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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하는 척 하지만 하지 않음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결국, 잠을 설쳤다.

나의 잠을 설치게 한 그 감정이 매우 순수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대학 때부터 무려 13년이나 '연인'의 이름으로 살아오던 남자와 언제나 그렇게 좋고, 행복하진 않았다. 당연하지만 권태기도 있었고, 권태기보다도 힘들었던 자격지심의 기간도 길었다.

그와 나는 여러모로 연인으로서 조화를 이룬다기 보다 조건들이 티 나게 차이나던 부조화한 커플이었고,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 특히나 가까운 사람들의 입에 술안주처럼 오르내렸다. 그들에게 악의가 있어서, 내가 너무 꼴보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사람들은 별 생각없이 타인의 약점들을 수다의 주제로 삼곤 한다. 우리는 그 주제로 참 좋은 '꺼리'였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것에 익숙해져서 처음처럼 사람들의 수근거림이나 평가에 신경을 쓴다거나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게 되었지만 1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이 다 순도 높은 행복으로 가득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지난 밤, 내가 쉽게 잠들지 못했던 건 아직 미련을 다 떨쳐내지 못한 오래 된 연인과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나 참고 있었던 그리움의 폭발 같은 고차원적인 것은 아니었다. 하루가 지나고 다시 떠올려보니 그건 그냥 설렘이었다. 아, 그가 아직 나를 잊지 못하고 있구나. 냉정히 돌아선 줄 알았더니 내 생각에 괴로운 날들도 있었구나 하는 낯선 감정에 대한 설렘.

뒤척이던 밤을 지새고 잠깐 잠이 들었다가 금새 깨어난 새벽, 주황빛으로 시작해 점점 하얗게 밝아지는 아침 해를 멍하니 바라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냥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자극에 대한 설렘이구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구나. 그리고 어쩌면 그도 그럴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뒷머리 한쪽이 차갑게 식으면서 뿌옇게 나를 감돌던 잠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거 나도 한번 봐줄 수 있소?"


초로의 남자 손님은 앞선 손님과 나의 상담을 옆 테이블에 앉아 지긋이 지켜보다가 그 상담이 끝나고 그 손님이 자리를 뜨자 넌즈시 내게 말을 건냈다.


"타로카드요? 물론 돼죠."


나는 눈 빛으로 그에게 내 맞은편으로 와 앉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 자리에 앉아 팔짱을 끼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냥 여기서. 나는 여기 앉아서 할게요. 한번 해 보쇼."


나긋나긋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꽤 무례한 태도였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하는 것에 호기심이 생겨서 구경이나 한번 해보고싶다는 뜻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나는 카드덱을 테이블 위에 탁 내려 놓았다.


"여기 앉으셔야 카드도 섞고, 뽑죠."


뾰로퉁한 내 목소리가 들렸는지 주인 언니가 카운터 뒤에서 고개를 들어 슬쩍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그녀의 머리가 다시 카운터 넘어로 슥 사라졌다.


"여기서 하면 안되나? 허허."


그는 쑥스러운듯 웃으며 내 맞은편 자리로 옮겨 왔다. 옮겨오기는 했지만 꽤 요상한 자세였다. 분명 의자에 엉덩이를 걸쳐놓긴 했지만 떨어질 듯 말듯, 슬쩍만 걸치고 앉아서 몸통은 원래 자신이 앉아있었던 테이블 쪽으로, 바깥쪽으로 틀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여차하면 도망가기 좋은 자세랄까? 그리고 팔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아주 얌전히 빗어서 포마드 같은 것을 발라 붙인 회백색의 머리칼, 베이지색의 점퍼, 얼룩 하나 없이 깔끔하게 다림질한 연회색의 바지, 그리고 한 눈에 보기에도 말랑 말랑 편안해 보이는 흰 운동화까지. 인자한 눈 웃음이 기본 장착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갑자기 다가가 길을 물어도 뒷걸음질 치지 않고 친절히 안내를 해줄 만한 그런 노인이었지만 그는 온 몸으로 '나는 이런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호기심이야.'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온화해 보이지만 고집이 꽤 센 사람이랄까?


"궁금한 게 있으세요?"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여전히 허허, 웃으며,


"아니, 그냥. 이런 건 한번도 안 봐봐서."


라고 쑥쓰러운 듯 대답했다.


