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대화를 몇 번 주고 받으면, 친구는 짜증이 나서 내게 뭐 먹고 싶은지 직접 말하라고 한다.
그럼 내 대답은 “결국 짜장면 먹자”가 된다.
상대에게 미안하지만, 종종 내게 있는 일이다. 사소한 메뉴 결정에도 이렇게 애매하게 군다.
딱 좋아하는 걸 말하고 싶지만, 정말이지 딱 떠오르지도 않는다. 그저 “아무거나”가 가장 속 편한 대답이 된다.
나를 가장 잘 표현하는 형용사가 있다면 그건 ‘애매하다’일 것이다. 특출난 것도, 특별히 부족한 것도 없는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스스로 여겼다. 평균을 좋아하는 대한민국에서 그 중간에 살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라 생각이라 생각하지만, 어쩐지 나는 이런 나를 뜯어고치고 싶었다. 애매한 나를 고쳐야 하는 존재로서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매한 나를 뜯어고치고 싶어하는 이유가 모든 면에서 나아지고 싶다는 단순한 향상심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 이유는 좋아하는 것이 딱히 없는 것에서 오는 애매함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좋아하면 잘하게 된다"는 말처럼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에 유독 집착한다. 좋아하는 것을 알고, 그 일을 하면 행복해 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압박감을 준다.
사실 좋아하는 게 딱히 없을 수 도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좋아하는 것이 없는 이 상태를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속에는 삶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매력 없는,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애써 내 성향에 맞지 않는 것도 해보고, 좋아하는 척도 해보고, 괜히 튀는 옷도 입어보고 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할 수록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처럼 느꼈다. 오히려 싫어하는 것들이 더 뚜렷해지곤 했다. 마치 모래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고 손을 넣고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 헤집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것을 찾아 디깅하는 망토리
이 불안함은 나를 스타트업 업계로 이끌었다. 불안함이 더 불안할 수 있는 스타트업 업계로 끌어들인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불안함을 불안함으로 잊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디어만 가진 미국인과의 한국에서 첫 스타트업을 시작했다. 법인 설립부터 투자 유치까지, 그 과정에서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니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나름의 우여곡절과 산전수전을 겪으면서 좋아하는 일을 발견했으면 좋았겠지만 여전히 나는 무엇을 하면 살아갈지 잘 몰랐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 아빠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진짜 행복한 인생이야”
아빠의 인생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꾸역 꾸역 숙제처럼 살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도 많기에 내 고민은 오히려 사치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고민을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에 아빠의 말을 바탕으로 이제 싫어하는 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싫어하는 것을 찾는 것이 좋아하는 것이 만 배는 더 쉬웠기 때문이다. 나는 ‘호불호’가 강한 성격이 아니라 ‘불’이 강한 성격이기에 이 일 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일과 상관 없이 그냥 싫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 적어봤다.
예를 들어
- 나는 반복적인 일이 싫다.
- 나는 정리되지 않는 것이 싫다.
- 나는 사람 많은 곳이 싫다.
- 나는 묻지도 않는데 자기 이야기 늘어 놓는 사람이 싫다.
등등 끝도 없이 나왔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에게 어떤 것이 싫다고 말했는지만 써도 한 페이지는 거뜬한 분량이었다. 원래 부정적인 것이 뇌에 더 자극적이어서 그런지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될까 싶었지만 나를 더 깊이 알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나는 왜 이걸 싫어할까?
그럼 그 반대인 것은 좋아할까?
이 두 가지 질문을 싫어하는 목록 하나하나에 대입해 생각해 보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명확했다. 나는 꽤 뚜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애매한 것들은 직접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하게 좋아하는 것을 찾으려고 하던 것에서, 더 구체적인 행동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들이 이제 더 이상 숙제처럼 느껴지지 않고,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이제 망망대해에서 좋아하는 것을 막연히 찾지 않아도 되었다. 싫어하는 것들이 만들어 준 기준들을 가지고 움직이니 가야 할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애매하다고 여겼던 나의 회색 지대는, 오히려 싫어하는 것들을 마주하면서 줄어들기도 하고, 다른 색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는 나만의 고유성과 매력을 만들주고 있음을 알게 됐다.
어쩌면 애매함은 나의 삶을 더 흥미롭게 만들 수 있는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매함을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나의 영역으로 받아들이자 더 이상 이 애매함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여전히 내겐 애매한 구석이 많다. 하지만 이제 그건 내가 아직 발견할 것이 많다는 의미일 뿐이다. 애매한 나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내가, 이제는 그 애매함을 더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