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시대 번역가에게 배우는 점
1853년 7월, 에도 앞바다. 기록에 따르면, 에도 막부의 통역관 모리야마 에이노스케는 페리 제독의 '흑선'을 마주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증기 엔진의 힘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배는 당시 일본인들의 세계관을 완전히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그의 문서에는 이 역사적 순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특히 서양 문명의 압도적인 기술력에 대한 경외감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024년 어느 날, 제 사무실에서도 비슷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후배가 보여준 ChatGPT의 능력은 흑선의 등장만큼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팀장님, 이 영문 계약서 검토를 AI가 3분 만에 끝냈어요." 그 순간 저는 170년 전 모리야마가 느꼈을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시기의 일본은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당시 '번역가'들의 역할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서양의 문서를 일본어로 옮기는 것을 넘어, 새로운 문명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문명의 번역가' 역할을 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론의 개략(文明論之概略)"에서 "東洋の道德、西洋の芸術(동양의 도덕, 서양의 기술)"이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습니다. 그는 서양의 과학기술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일본의 정신과 문화는 지켜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AI를 대하는 자세와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기술은 AI에게 배우되, 그것을 인간답게 활용하는 지혜는 우리가 가져야 하니까요.
나카무라 마사나오의 번역 작업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그의 대표작 《서양입지론(西洋立志編)》은 Samuel Smiles의 'Self-Help'를 번역한 것인데, 단순한 번역을 넘어 일본의 현실에 맞게 대폭 재구성했습니다. 예를 들어, 원저의 산업혁명 시대 영국의 사례들을 당시 일본의 상황에 맞게 교체했고, 서양의 개인주의적 성공 서사를 일본의 집단주의적 가치관과 조화시켰습니다. 심지어 일부 장은 완전히 새로 써서 넣기도 했는데, 이는 단순한 번역이 아닌 '문화적 번역'의 좋은 예시입니다.
니시 아마네는 더욱 혁신적이었습니다. 'philosophy'를 '철학(哲学)'으로, 'subject'와 'object'를 '주관(主観)'과 '객관(客観)'으로 번역하면서, 그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용어들은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지금은 일상적인 표현이 되었습니다.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번역과 표현들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가 AI 시대의 새로운 용어들을 대하는 태도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이 '집단 지성'을 활용했다는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번역가들은 '번역사(飜譯社)'라는 조직을 만들어 서로의 번역을 검토하고 토론했습니다. 한 사람의 통찰이 아닌, 여러 전문가의 지혜를 모아 더 나은 해석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얼마 전 저는 흥미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ChatGPT가 작성한 영문 계약서를 검토하면서, 법률 용어는 정확했지만 우리 회사의 관행과 맞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메이지 시대의 번역가들처럼, 저는 AI의 출력을 우리의 맥락에 맞게 수정했습니다. AI는 훌륭한 초안을 제공했지만, 최종적인 조율은 인간의 몫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열린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유연성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번역가들이 서양 문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연구했듯이, 우리도 AI를 이해하고 활용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둘째, 지속적인 학습입니다. 그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흡수했듯이, 우리도 AI 기술의 발전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통합적 사고가 필요합니다. 기술과 인간성의 조화, AI의 능력과 인간의 직관을 결합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메이지 시대의 번역가들은 단순히 서양 문명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를 지켜가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독자적인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AI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활용해야 합니다.
메이지 시대의 번역가들이 일본의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듯이, 우리는 AI 시대의 번역가로서 기술과 인간성의 조화로운 공존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170년 전 '문명의 번역가'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변화의 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