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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그다드Cafe Jul 02. 2024

익숙한 길의 왼쪽 모퉁이를 돌면

자발적 왼손잡이의 소회

무림(미얀마 시멘트 공장)에서 석탄 가루와 석회 가루를 번갈아 고루 먹어가며 왼손 신공 기본기를 2년 익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무림에서 익힌 왼손 신공을 더욱 발전시켜 결국 양손잡이계의 고수가 되었다.


밥벌이(왼손 마우스질), 밥먹기(왼손 숟가락/젓가락질), 양치질(왼손 양치질), 글쓰기(왼손 글쓰기, 아 근데 이건 나만 알아볼 수 있어서 애매한 면이 있다)까지 모든 관문을 차례로 통과했다. 심지어 시계는 오른손에 찬다!


<오른쪽에 찬 시계>


득의양양해진 나는 이제 안상구와는 다르게 오른손이 서걱서걱 짤리저라더 인간답게 우아하게 왼손으로 내가 좋아하는 라면을 완벽한 젓가락질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황선미 작가님이 말한 익숙한 길의 왼쪽 모퉁이를 몸소 직접 돌았다.


두둥! 돌고난 소감은?


그냥... 그랬다. 사실 시네마틱하게 인생이 달라지지도 않았고, 갑자기 뇌 용량이 커지지도 않은 것 같다. 만약 6년 전 그 때 왼손 사용을 결심하지 않고, 쭉 오른손잡이로 살았더라도 지금 사는 인생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즉, 나의 최종 소감은 익숙한 길의 왼쪽 모퉁이를 돌았더니 예전의 익숙한 길과 비슷하더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난 6년간 헛수고를 한 것인가? 시간 낭비에 뻘 짓 거리를 한 것인가? 이렇게 묻는다면 또 조금은 애매하다. 분명 양손을 쓸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단지 조금 소소할 뿐.


양손을 쓸 수 있어 좋은점. (여기서 양손을 쓸 수 있다는 정의는 최소 양쪽의 어느 손이든 젓가락질을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어 설령 한쪽 손이 짤려서 없더라도 라면을 먹을 때 인간의 존엄은 지킬 수 있는 정도를 말한다)


1. Hoya(글쓴이 아들)에게 밥을 먹일 때 나도 동시에 밥을 먹을 수 있다. 심지어 양손으로 젓가락질을 하며 Hoya의 주린 배를 채운다. 이 모습을 본 아내가 처음으로 나의 왼손 수련을 진정 칭찬해줬다. (그 전에는 무슨 뻘 짓이라며, 한심해했다)


2.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앉은 위치에 상관없이 매너남에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오른쪽에 사람이 앉으면 나는 왼손으로 밥을 먹고, 나의 왼쪽에 사람이 앉으면 나는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식이다.


3. 오른쪽 어깨와 손목이 덜 아프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왼쪽 어깨와 손목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4. 마우스질과 필기를 동시에 수행한다. (진정한 멀티태스킹 인간이 되었다)


명백하게 증빙할 수 있는 장점은 여기까지이다. (써놓고 보니 별게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하지만 심적으로 느끼는 장점도 몇 가지 있다. 다만, 증빙할 수 없을 뿐이다.


1. 그 전보다(왼손을 쓰기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창의적이 된 것 같다.


2.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일을 잘하게 된 것 같다. (입체적인 사고와 어려운 문제를 푸는 능력)


3.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타인을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왼손잡이의 고충을 알게됐다. 예를 들어, 모든 가전제품은 오른손 잡이용으로 설계되었다)


4.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


5.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쓸데없고 소모적인 걱정을 덜 하게 된 것 같다.


6.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사고가 유연해진 것 같다.


7.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책을 더 많이 읽게 된 것 같다.


8.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글쓰기를 잘하게 된 것 같다.


9. 그 전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다.


내 지인 중 한 명은, 자녀에게 양손을 가르칠 계획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양쪽 두뇌 발달을 위해서라고 한다. 나는 30살이 훌쩍 넘긴 나이에 양손잡이를 시도했던지라 그 효과가 덜한지도 모르겠다.


아니, 들인 노력 대비 효과가 거의 없어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누군가 나에게 다시 6년 전으로 돌아가, 왼손 수련을 시작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6년 전과 비교하였을 때, 나는 아주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고 과거가 아닌 미래에 시야를 둔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게 왼손 수련때문이라고 할 수 없지만, 나는 왼손 수련이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다. 황선미 작가님은 50대 후반에 왼손 사용을 시도했다고 한다. 물론 작가님은 왼손 사용 전에도 이미 세계적인 동화를 집필하여 세계인에 큰 감동을 주셨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집필하신 그 작가님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는, 꾸준히 왼손을 쓰다보면 50 후반에 오른손만 쓰신 황선미 작가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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