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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미련의 기본 값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세번째 온 전화라 안 받을 수가 없었어. 언제까지 숨길 수도 없는 일이고."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말했다. 뭔가 잘못했을 때,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나오는 그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었다. 눈만 못 마주치는 게 아니라 고개까지 옆으로 돌리고 어딘가 저 먼곳을 바라보며 말한다.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어느 정도는 둘러댈줄도 알고 때에 따라서는 거짓말도 능숙하게 할 줄 알아야지.


"잘했어. 숨길 일도 아니지. 사귀다 헤어지는 사이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거짓말을 못하는 타입이기도 하지만 자주 하는 타입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그의 옆 얼굴을 보는 셈이었다. 여전히 잘 생기고, 여전히 자신감 있어 보였다.


"너 어디 사는지는 말씀 드리지 않았어. 네가 싫어할 거 같아서."


이윽고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잘했어."


이번엔 내가 고개를 떨궜다. 그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사한 집은 어때? 괜찮아? 보증금은 어떻게 마련했어? 일하는 건 어때? 윤하선배한테 들었어. 선배가 소개해줬다며. 괜찮아?"


그간 밀린 질문을 모두 다 들어야겠다는 듯 그는 우다다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우리가 반년전 헤어진 사이가 아니라 아주 오랜만에 만난 연인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차 놓고 뭐가 그렇게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건지, 혹은 자기가 찼기 때문에 죄책감이 들어 그러는 건지 나는 그의 질문 세례가 살짝 설레기도 하고 살짝 짜증스럽기도 했다.


"이사한 집은 좁고, 작아. 아직은 혼자서 지내는 게 무섭기도 하고. 밤에 불을 켜고 자는 날 반, 끄고 자는 날 반, 그래. 보증금은 어릴때부터 엄마 몰래 조금씩 모아놓았던 거랑, 집 나오기 전에 급하게 대필 아르바이트 한 거랑, 윤하선배도 조금 빌려줘서 그것도 보태고, 그랬어.

별로 비싸지 않은 집이라 들어갈 수 있었어. 월세도 다른 곳들과 비교하면 싼 편이고.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해. 집에 있으면서 엄마한테 시달리고 동생들한테 볶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집에 가는 게 편안해졌어.

.......이제 쉬려고 밖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는 게 좋아."


그는 마지막 내 한 마디에 참고 있던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었다.


걱정했나?


"일하는 건 어떤 날은 재미있고, 어떤 날은 짜증나.

항상 골방에 틀어박혀서 상상으로 써내던 다른 사람의 인생을 상상 없이 실제로 듣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야. 내가 그렇게도 쓰려고 했던 살아있는 소재들이 스스로 찾아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니까. 물론 아주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그 짧은 이야기 안에 화자의 희노애락이 담겨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 걸음 뒤에서 그냥 관찰만 해야 하는 건 좀 짜증나더라. 소설과는 다르게 이건 진짜잖아.

아, 잘 읽었다. 재미있었다. 하고 덮으면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 될 그 사람의 인생. 내 인생도 골치 아픈데 타인의 인생까지 조금씩 들춰보는 게 어떨 땐 참 피로하기도 하더라고"


"......그럼 다시 글을 써보는 건 어때? 지금 하는 일은 소재를 얻기 위한 인터뷰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이번엔 내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어쩜 이렇게 변하지 않았을까.


하긴, 6개월이라는 시간이 헤어진 연인이 다시 만나기엔 긴 시간일지라도 한 인간이 바뀌기엔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지.






그는 잘생기고, 자신감 있고, 건전한 야망이 가득한 남자였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그는 처음부터 그런 남자였다. 언제나 밝고, 반짝이고, 곧은.

주변에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하고 그들 역시 대체로 밝고, 반짝이고 곧은 사람들이었다. 나만 빼고.

나는 그가 그와 같이 올바르게 자라고 올바른 욕망으로 삶을 채워가는 여자들이 아니라 어두운 구덩이 같은 나에게 빠졌던 건 금기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양지에 터를 잡고 살아가던 그는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어린아이처럼 나의 어두운 삶이 자꾸만 궁금했을 것이다. 자꾸 보고싶고, 자꾸 알고 싶고, 자꾸 나의 불행을 열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호기심어린 감정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에 스물 세살은 충분한 나이였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과 함께 자신이 속해 있던 동아리로 돌아온 그와, 졸업을 일년 남기고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로망을 남기고 싶어 뒤늦게 들어간 동아리에서 내가 만난 건  아주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타이밍이었다.

