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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모니카 Oct 06. 2024

그러니까 이건 지어낸 이야기

소설입니다.

*모두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소설이라고 하지요.



“사랑한다고 한 번만 말해주면 안 돼?”

“사랑해.”

“이름도 붙여서.”

“사랑해, W.”

“정말?”

“아니. 네가 말해달라며.”


C의 무덤덤한 대답에, W는 하던 일을 멈추고 옆으로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


“그만할 거야?”


C는 침대 한쪽 구석으로 처박힌 이불을 다시 끌어와 덮으며 아주 사무적인 태도로 물었다. 

W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새로운 질문을 억지로 비집어 넣었다.


“있잖아. 너,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무슨?”

“내가 더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그 때는 너도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 안 해.”

“왜?”

“당연하지. 나는 널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만할 거면, 나 씻는다?”

“가지 마. 그냥 얘기나 좀 하자. 아무거나.”


W의 만류에 C는 그를 향해 다시 돌아누웠다.

그리고는 아주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주먹을 살짝 쥐어 W의 입가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쩌구저쩌구 신문의 C 기자입니다.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아, 네. 저는 도예가 W입니다. 흙을 빚어서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C의 장난에 W도 결국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 큰 어른 둘이 침대에 엉켜 나누는 대화 치고는 아주 영양가 없고 싱거운 내용이었다.

한참이나 그런 무의미한 대화가 이어진 끝에, C가 달큰하고 눅눅한 말투로 입을 벌렸다.

녹아내린 아이스크림 콘을 한참이나 쥐고 있다 막 떼어낸 손의 감각 같은 달큰함과 눅눅함이다.


“나, W의 작업실에 가보고 싶어. 네가 흙을 빚어서 그 ‘무언가’를 만드는 걸 그냥 가만히 지켜보고 싶어.”

“재미 없을 텐데. 나 작업 중일 때는 한 마디도 안 하니까.”

“괜찮아. 그렇게 한참이나 네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그 따분함이 참을 수 없어지면, 그 때는 네 등에 찰싹 달라 붙을 거야. 매미가 나무에 붙는 것처럼.”

“응? 그게 뭐야.”

“상상만 해도 좋은가 봐? 너 지금 입꼬리가 귀에 걸려 있어.”

“아닌데? 대놓고 작업 방해하겠다는 선전포고를 좋아하는 작가가 어디에 있냐.”

“여기.”


W는 입으로는 아니라고 하면서도 못내 행복에 잠겨 죽을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나 미소가 걸린 입꼬리 끝이 어쩐지 위태롭게 파르르 떨리는 듯도 하다.


“그렇게 등에 달라 붙어서 꼬치꼬치 캐물을 거야.”

“뭐에 대해?”

“작가님, 지금 여기는 어떤 의도로 만드신 건가요? 저 표현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요? 이 흙을 고르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리고, 저를 왜 좋아하시나요?”

“역시 너는 이상해.”

“당연하지. 나는 외계인이니까. 지구에서 노닥거리는 게 지루해지면, 다시 우주로 도망가버릴 거야.”

“아, 벌써 섭섭하네.”

“근데 이건 외계인의 촉인데 말야. W도 외계인이야. 확실해.”

“내가? 전혀 몰랐는데.”

“지구에 온 지 꽤 되어서 까먹었나 보다. 너도 외계인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우리가 만난 건 운명 같은 거지.”

“뭐야.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운명은 본인의 감정이나 의지와는 관계가 없는 거야. 결국엔 그렇게 되고 마는 거지.”


C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그런 허황된 소리를 잘도 늘어놨다.

W는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도 C의 말을 속으로 몇 번이나 곱씹는다.

C의 단어들이 아주 잘게 쪼개져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씹고 또 씹고는, 식도에 힘을 주어 삼켜 넘긴다.

그리고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C에게 물었다.


“다음주에 시간 돼? 홍대 그 카페에서 저녁에 좀 볼래?”

“응? 다음주? 시간 없는데. 진짜 바빠. 잠 잘 시간도 없을 걸.”

“잠깐이면 돼. 10분 정도만 들렀다 가.”

“알았어. 무슨 일인데?”

“그냥 좀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서.”

“응, 알겠어.”

“누군지도 안 물어봐?”

“보면 알겠지.”


C의 대답에 W는 입술을 양옆으로 잡아 당겨 ‘한 일’자를 만들었다.

직선으로 뻗은 입술선은 마치 벽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틈 같기도 하고, 도자기를 빚다가 손톱을 잘못 걸어 넣어 긁힌 기다란 자국 같기도 하다.


***
 
 C는 아주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꽤 넓은 카페 안에 들어섰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테이블이 나란히 늘어선 공간을 재빠르게 눈으로 훑는다.


“아.”


얄미울 정도로 동글동글한 뒷통수를 발견하고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걷는다.

동그란 뒷통수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이리저리로 흔들렸다가, 마침내는 온통 검은색에서 살구빛으로 변했다.


“왔어? 일단 앉아. 시간 별로 없지?”

“응. 다시 곧 가봐야 해.”


C는 커다란 숄더백을 빈 의자에 대충 던지며 옆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C의 눈동자와 마주친 건 처음 보는 낯선 여성의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C는 여성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다급하게 시선으로 W를 찾았다.

W는 곤란한 듯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W의 성대가 소리를 뱉어내는 것보다, 여성의 손길이 더 빨랐다.

여성은 C가 보라는 듯, W의 팔을 자신의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오, 안녕하세요.”


C는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을 지우려 애쓰며 여성을 향해 조금 늦은 인사를 먼저 건넸다.

