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기 어문계열 출신이 AI 시대에 살아남는 법
"비인기 어문계열 출신이 AI 시대에 살아남는 법"
1922년의 어느 봄날, 비엔나의 한 카페에서 흥미로운 대화가 오갔습니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과 모리츠 슐릭이 만난 자리였습니다. 이날의 대화 주제는 '언어'였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라고 말했고, 이는 후에 그의 대표작 <논리철학논고>에서 유명한 구절이 되었습니다.
100년이 지난 2024년, 저는 제 책상에서 ChatGPT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영어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문득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AI 시대에 '언어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언어학자들은 '랑게이징(languaging)'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는 요리사가 여러 재료를 상황에 맞게 배합하여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순히 레시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식재료의 상태, 손님의 취향, 계절적 특성을 고려하여 요리를 완성하는 것처럼, 랑게이징은 주어진 언어를 상황과 맥락에 맞게 재구성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최근 제가 AI에게 영문 이메일 초안을 요청했을 때의 일입니다. AI는 문법적으로 완벽한 이메일을 작성했지만, 거래처와의 미묘한 긴장 관계나 최근의 시장 상황은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AI가 작성한 "We appreciate your continued support"라는 표현을 "While we understand the current market challenges, we value our partnership and are committed to finding a mutually beneficial solution"으로 수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랑게이징의 실제 사례입니다.
이는 단순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과는 다릅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AI에게 더 나은 답변을 얻어내기 위한 '질문 기술'이라면, 랑게이징은 AI의 답변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대화의 기술'입니다. 예를 들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공식적이고 전문적인 톤으로 이메일을 작성해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것이라면, 랑게이징은 AI가 작성한 이메일을 읽고 "이 표현은 우리 회사의 브랜드, 톤 앤 매너와 맞지 않으니 이렇게 수정해야겠다"라고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직장인들이 이러한 랑게이징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첫째, '맥락 인식 일지' 작성입니다. AI와 대화할 때마다 AI의 답변이 부족한 맥락이 무엇인지 메모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 답변은 우리 회사의 규모나 산업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또는 "이 제안은 현재 시장 상황에 비해 너무 낙관적이다" 등을 기록합니다.
둘째, '크로스 도메인 연습'입니다. 하나의 문제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예를 들어 마케팅 전략을 세울 때, AI의 제안을 단순히 마케팅 관점에서만 보지 않고, 재무, 운영, 인사 관점에서도 검토해 보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매주 한 가지 주제를 정해 서로 다른 세 가지 관점에서 분석하는 연습을 해볼 수 있습니다.
셋째, 'AI 답변 검증 삼단계' 훈련입니다. AI의 답변을 받으면 ①사실 확인(fact check) ②맥락 적합성 검토(context validation) ③실행 가능성 평가(feasibility assessment)의 세 단계로 나누어 검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AI가 제안한 마케팅 전략에 대해, 먼저 제시된 데이터가 정확한지 확인하고, 우리 회사의 상황에 적합한지 검토한 뒤, 실제로 실행 가능한지를 평가합니다.
메이지 시대의 번역가들이 서양의 새로운 개념들을 일본의 문화적 맥락에 맞게 재해석했듯이, 우리도 AI의 출력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랑게이징은 이러한 재해석과 재창조의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기술의 습득을 넘어, AI 시대에 진정한 경쟁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문과생들에게 AI는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수식과 알고리즘으로 골머리를 앓던 우리가, 이제는 AI의 도움으로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의 한계'는 이제 우리가 AI와 함께 확장해 나가야 할 새로운 지평이 되었습니다.
"야, 너네 문과 출신 아니었어?"라는 질문에 이제 우리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제가 바로 AI 시대의 랑게이징 전문가입니다."
... 물론 이렇게 말하면 또다시 "쟤 문과 맞네"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