"타로카드는 신점이나 사주와는 좀 달라요. 선택을 해야한다거나, 답을 모르겠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질문하고, 질문하신 분이 직접 카드를 뽑고, 저는 그것에 대한 상징을 해석해 드리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질문이 없으시면 진행 하기가 어려워요."


노인은 눈을 슬며시 감고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는 건지, 흘려듣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더 설명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냥 봐줄 수는 없나?"


그가 다시 눈을 뜨고 눈 웃음을 장착한 채 나에게 부드럽게 물었다. 역시 고집이 세군.


"네. 저는 무당이나 점쟁이가 아니에요. 질문자분의 얼굴만 봐도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 맞힐 수 없어요. 생년월일만으로 평생의 운세를 풀어드릴 수도 없고요. 타로카드는 필연적으로 궁금한 것이 있어야 해요. 내가 답을 내지 못한 것에 대해 나를 대신해서 타로카드가 답변을 하는 거죠. 질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는 다시 눈을 지긋이 감고 내 얘기를 들었다. 대체 왜 노인들은 자꾸 눈을 감고 얘기를 듣는 걸까? 나는 약간 기분이 상하려고 했다. 마치 소 귀에 경을 읽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지는 않더라도 한번씩은 바라봐 주는 것이 예의 아닌가?


"그,"


노인이 눈을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러면, 그, 그걸로 한번 해보지."


나는 카드를 섞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지금 뭘 배우고 있는데 그걸 계속 해야할지 말지, 그걸 좀 물어보지?"


"지금 뭘 배우고 계신데요?"


"아니 그 좀, 뭘 배우는 게 있거든."


"말하기 곤란하신 거에요?"


"아니, 그렇진 않고. 그, 그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공부했어요. 얼마전까지."


"네."


"그리고서 얼마전에 실습한다고 요양 시설에서 잠깐 일을 했었는데, 그걸 계속 해야할지 모르겠네."


"계속 할지 말지 고민스럽게 하는 부분이 있으세요?"


"그걸 좀 물어보고 싶다니까!"


어허! 하면서 인자한 노인은 자신의 기본 값을 살짝 넘는 정도의 불쾌감을 표현했다. 고집은 꽤 세지만 타인에게 드러나게 화나 짜증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높이는 건 자신의 인내심이 거의 끝지점에 다다랐다는 뜻이다. 그는 타로카드 상담에 대해 내가 설명한 것을 100% 이해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그냥 가볍게 심심풀이로 신문에 나온 오늘의 운세 정도의 오락거리를 원했는데 내가 자꾸 질문을 하자 짜증이 난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그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며 대충 섞은 카드를 그에게 넘겨줬다.


"섞고 싶은 만큼, 섞고 싶은 방법으로 섞어서 저에게 다시 주세요."


그는 여전히 몸톰은 바깥쪽으로 돌린 채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 위태로운 자세로 포커 카드를 섞듯 타로 카드를 섞었다.


"아니, 내가 이런 걸 진지하게 믿는 게 아니고, 그냥 한번, 궁금해서 보는 거야."


노인은 카드를 천천히 섞으며 묻지 않은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요 앞에 교회를 다녀요."


아, 그래. 교회를 다니는 신도가 이런 것에 대해 가벼운 '흥미'가 아닌 과도한 관심이 있다는 건 말이 안되니까, 그래서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 척, 별로 관심이 없는 척 하는 거였구나.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나 역시 당신이 교회를 다니든, 절간을 다니든 관심이 없답니다. 나는 그저 타로카드 질문 자판기 같은 거라구요.


"이건 생각하시는 그런 '점'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기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뽑아보는 거죠. 답으로 고른 카드 역시 질문을 던진 내가 뽑은 것이니 답도 내 안에 있는 것이거든요."


"아, 글쎄. 그렇다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노인은 흠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나는 별 대답을 하지 않고 카드를 펼쳤다.


"질문을 생각하시면서 카드를 뽑아주세요."


