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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소프트 前 CEO의 눈물

변화에 저항하는 우리의 심리학

by 바그다드Cafe

"아이폰? 키보드도 없는 휴대폰이 비즈니스에 어떤 도움이 되겠어?"


2007년 1월,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처음 발표했을 때 마이크로소프트의 CEO 스티브 발머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당시 그의 인터뷰 영상은 유튜브에서 지금까지도 회자됩니다. 제가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이 대목입니다.


"$500짜리 보조금 없는 휴대폰이라고? 가장 비싼 휴대폰인데 비즈니스 고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할 거야. 소비자들은 키보드가 있는 휴대폰을 원해!"


발머의 이 자신감 넘치는 조롱은 역사에서 가장 큰 사업적 오판 중 하나로 기록되었습니다. 그가 비웃었던 아이폰은 산업을 완전히 재편했고, 그가 이끌던 윈도우 모바일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세계 최고의 기술 기업 중 하나를 이끄는 총명한 리더가 이런 치명적인 오판을 했을까요? (더 중요한 질문은) 우리는 어떻게 하면 같은 실수를 피할 수 있을까요?


변화를 거부하는 세 가지 심리적 함정


1. 선택적 인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발머가 아이폰을 평가할 때, 그는 키보드가 없고 가격이 비싸다는 점만 보았습니다. 혁신적인 터치 인터페이스, 완전한 웹 브라우징 경험, 혁명적인 앱 생태계의 잠재력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존 성공 경험(PC 사업)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필터링했습니다.


이것은 '선택적 인지' 또는 '확증 편향'이라고 불리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존 믿음을 확인해 주는 정보만 받아들이고, 반대되는 증거는 무시하거나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선택적 인지는 우리 일상에서도 자주 발생합니다. 디지털 메모 앱의 편리함을 무시하는 직장인도 있습니다. 많은 젊은 직원들이 태블릿과 노트 앱으로 회의록을 작성하고 데이터를 관리할 때, 여전히 두꺼운 수첩과 만년필을 고집하는 직장인이 있습니다.


"디지털로 적으면 머릿속에 남지 않아. 손으로 직접 필기해야 기억에 오래 남고 정리도 내 방식대로 할 수 있어. 전자기기는 집중도 방해하고 눈도 아프게 해."


분명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선택적 인지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디지털 메모의 단점(눈의 피로, 배터리 걱정)만 보고, 검색 기능, 자동 백업, 멀티미디어 통합, 실시간 공유와 같은 장점은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손으로 필기하는 방식에 익숙하고 그 방식으로 성공해 왔기에, 새로운 가능성은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죠.


2. 매몰 비용의 오류: 과거에 투자한 것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발머가 아이폰을 거부한 또 다른 이유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 모바일에 이미 수년간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백만 달러의 개발비와 수천 시간의 노력을 투입한 제품을 갑자기 버리고 새로운 방향으로 선회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매몰 비용의 오류'입니다. 이미 투자한 시간, 돈, 노력 때문에 실패한 전략에 계속 매달리는 현상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10년 넘게 영어 계약서 검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했습니다. FIDIC이라는 국제 계약 양식을 몇 천 페이지나 공부했고, 영어 이메일 작성법 책은 두 권이나 달달 외웠습니다. 이제 AI가 이런 업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제 경력에 투자한 시간이 '낭비'였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리더들은 매몰 비용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넷플릭스의 리드 헤이스팅스가 DVD 렌탈에서 스트리밍으로 과감히 전환한 것처럼, 과거 투자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에 집중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3. 정체성 위협: "이것은 내가 아니야"


아마도 발머의 저항 뒤에 숨은 가장 깊은 이유는 정체성 위협이었을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PC 시대의 제왕이었고, 발머 자신도 PC 비즈니스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바일로의 전환은 단순한 전략 변경이 아니라, 회사와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정체성 위협은 변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 요인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는 능력, 역할, 지위를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난 문서 작성이 특기인 사람이야."


"난 영어 계약서 전문가야."


"난 매일 아침 출근해서 직접 사람들과 만나는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이야."


이런 자기 정의가 AI나 원격 근무 같은 변화로 인해 도전받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저항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사티아 나델라가 CEO로 취임한 후에야 이 정체성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나델라는 마이크로소프트를 'PC 회사'가 아닌 '클라우드 및 생산성 회사'로 재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이 정체성 재정립은 회사의 시가총액을 10배 이상 증가시키는 놀라운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발머의 눈물: 깨달음의 순간


2013년 9월, 스티브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 직원들 앞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습니다. "Forward, forward, forward!"를 외치며 눈물을 흘리던 그의 모습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그 눈물 속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놓쳤던 기회들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회사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발머는 그동안의 실수를 인정하는 용기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 "우리는 모바일에서 기회를 놓쳤다"라고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에 저항하다가도 결국 깨달음을 얻는 순간입니다.



변화 저항을 극복하는 네 가지 전략


발머와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극복하는 전략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왜 아닌지" 말고 "왜 그럴 수 있는지" 물어보기


변화나 새로운 기술을 만났을 때, 우리의 첫 반응은 종종 "왜 이것이 작동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입니다. 대신 "어떤 상황에서 이것이 작동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세요.


발머가 아이폰을 처음 봤을 때 "이것이 어떤 상황에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새로운 기술이나 변화를 만날 때마다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것의 단점만 보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기존 경험이 새로운 가능성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가?"


2. 정체성을 '하는 일'이 아닌 '이유'로 정의하기


마이크로소프트가 윈도우라는 제품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목적으로 자신을 재정의했을 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신을 "영어 이메일 작성자" 같은 구체적인 역할이 아니라 "효과적인 글로벌 소통 촉진자"와 같은 목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도구나 방법이 변해도 우리의 핵심 가치와 목적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


3. 작은 실험으로 시작하기


변화가 두려울 때는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작은 실험부터 시작하세요. 마이크로소프트도 클라우드로의 전환을 한 번에 하지 않았습니다. Azure의 작은 프로젝트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확장했습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방식을 시도할 때는 작은 시험부터 시작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중요도가 낮은 업무에 먼저 적용해 보고, 점차 범위를 넓혀가는 방식으로 접근하면 변화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줄이고 통제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수영을 배울 때 발부터 물에 담그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4. 새로운 내러티브 만들기


변화는 어떤 이야기를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위협이 될 수도,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AI가 내 일자리를 빼앗는다"라는 내러티브 대신 "AI는 내가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라는 내러티브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모바일에서 실패했다"는 서사에서 "클라우드의 선두주자"라는 새로운 서사로 전환했듯이, 우리도 자신의 이야기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발머의 눈물, 그리고 우리의 선택


스티브 발머의 눈물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깊은 깨달음의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수를 통해 배웠고, 그 교훈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통해 AI 시대의 변화 앞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발머처럼 처음에는 거부하고 나중에 눈물로 후회할 수도 있고, 아니면 처음부터 변화를 기회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도 있습니다.


선택적 인지, 매몰 비용의 오류, 정체성 위협은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심리적 장벽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장벽을 인식하고 극복하기 위한 전략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변화의 희생자가 아닌 변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불혹의 넘긴 직장인으로서, 저는 오늘도 발머의 눈물을 기억하며 새로운 변화에 눈을 뜨려 합니다. 왜냐하면 발머도 결국 깨달았듯이, 변화는 피할 수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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