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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10시간전

대기업 임원의 퇴직

롤모델과 반면교사의 차이

요즘 쓰고 싶은 주제가 있었는데, 의지만 있고 정확한 글의 구조가 보이지 않아 답답했었다. 오늘 새벽 불현듯 평소 존경하는 대大 작가님(필명 '포도봉봉*')의 에세이 한 편을 보고,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생각의 편린들이 완성되었다.  

https://brunch.co.kr/@hypatia/70

*브런치 에세이계의 큰 획을 그으신 작가님.


링크된 '23화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매우 훌륭한 글임으로 감히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무례한 짓임을 알기에 글에 언급된 키워드 '롤모델'과 '반면교사'만 사용하련다. (물론, 大작가님께 언질은 이미 완료했다. 사용을 허락해 주시리라 믿고...)


이제 본론.


퇴직과 퇴사의 차이는 무엇일까? 국어사전의 힘을 빌리지 말고, 내 맘대로 한국사회 문화심리학적으로 해석해 보면,


퇴직은 회사에서 등 떠밀어 나가라는 개념이고, 퇴사는 내 발로 내가 내 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퇴직 앞에 명예, 희망 등이 붙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아주 잘 아는 H전무가 있다. (존칭 생략)

H전무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에서 30년 근무했고, 30년 중에 6년은 임원(상무)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규모가 작지만 다른 회사에서 여전히 임원(전무)으로 수년째 근무 중이다. H전무와 나는 10년 전 어떤 인연으로 시작해 지금도 가끔 만나 저녁에 가볍게 술을 함께하는 사이다.


H전무에게는 직장 생활 30여 년을 통틀어, 자발적 퇴사라는 개념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오직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끝까지 임원으로서의 책임과 다하고 영예를 누리는 게 목표이기 때문이다. 즉, 명예로운 퇴직만 있을 뿐이다.

미생의 오 과장 얼굴에서 20년을 더하면 H전무의 얼굴이 된다. H전무는 얼굴 전체가 술톤으로 빨갛다.

최근에 H전무를 만났다. 잠시 그 대화를 엿보자.  


H전무: 바그다드야, 나 양평에 땅 샀다.


바그다드Cafe: 예? 전무님? 재테크 때문예요?


H전무: 아니, 퇴직하면 양평 땅에 농막 지어서 일주일 중에 며칠 가서 살려고. 그리고 사람들도 불러서 고기도 구워 먹고 같이 놀려고 그러지.


바그다드Cafe: 아... 전무님 퇴직하려면 몇 년 더 남은 거 같은데요?


H전무: 모르지. 회장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나도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지. 너도 애기랑 와이프 데리고 종종 양평 와라. 소주만 몇 명 사들고 오면 내가 재워줄게.


바그다드Cafe: 네. 전무님.


H전무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에 H전무가 퇴직을 하고 진짜 양평에 농막을 지으면, 나는 애기와 와이프를 데리고 갈 것인가? 아니, 혼자라도 갈 것인가?


H전무께는 미안하지만 나는 가지 않으련다... 왜냐하면 H전무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음에도 같이 술 마실 때 대화의 마이크를 잡고 놓질 않는다. 가령 2시간 술을 마시고 대화를 한다고 치면 1시간 55분이 H전무의 일방적인 말하기 시간이다.


그 말하기 시간의 콘텐츠는 매우 빈약하다. 빈약하다 못해 웃픈 지경이다.


30년간 다닌 대기업 직장 생활 얘기, 골프 얘기, 임원으로서의 직장 생활 얘기, 또 골프 얘기, 현재 중견기업에서의 어려움 얘기, 또또 골프 얘기, 현재 중견기업의 임원으로서의 얘기, 또또또 골프 얘기. 머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H전무가 퇴직을 하고 양평에 농막을 차린다면 없던 콘텐츠가 풍부해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H전무를 바라보며, 그간 열심히 살았고 어느 정도 재산도 모았으므로 퇴직해서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을 것이다. 하지만 퇴직 후에 단순히 '양평에 농막을 지어놓고 있으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노후를 재밌게 보낼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한다면... 과연 몇 명이나 양평의 농막을 찾을까 싶다. 물론, 콘텐츠가 빈약한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함으로 자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콘텐츠가 풍부하고 이야기 거리가 많은 사람들은 찾지 않을 것이다. 2시간 중 1시간 55분을 재미없는 얘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해서 H전무를 보며 '반면교사'를 삼는다.


첫째,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을 것.

둘째, 흥미로운 콘텐츠를 많이 탑재할 것. 그리고 그 탑재된 흥미로운 콘텐츠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도록 할 것.  

    

배울게 많은 어른


H전무와 딱 반대되는 분이 있다. 바로 김정운 작가님. 나의 롤모델이다.

 

이 분의 스토리를 찾아보면 참 재밌는 점이 많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학생 신분으로 베를린에서 공부를 했고, 아르바이트로 장벽 근처에서 경비를 섰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를 하다가 학생들이 자기의 강의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과 꼰대 교수들 사이에서 회의를 느껴 정년이 되기도 전에 자발적 교수 퇴사를 했다. 그리고 일본 시골로 홀연히 떠나 동양화를 배웠다. 지금은 여수의 어느 섬에서 '개'와 함께 책을 무진장 읽고 책을 무진장 쓰고 계신다. ‘노인과 바다‘에 필적하는 ‘노인과 개’라는 제목의 책도 준비 중이신 것 같다.


H전무와 김정운 작가(존칭 생략)는 비슷한 점이 참 많다. 나이도 비슷하고, 아마도 같은 대학을 졸업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누구는 퇴직을 기다리고 누구는 자발적 퇴사를 했다. 누구는 콘텐츠가 빈약하고 누구는 콘텐츠가 넘치다 못해 터지려고 한다. 누구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누구는 그 사람의 강의를 듣기 위해 줄을 섰다.


나는 누군가의 롤모델이 될 만큼의 깜냥은 부족하고 그릇 사이즈도 귀여운 수준이다. 하지만 롤모델과 반면교사 사이를 부지런히 왔다갔다할 것이다. 그러면 최소한 누군가의 반면교사가 되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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