끝 없는 아르바이트로 학자금대출을 갚아야 했던 내가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그가 군대를 다녀와 주변의 모든 것에 관심과 흥미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조차 없는 각자의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이제 갓 스물이 된 파릇파릇한 일학년생들 사이에서 축축하게 절어있던 나는 신입생들과도, 원래의 동아리 선배들과도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자격지심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중고생이 아닌 성인들이었기에 나를 따돌리거나 모른척 하려하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려했고, 술자리가 있으면 끼워주려고 했고, 단체로 소개팅이 생기면 나의 의사를 묻기도 했다. 그냥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건 모두 다 내 문제였다.

저 아이들은 집에 가면 어서 오라고 반겨주는 부모님이 있겠지.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할 수도 있지만 분에 넘치는 여대생 놀이는 때려치우고 나가서 빨리 돈이나 벌라는 엄마가 있는 건 아니겠지. 아버지가 다 다른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 딸려 있진 않겠지. 그래도 다들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줄은 알겠지. 그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평온한 인생을 시기하거나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행복한 기운에 눌려 내 자신이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이 싫었던 것 뿐이다.

그렇게 어울릴 수 없었던 로망의 한 학기가 끝나고 동아리 전체 종강 파티가 있던 날, 나는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의 '대학 로망 놀이'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로망도 실현했고, 나는 그 안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고, 무엇보다 더 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수업을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 학비와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어야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나 하던 과외 있는데, 네가 받아서 할래?"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있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내 술잔을 채워주며, 그가 말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만을 향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이름과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왜?"


나는 소주잔에 입을 대는 둥 마는 둥 하고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나 다음 학기부터는 알바할 시간이 안될 것 같아서. 군대가기 전에 빵꾸낸 학점들 얼른 채워야지. 토익도 다시 해야하고. 근데 조건이 좋아서 그냥 놓기 아까워서 친한 사람한테 소개해 주려고."


친한 사람.


나는 가슴이 두근했다. 우리가 친한 사이였던가?


"너 알바 많이 하지?"


"......응."


"더 할 시간 있어?"


"......낼 수 있어."


"우리 아빠 친구 아들이라 그냥 그만 두는 것보다 후임을 내가 정해주고 나오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고3이라 계속 해야하긴 하거든. 애가 똑똑하긴 한데, 글을 잘 못써. 아, 하려는 건 논술이야. 언어도 같이 봐주면 좋고. 그러면 추가 금액도 청구할 수 있어. 시험 기간에만 좀 더 봐주는 수준이니까 부담 없을 거야. 괜찮아?"


"응. 괜찮을 것 같아. 근데 왜 나야?"


그가 의아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너 글 잘 쓴다며. 애들이 그러던데?"


"아......"


그런 소문이 났나? 나도 몰래 그런 얘기가 돌고 있는지도 몰랐다. 글을 쓰는 동아리라 학기에 한번씩 주제를 정해서 글을 쓰고 문예지 같은 것을 발행하는데 동아리 활동을 시작한 첫 학기였기 때문에 몇번씩이나 기고를 한 선배들과는 다르게 나는 이제야 막 첫번째 글-이자 마지막이될-을 썼던 차였다.

아직 인쇄에 들어가기 전이라 가까운 동기들끼리만 돌려보았고, 누가 보고 기억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답이었다.


"소설썼다며?"


"응."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나온 거야. 소설을 쓰려면 아무리 단편이라도 자주 써본 사람이 아니면 어려우니까 대부분은 에세이를 쓰거든. 요즘은 그나마도 뭐 거의 다 여행기고."


"......."


"괜찮으면 네 연락처 넘겨줄게."


"그래."


"전화번호 알려줄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나는 그의 전화기에 나의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초 후 내 전화가 부르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음처럼.