여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W는 검지로 이마 언저리를 긁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여자친구. 오늘부터 정식으로 만나기로 했어.”

“아, 진짜? 축하해. 잘 됐다! 근데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돼? 퇴근하고 바로 오느라 지금 좀 급한데. 미안하다, 좋은 얘기하는데 타이밍 못 맞춰서.”

“아, 응응.”

“그러게 힌트라도 주지 그랬어. 그러면 화장실 들렀다 오는 건데.”


C는 평소처럼 가벼운 농담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이 공간이 꽤나 익숙한 듯 화장실을 찾아 걸음을 향했다.

화장실 입구를 코앞에 뒀을 때, C의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너도 화장실 못 들렀다 왔어?”

“미안. 이렇게 갑자기 말해서.”

“그러게. 나 지금 엄청 당황했다. 네 여자친구 소개 받을 줄 알았으면 그래도 눈썹은 좀 그리고 왔을 텐데. 뺑글이 안경 쓰고 왔잖아. 어쩔 거야.”

“아, 그리고 나 다음 달에 도쿄로 가.”

“일본? 갑자기? 여행?”

“아니, 가서 한 1, 2년 살려고. 관심 있던 갤러리에서 상주작가 모집하길래 지원했었거든.”

“와, 오늘 나 놀라서 죽게 만들려는 암살 계획이라도 세우고 왔어?”


C는 그 와중에도 웃음기를 지우지 못한 얼굴로 W에게 물었다. 아니, 물음표는 사실 없었다.


“사실, 여자친구도 지금 도쿄 살거든. 자리 잡을 때까지는 그 집에서 몇 달간 같이 살기로 했어.”

“미친, 이거 다 구라지? 갑자기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그 사람이 마침 도쿄에 산다고? 작가님, 소설도 이렇게 쓰면 개연성 없다고 독자들한테 악플 받아요.”

“농담 아니야.”


W가 불안한 듯 자꾸 뒤를 확인하며 C를 향해 제법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C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금붕어처럼 입술만 몇 번인가 뻐끔거렸다.

그 때, 복도 저 끝에서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들렸다.

누가 봐도 한껏 꾸민 옷 차림에나 어울릴 법한 날카로운 굽 소리다.

C는 W의 뒤통수 너머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 소리에 시선을 맞추며,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좋아해.”

“뭐?”

“너 좋아한다고.”

“어?”

“그러니까 가지마. 나랑 있어, 여기. 서울에.”

“…이제 와서? 몇 달 동안 그렇게 아니라더니. 이제 와서?”

“좋아해, 좋아해.”

“그만해. 나 자리 너무 오래 비웠다. 여자친구가 오해할 거야.”

“오해? 오해라고?”


C가 W의 셔츠 자락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와 동시에 W는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누군가 끼워맞춘 타이밍처럼 W가 뒤를 돌자마자 그의 시선 끝에 ‘여성’이 걸렸다.


“두 사람 다 화장실 간다 하고 너무 안 오시길래요.”


불편함을 감추지 않겠다는 의지가 아주 날카롭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태도.

C는 여느 때처럼 실없고 장난끼 가득한 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화장실 문 비밀번호 외우고 오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마침 W가 왔길래 비밀번호 물어보던 참이었어요. 들어갈 수가 없네, 들어갈 수가.”

“아, 네.”

“안 되겠다. 저는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 좀 가볼게요. 다음에 약속 잡고 다시 제대로 만나요. 그때는 꼭 화장실 들렀다 올게요. 반가웠어요!”


C는 마지막까지 실 없는 농담을 던졌다.

하지만 진짜로 화장실이 급했는지도 모르겠다. C의 얼굴은 곧 기절할 듯이 허옇게 질려 있었거든.

서울과 도쿄의 계절이 한 번 바뀌고, 또 새로운 계절이 다다를 때쯤.

W의 스마트폰이 단정하게 한 번 진동했다. 파르르. W의 기다란 속눈썹도 그와 맞춘 듯 떨렸다.


-나 지금 도쿄인데.

-주소 보내 봐. 갈게.


쌀쌀한 계절에 맞지 않게 얇은 반팔 셔츠만 걸친 C가 프랜차이즈 카페 입구 앞에 서 있다.

C는 그 어느때보다 여유로운 얼굴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고 있었다.


“아, 5분만 더 늦으면, 내가 먼저 너 납치해서 같이 우주로 도망치려 했는데.”

“우주? 어디?”

“글쎄. 어느 별로 가고 싶은데? 말만 해. 다 데려가 줄게.”

“근데 ‘납치’라는 말과 ‘같이 도망치다’라는 말이 양립할 수 있는 거야?”

“안 될 게 뭐 있어? 겉으로는 납치 당한 걸로 해. 하지만 너도 나랑 같이 우주로 도망가고 싶은 건 이미 알고 있어. 맞지?”

“밥은? 아직이지? 잠은 좀 잤어?”

“둘 다 아직.”

“일단 밥부터 먹자. 배고프지?”

“사실, 나는 식인 외계인이야.”


C는 장난스럽게 W의 팔목을 끌어다 입으로 가져다 댔다. 그리고는 진짜로 와앙 물어버렸다.

W의 손목에 C의 잇자국이 제법 선명하게 꽂혔다.

W는 익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목을 두어 번 쓸어내렸다.


“있잖아, 우린 진짜 어떻게 되는 걸까.”

“글쎄. 운명대로 되고 있는 거겠지. 근데, 뭐 먹을래? 도쿄에서 먹고 싶던 거 없어?”

“너.”

“또 이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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