카드를 다 뽑고 순서대로 펼치는 동안도 그는 눈을 감은 채였다. 카드를 뽑느라 잠시 풀었던 팔짱은 다시 빗장처럼 가슴팍에 그대로 올려져있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저는 점쟁이가 아니에요. 카드에 써 있는 것을 해석해서 읽어드릴 뿐이죠. 그러니까 말씀 해주신 정보만을 바탕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어요. 배경 내용을 다 말씀 해 주신 게 아니니 일단 듣은 것을 토대로 설명해 드릴게요. 맞지 않거나, 그 얘기가 아닌 것 같다 싶으신 건 말씀 하지 않은 내용에 상징의 해석을 적용해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음."


노인이 눈을 감고 낮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 시험을 준비하시면서 많은 준비를 하셨던 것 같아요. 당연히 공부도 많이 하셨겠고, 기대나 각오도 많이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습을 나갔다 오신 뒤에 고민이 생기신 것으로 보아 생각보다 실습이 어렵진 않았나.....싶어요."


"......"


"요양보호사라면 당연히 몸도 많이 써야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일도 많을 테고요, 물론 그런 걸 모르고 시작하신 건 아니었지만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힘드셨을 거에요."


"......음."


"그래서 처음에 생각한 것과 비교해서 지금은 이걸 꼭 하고싶다, 그런 마음이 좀 많이 수그러든 상태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실습 잠깐 해보고 공부하고 노력한 것들을 다 포기하는 게 맞나, 그런 고민도 생기고요."


"그렇지."


그가 맞장구를 치며 조금 더 크게 끄덕였다.


"제 생각에는 계속 해보셔도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바쁘게 움직이고 또 시도하지만, 실제로는, 사실은 열심히 하는 게 아닐 수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고?"


"그냥, 겉으로만 열심히 하는 척 하실 수 있다고요. 남들이 보기엔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은 아는 거죠. 진심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나는 마지막 카드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어느새 그는 눈을 뜨고 자신이 뽑은 카드를 하나 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


"이 카드가 나오면 그렇게 설명을 해요. 열심히 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마음이 거기에 없다고. 여기 보세요. 카드에 있는 여자가 밭에 씨를 뿌리고 있지만 옆에 있는 닭과 병아리들이 다 주워먹고 있죠? 하지만 여자는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라 슬며시 미소짓고 있고요.

스스로도 아는 거에요.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


"하기 싫으시면 그만 두셔도 돼요. 그렇게 억지로 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어르신에게도, 어르신에게 도움을 받는 분들에게도."


노인은 이제 몸통을 돌려 나를 마주보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였다. 기본 장착된 인자한 눈 웃음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맞아요. 참 어렵더라고. 환자들을 번쩍 번쩍 들어서 옮겨야 하고, 시간 마다 닦아주고, 그런 것이. 내가 나이가 그리 적지 않은데......"


"......"


"근데 또 봉사를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고것 잠깐 해보고 힘들다고 그만 두는 게 또 좀 그런가...싶기도 하고."


"......"


"아까 얘기 하지 않았는데 내가 참 놀랐어요. 가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거든. 힘들면 한번씩 엄살도 부리고, 해야하는 걸 못 본 척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걸 이렇게 계속 해야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만 두어야 하나......그걸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걸 아주 딱 잘 말했어."


노인이 나를 보며 다시 미소지었다. 노인의 눈매는 깊고, 가느다란 주름들이 번갈아가며 촘촘히 길을 만들고 있었지만 자기 고백을 할 때의 그의 눈 빛은 어린 아이 같이 보였다. 속물처럼 느껴져서 숨기고 있던 자신의 미성숙한 모습을 툭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어하는 어린 소년. 저 이거 못하겠어요, 힘들어요. 라고.


"물론 내가 이걸 막 믿고, 신봉하고 그런 것은 아니야.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금새 다시 어디로든 발뺌할 수 있는 어른의 눈빛이 돌아왔다.


"네, 반드시 믿어야하는 점괘같은 건 아니에요. 답을 몰라 질문을 한다고 하지만 사실 질문도, 답도 자기 마음에 있는 거에요. 타로는 그냥 나도 모르던 내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 같은 거죠."


어른의 눈빛은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그 일은 젊은 사람이 하기에도 힘든 일이에요. 저는 어르신이 꼭 그 일로만 봉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중요한 건 남을 돕는 거지 그게 꼭 몸을 써야하는 것만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그런 걸 한번 찾아보시면 어떨까 해요."