그에게 전화기를 돌려주자 그는 싱긋 웃으며 '고마워.'라고 말했다. 언제나 그가 곁에 오면 보송보송한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미소에도 향기가 묻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처음으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는데, 나에겐 그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아니, 길다기 보다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서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었고, 그 순간 우리를 제외한 모든 세상이 다 슬로우모션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사물과 사람 모두 형태가 흐릿하게 뭉개지며 흘러가듯 우리 곁을 지나치고, 그들이 내는 소리마저도 천천히 뭉개져 우우우우웅-하는 백색소음처럼 사라져갔다.

그렇게 들여다 본 그의 얼굴은 슬쩍 슬쩍 지나치며 보던 것보다 훨씬 잘생겼고, 훨씬 밝았다. 왠지 모르게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끈하지만 늘 짓는 눈 웃음의 궤적을 따라 아주 살짝 눈가의 주름이 가늘게 패인 그의 얼굴. 이대로 나이가 들면 그의 얼굴은 더욱 밝고 인자해 보일 것이다. 넉넉해 보이는 품성이 그대로 얼굴에 묻어나게 된다면.

갑자기 그에게 내 얼굴은 어떻게 보일까 궁금했다.

어딘가 늘 쫒기듯 전전긍긍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최대한 표정을 지운 내 얼굴이, 잘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무미건조한 내 얼굴이 그에게는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윤주! 빨리와. 뭐해?"


얼굴이 발그레하게 달궈진 그의 밝은 친구 한명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동시에 팍! 하고 전구가 켜지듯 천천히 흐르던 모든 것들이 본래의 속도를 찾아 흐르기 시작했다. 가, 가. 하고 대충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내 어깨를 꾹 짚으며 말했다.


"연락할게. 받아!"






13년이나 지난 그의 얼굴에는 내 예상대로의 주름이 예쁘게 자리를 잡았다. 다만 그때엔 보이지 않던 미간의 주름이 미세하게 함께 드러나기 시작했다.

내가 한심한 대답을 할 때면, 내가 그의 기대에 못미친 비겁한 이야기를 할 때면 짓던 찡그림을 그리면 아마 딱 저 자리의 주름에 맞아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저 고뇌의 주름은 내가 만들어 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와 반대로 나는 아직도 이렇다할 주름이 없다. 나를 보고 동안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안다. 나는 그저 내 얼굴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스물몇살 때의 나처럼, 아직도 불안하고, 허무하고, 쫒기는 듯한 이 마음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런 나의 표정을 안다. 짓지 않아도 들여다 보이는 듯했다.


"집도 나왔으니까 더 집중할 수 있잖아."


그의 미간이 조금 꿈틀, 했다.


"그만 둔건 그런 문제 때문이 아니었어. 알잖아."


나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도 그건 문제였었어. 이제 좀 더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해 보면 다를 수 있잖아."


"나는 지금 편해.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겠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편안해. 이런 기분으로 사는 거 처음이야."


"그러니까......."


"엄마도, 애들도, 내 부족한 재능도, 아무도 날 닥달하지 않아서 그게 참 좋아."


나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나도?"


그의 미간이 조금 더 깊어졌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금 대답을 하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미련한 건지, 미련이 남은 건지 확실하진 않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연락한 건 아냐."


"......"


"어머니한테 연락이 왔었다는 얘기를 전해주고,"


그의 손가락이 어색하게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밥. 같이 밥 먹고 싶어서."


"......"


"나도 집 나왔어. 혼자 살고 싶어서."


"......"


"서른 넘으면 혼자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더라구. 그래서 나왔는데, 편해. 나도."


그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정말 편안해 보였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겠지만 그 역시 여러가지 것들과 사람들에게 시달림이 있었을 걸 안다. 오래 사귄 애인이 있고, 나이가 적당히 찼을 때 들어오는 결혼에 대한 압박, 그리고 그 애인이 나같은 애 였을 경우 부모님의 실망, 그들 간의 갈등. 흔하고 흔한 갈등이지만 이런 지겨운 서사는 절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다.

이제는 헤어진 연인으로서 나는 그의 고백에 어디까지 아는척을 하고 어디까지 공감을 해야할지 선을 찾는 것이 어려웠다.


"다 좋은데, 밥 먹는 게 그렇더라. 혼자 먹으면 뭔가 허전하고, 그렇다고 매번 누군가와 약속을 잡는 것도 피곤하고. 그래서 다들 결혼을 하나 봐."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나는 코웃음을 쳤다.


