이 안타까워 시를 지었지만 윤동주는 빼앗긴 나라의 젊은이로 너무도 무력한 자신이 가엾어서 이 시를 썼습니다. 


이 시를 읽으며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를 돌아봅니다.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가는 아파트와 빌딩의 숲속에서 사는 우리에겐 과연 홀로 찾아가서 들여다볼 우물이나 있을까요? 지난 세기를 살았던 윤동주의 때와 달라 오늘날 논 가의 외딴 우물을 찾기는 힘들겠지만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의 어느 한순간을 ‘마음의 외딴 우물’로 정해놓고 거기 비추는 나의 모습을 살펴보면 어떨까요? 거기에서 윤동주가 본 미운 사나이 같은 나를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사랑스러운 내가 있을까요? 윤동주의 우물에는 그가 꿈꾸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달, 구름, 하늘, 파아란 바람, 그리고 가을, 그가 꿈꾸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우물물에 비치는 허상(虛像)이었지 우물 바깥 그가 발 디디고 서 있는 현실의 실상(實像)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물에 비친 자기가 미워졌던 것입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라고 합니다. 빼앗긴 조국, 희망 없는 앞날, 하지만 생각해 보니 자기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엾게 느껴져 다시 우물로 가지만 여전히 그 우물 속의 나는 밉기만 합니다. 다시 우물을 떠나 돌아가다 만나는 ‘그리워지는 나’는 그 옛날 어린 날의 순진무구한 나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걱정 근심 없던 나입니다. 이제 청년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미운 내가 가엾어질 때에 차라리 옛날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기에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라고 읊은 것입니다. 마지막 연에 나오는 우물 속은 눈에 보이는 실제의 우물이 아니고 집으로 돌아가며 머릿속에 담아 온 우물 속 풍경입니다. 그 우물 속에는 여전히 그가 꿈꾸던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어린 시절의 나, ‘추억(追憶)처럼 사나이’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이 각박하고 경쟁이 심한 사회 환경 속에 아주 힘든 상황 속에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현실만 들여다보지 말고 때로는 윤동주가 찾아갔던 것과 같은 외딴 우물을 마음속에 만들어놓고 자신을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치고 힘들어서 포기하려고까지 하는 내가 미워 보이고 가엾어 보이기도 하겠지만 다시 잘 보면 ‘그리워지는 나’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그리운 나’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윤동주가 꿈꾸었던 ‘달, 구름, 하늘, 파아란 바람’이 있는 가을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모두 힘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아무리 힘들어도 빼앗긴 나라에 살던 윤동주의 시대만큼 힘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2024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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