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휴대폰의 패러다임 전환기에 대해
"핸드폰은 통화만 되면 돼!"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세상에 나타났을 때, 한국의 IT 전문가들이 내놓은 평가입니다. 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피처폰의 천국이었습니다. 접으면 '딸깍', 열면 '찰칵' 소리가 나는 폴더폰과 슬라이드폰은 패션 아이템이자 자존심이었습니다. DMB로 지하철에서 TV를 보고, 몇 만 화소 카메라로 셀카를 찍는 그 시절만 해도 한국의 모바일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자부했습니다.
"아이폰? 그거 일시적 유행이야!"
안랩의 전 대표가 2009년 즈음했던 이 발언은 지금도 IT계의 전설로 회자됩니다. 마치 1884년 미국 특허청장이 "이제 발명할 것은 다 발명되었다"라고 말한 것처럼요. 히트작 '안철수 바이러스 백신'의 계보를 이은 보안 업체의 수장이 한 말이라 더 묵직한 여운을 남겼고, 파장도 컸습니다.
저도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제 손에 들려있던 '베가레이서'를 자랑스럽게 꺼내던 순간들이요. "이거 듀얼코어야! 아이폰보다 빨라!" 라며 허세 부리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베가레이서의 뒷면은 레이싱카의 카본 패턴을 모방한 디자인으로, 마치 제가 F1 레이서가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물론 그 속도는... F1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앱 몇 개만 켜도 숨을 헐떡이는 수준이었으니까요.
고객이 원하는 건 "예쁜 휴대폰"이었습니다
SKY의 전성기를 기억하시나요? '아임백'이란 광고 카피와 함께 등장한 화이트 컬러의 IM-S100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당시 휴대폰 매장에선 "SKY랑 싸이언이요"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디자인만 보고 기종을 고르던 시절이었습니다.
2009년, 모토로라에서는 '아우라'라는 휴대폰을 출시했습니다. 원형 디스플레이에 스위스 시계 수준의 정교한 경첩을 자랑하던 이 폰의 가격은 무려 200만 원에 육박했습니다. 기능? 글쎄요, 그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와, 비싸 보인다!"는 감탄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난 아이폰 안 써. 왜냐하면..."
2009년 아이폰이 한국에 정식 출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변명을 했습니다.
"터치폰은 불편해, 키패드가 있어야지!"
"배터리 교체도 못한다며? 말도 안 돼!"
"앱? 그거 뭐 하는 건데?"
"그래, 예쁘긴 한데... 그래서 DMB는 어떻게 보는데?"
저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아이폰은 그냥 예쁜 장난감이야, 진짜 일 하려면 블랙베리지!" 라며 허세를 부리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블랙베리의 물리적 키보드로 이메일 타이핑하는 건 정말... 지옥 같았습니다.
팬택의 몰락, 하루아침에 사라진 꿈
한때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삼성, LG와 함께 빅 3을 형성했던 팬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2013년 '베가 시크릿 노트'라는 기대작을 출시했지만, 이미 흐름은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2014년 팬택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한때 자랑스러운 국산 휴대폰 브랜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팬택 사옥 앞에서 직원들이 박스를 들고 나오는 뉴스 영상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들 중에는 분명 "스마트폰은 일시적 유행일 뿐"이라고 믿었던 분들도 있었겠죠.
삼성의 빠른 적응, LG의 아쉬운 퇴장
삼성전자는 발 빠르게 갤럭시 시리즈로 대응했습니다. 초기에는 "아이폰을 따라 한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는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에서 애플과 양강 구도를 형성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반면 LG전자는 G시리즈, V시리즈 등으로 도전했지만 결국 2021년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했습니다. 롤러블 폰 같은 혁신적인 제품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시장의 변화는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이 이직 84라는 걸 알아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2009년 아이폰에 저항하던 모습과 2024년 ChatGPT에 당황하는 모습이 얼마나 닮았는지요.
"영어 메일은 사람이 써야지! 그래야 간지야!"
"계약서 검토는 전문가의 영역이야!" 하고 외치던, 아니 외치고 있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베가레이서를 자랑스럽게 들고 다니던(블랙베리폰을 간지로 사용했던) 제가 이제는 스마트폰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게 된 것처럼, ChatGPT를 거부하던 제가 최근에 ChatGPT의 혜택을 제대로 봤습니다. 수십 장의 영문 계약서 비교를 3초 만에 그것도 매우 정확하게 끝낼 수 있었습니다.
전화기가 스마트해진 것처럼, 우리도 스마트해져야 합니다
한국의 피처폰은 세계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최고의 피처폰'보다 '평범한 스마트폰'이 훨씬 더 가치 있는 시대가 왔습니다. 저의 베가레이서는 이제 서랍 속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지만, 아이폰과 갤럭시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역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처폰형 인재'라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면 팬택처럼 사라질 수 있습니다. 반면, 불완전하더라도 계속해서 자신을 업데이트하는 '스마트폰형 인재'는 삼성전자처럼 살아남을 것입니다.
한국의 피처폰이 스마트폰에게 자리를 내어준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일부 능력도 AI에게 자리를 내어줄지 모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팬택의 마지막 스마트폰처럼 사라지느냐, 아니면 갤럭시처럼 계속 진화하느냐...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