"아니. 기본 삶의 상태를 유지할 누군가가 필요해서.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언제나 기본값으로 함께 해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기본 값이 '혼자'인 건 너무 서글프잖아."


그의 목소리는 외로웠다.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를 서글프게 만든 건 바로 너 잖아. 스스로 서글퍼진 것도 너고.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오늘은 뭔데? 갑자기 밥 먹을 사람이 없어서 서글퍼졌어?"


"별 다른 생각은 안했어. 그냥 생각이 났어. 오랫동안 네가 내 기본 상태였으니까."


"한참 생각이 안나다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


나는 그에게 따지듯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왠지 따지듯한 질문만을 던지고 있었다.


그냥 입 닥치고 밥이나 먹어. 이상한 소리를 해서 또 그를 질리게 하지 말고.


"......한참 생각을 안하려고 노력했어. 오늘은 그 노력을 게을리 했고."


"......"


나는 그 말이 변명인지 핑계인지 모르겠지만 로맨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로맨틱하다. 올 곧고, 타인의 어두움을 100% 이해하지는 못해도, 그래서 상처를 준다해도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나름대로 담백하다고도 생각했다.

나라면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나라면, 내가 그였다면 아무렇지 않게 밥먹자고 연락을 하지도 못했을테고.






그는 내게 데려다주겠다고 했고, 나는 거절하지 못했다. 헤어진 애인에게 나의 새로운 집 주소를 알려주며, 그의 차 네비게이션에 그 주소를 입력하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지금 더 냉정히, 냉철히 잘라야 하는 걸까? 저 앞 버스정류장에 내려달라고 했어야 하는 걸까? 그는 이 주소를 저장할까? 오늘은 우리가 찜찜하게 끝낸 마지막날의 질질 끌던 마무리일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앉아 있었고 우리 사이는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와 음악이 채워졌다. 그는 언제나 차에 타면 라디오를 틀었다. 주파수는 언제나 고정이었다. 선호하지 않는 프로그램이, 혹은 디제이가 나와도 '싫은데.'라고 낮게 읊조리기만 할 뿐, 다른 주파수로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와 헤어진 뒤 나는 라디오를 들을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듣게 된 라디오는 변함이 없었다. 그 시간대면 나오던 그 디제이가 비슷 비슷한 사연들을 소개하고, 요즘 많이 들리는 유행가를 틀어주었다.


"여기야?"


차를 돌리기도 어려울 것같이 좁은 골목길에 다다라 그가 말했다.


"응."


나는 가방을 챙기며 대답했다.


"데려다 줘서 고마워. 밥 먹자고 한 것도 고마워. 오늘 저녁은 햄버거로 때우려고 했어. 잘 가."


나는 집까지 오는 동안 머릿속에서 달달 외웠던 대사를 주르륵 쏟아내고는 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고 나왔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렇지 않아


그는 엉덩이에 스프링이라도 달린 듯, 펄쩍 뛰어 오르며 나를 따라 내렸다.


"몇층이야?"


"1층."


"위험하진 않아?"


"모르겠어. 잠금장치가 좀 불안하긴 한데, 밤에 조용한 동네야."


"불 켜지는 거 보고 갈게."


"......"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별 말 하지 않고 돌아섰다. 달달한 고백이나 대사는 아니었지만 우리가 사귀는 동안 언제나 헤어질때 나누던 그 기본값의 대화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매너 있는 남자였다. 꼭 내가 아니더라도 친한 여자들에게 그 정도의 매너는 보여줄 것이었다. 우리는 헤어졌지만 여전히 같은 대학, 같은 동아리라는 울타리를 가진 친구 사이이기도 했으니까. 나는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으려 계속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냥 연락 한거야. 다른 기대나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한 거야."


등 뒤로 급하게 그가 소리쳤다.

나는 발걸음이 멈칫하면서 섰는데 도무지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지금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망설이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밭끝을 내려다보는 그의 해사한 옆 얼굴이 가로등에 비춰보였다. 나도 몰래 웃음이 슥 나왔다.


"잘 가."


내가 인사를 하자 그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잘 자."


미련의 미련일지도 모르겠지만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그를 믿고 싶어졌다.





Six of Cups (여섯개의 컵): 과거에 대한 미련. 과거와 현재를 끊임없이 비교하며 현재에 만족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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