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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합니다"의 시대가 지나간다

문과의 재발견: AI 시대의 인문학적 경쟁력

by 바그다드Cafe Apr 07. 2025

"문송합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유행한 이 자조적 표현은 문과생들의 취업난과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빗댄 신조어였습니다. 마치 "죄송합니다, 제가 문과라서요"라고 사회에 사과하는 듯한 이 슬픈 유행어를 저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특히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프로그래밍은커녕 엑셀 함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제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습니다. (SUM 함수는 할 줄 압니다만…)


지난 10년간 세상은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코딩을 가르치고, 대학에서는 컴퓨터 공학과 데이터 사이언스가 인기 학과로 떠올랐으며, 기업들은 '이과적' 사고방식을 가진 인재를 선호했습니다. 우리 문과생들의 미래는 그야말로 암울해 보였습니다. "셰익스피어 소네트를 분석할 줄 아는데 왜 취업이 안 되죠?"라고 물으면 "그거 먹는 건가요?"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암흑기였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ChatGPT의 등장과 함께 이 흐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AI가 데이터 처리와 분석을 자동화하는 시대에, 문과적 역량이 새롭게 조명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저희는 "문송합니다" 대신 "문안합니다(문과라서 안전합니다)"를 외칠 때가 온 겁니다!


AI시대, 기계가 인문학을 필요로 한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이 고도로 발전할수록 인문학의 가치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특히 생성형 AI의 등장은 이 현상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ChatGPT와 같은 AI 모델은 본질적으로 언어를 다루는 도구인데, 언어가 원래 누구 영역이었죠? 바로 저희 문과의 텃밭이었습니다! 이제 이과 친구들이 저희 텃밭에 들어와 놀고 있는 상황인 셈입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AI 시대의 새로운 핵심 기술로 떠올랐습니다. 이게 뭐냐고요? 쉽게 말해 AI에게 "이것 좀 해줘"라고 하는 대신 "친애하는 AI님, 부디 귀하의 지혜로 다음과 같은 작업을 수행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기술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역량은 정확한 문장 구성력,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는 표현력, 맥락을 고려한 커뮤니케이션 능력... 모두 국어시간에 졸지 않은 문과생들이 갖춘 역량들입니다.


또한 AI는 이제 인문학자의 새로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안녕, ChatGPT! 오늘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명제와 현대 기술 윤리의 관계에 대해 토론해 볼까?" 이런 대화가 가능한 시대가 왔습니다. 


문과의 숨겨진 강점


문과의 또 다른 강점은 '애매함'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능력입니다. 이과가 "2+2=4"처럼 정답이 확실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능하다면, 문과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처럼 정답이 없지만 끝없이 고민할 가치가 있는 문제를 탐색하는 데 강점이 있습니다. 우리 문과는 "글쎄요,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요..."라는 말을 들으면 설레는 사람들입니다.


AI는 기존 데이터를 기반으로 패턴을 인식하고 예측하는 데 뛰어나지만, 전례 없는 상황이나 가치 판단이 필요한 문제에서는 한계를 보입니다. "이 AI 기술이 사회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건 AI가 아니라 인간, 그것도 철학적 사고에 익숙한 문과적 인간입니다.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다루는 문과적 역량은 AI 시대에 여러 가지 구체적인 가치를 창출합니다. 복잡한 의사결정 상황에서 윤리적 딜레마가 있을 때, 문학과 철학을 통해 훈련된 문과적 사고는 다양한 관점을 종합하고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됩니다. "AI가 작성한 성적표를 그대로 학생에게 보여줘도 될까?"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건 코드가 아니라 윤리적 사고입니다.


문과적 역량을 개발하기 위한 방법


이러한 문과적 역량을 실질적으로 개발하고 활용하기 위한 방법들이 있습니다. AI 시대에 오히려 더 중요해진 것은 '깊이 읽기'(deep reading)의 능력입니다. 요즘 SNS에서 5초 만에 스크롤하며 지나가는 그런 읽기가 아니라, 한 문장을 읽고 "흠...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며 30분 동안 생각에 잠기는 그런 읽기 말입니다. 이런 깊은 독서 습관은 AI가 아직 모방하기 어려운 통찰력을 키워줍니다. AI는 책 한 권을 1초 만에 읽지만, 그 내용에 대해 한 시간 동안 멍 때리며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할 줄은 모릅니다.


또한 문과의 강점은 다양한 분야를 연결하는 능력에 있기에, 의도적으로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을 연결하는 학제 간 탐험을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양자역학 이론이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과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같은 엉뚱한 질문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일상 업무에 철학적 질문을 접목하는 습관도 유용합니다. "오늘 내가 한 일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이 의사결정의 윤리적 함의는 무엇인가?", "다른 관점에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은 뜻하지 않게 해결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문과와 이과의 무의미한 구분


사실 문과와 이과의 구분은 점점 무의미해지고 있습니다. 미래의 인재는 이런 이분법적 경계를 넘나드는 통합적 사고를 갖춘 사람일 것입니다. 다빈치처럼 예술과 과학을 넘나들거나, 아인슈타인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물리학 이론을 구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따르면, 향후 10년간 가장 수요가 증가할 역량으로 '비판적 사고', '창의적 문제 해결', '감성 지능', '윤리적 판단' 등이 꼽혔는데, 이는 모두 인문학이 전통적으로 중시해 온 역량들입니다. 이제 "저는 문과입니다"라고 말하면 "오, 미래형 인재시군요!"라는 반응이 돌아올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흥미롭게도, AI의 발전은 모든 일에 인문학적 관점이 필요한 시대를 만들고 있습니다. AI가 데이터 처리와 패턴 인식을 담당한다면, 인간은 의미 창출과 가치 판단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두가 문과인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마치 산업혁명 시대에 "모두가 기계공학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던 것처럼, 이제는 "모두가 조금씩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문과의 정체성을 가진 직장인으로서, 그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가치를 발견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문송합니다"가 아닌 "문과, 감사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AI의 시대,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해 온 문과의 시간이 다시 찾아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말하지 않아요. 사람이 숫자를 통해 이야기하는 거죠."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문과의 지혜가, AI 시대에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기계는 정보를 처리하지만, 그 정보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문과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핵심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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