노인은 기특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며 지갑을 열어 지폐를 한 장 꺼내어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나는 전화기를 내려다 보았다. 메시지도, 부재 중 전화도 없었다. 어제 밤부터 점심시간이 지난 늦은 오후까지, 나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확히는, 어제 나에게 설렘을 심어주고 간 그가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 온 마지막 메시지는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먹지 않겠냐는, 어제의 그 메시지 뿐이었다. 그와 사귀던 때 나누었던 길고 긴 메시지들은 이미 다 지워졌다. 그의 이름으로 내 전화기에 남아 있는 단 하나이자 가장 최근의 메시지는 그게 다였다.

뭘까.


나는 뭘 기대하는 걸까?


분명히 나 스스로도 이 감정은 그냥 아주 오랜만에 느낀 단순한 자극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혼자서 충분히 분석하고 정리했다고 느끼면서도 왜 자꾸만 뒤돌아 보게 되는 걸까?

혹시 그는 내가 먼저 연락해 주길 기다리고 있을까?

머리 속이 복잡했다.

대체 왜.

이 놈의 연애는 끝나고 나서도 이렇게 복잡할까.


"뭐해?"


주인언니가 내 책상에 커피 한 잔을 내려 놓으며 물었다.


"아니요. 그냥."


"무슨 연락 기다리는 거 있어?"


"아니요."


"나........혹시 오늘 조금 일찍 퇴근해도 될까? 자기 커피 내릴 줄 알지?"


"......"


언니는 뭐가 그렇게 쑥스러운지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


"콧바람 좀 쐬고 싶은데 이 놈의 가게 때문에 어딜 나돌아 다니질 못하잖아. 자기 덕 좀 보자. 못 만드는 메뉴는 그냥 다 떨어졌다고 해. 괜찮아."


아아. 이 커피가 그 값인가?


"그러세요. 제가 오늘은 끝까지 있다가 문 닫고 갈게요."


"응. 대신 내일은 내가 일찍 나올게. 자기가 늦잠 자."


벌써 카운터 뒷쪽으로 돌아간 언니가 소리쳤다. 그리곤 콧노래가 들리는 것 같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후다닥 가방을 챙기더니 손을 흔들고 빠르게 카페를 빠져나갔다. 훗, 하고 헛 웃음이 나왔다.

커피가 좋아서 카페를 차렸다는 주인 언니는 그게 얼마나 바보같은 생각인지 카페를 차린지 일년만에 깨달았다고 했다. '커피가 좋으면 맨날 카페 투어나 다녔어야 했어.'라고.

커피가 좋아서 차린 카페에서 마실 수 있는 건 자기가 내린 커피 뿐이라는 걸 그땐 왜 몰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도 자신을 대신할 수 없을 때는 그래도 꽤 진득하니 카페에 붙어 있을 수 있었는데 내가 이곳에 상주하게 되자 그녀의 마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분 것 같았다.

지난 달부터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루는 방법부터 살살 가르치더니 스팀 밀크를 만드는 법, 과일 주스를 만드는 법, 버블티 떡을 삶는 법까지 매일 하나씩 새로운 메뉴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어버버 하면서도, 거절하진 못하고 그냥 가르치는대로,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있다. 카페 알바를 해 본적이 있어서 그때의 기억들도 점차 살아 났다.

단골 손님들 중에는 혹시 사장님이 바뀌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지만 뒤늦게 그 얘기를 들은 언니는 나더러 그렇다고 하라면서 혹시 이 카페를 해 볼 생각은 없냐며 넌즈시 묻기도 했다. 싸게 해주겠다며.

나는 카운터 뒤쪽의 주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적어놓고 간 레시피를 들여다 보았다. 내가 좀 헷갈린다고 했던 메뉴들을 따로 정리해 놓은 것이었는데 모범생의 필기 노트 같아서 조금 웃겼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열심히 정리했는지 빨간펜, 파란펜으로 줄도 그어져 있었다.


땡땡이를 치기 위한 노력인가?


나는 노인의 카드를 떠올렸다. 열심히 한다는 것이 무언인지 모르겠다. 잘하려고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노력과 에너지를 쏟는 것만으로는 열심히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 노력과 에너지가 맞는 방향을 찾아야만 맞다, 고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감정의 방향은 맞나?

그가 나에게 무언가 기대한 것이 맞나?

우리가 서로에게 바라는 것이 맞나?


나는 커피를 입 안 가득 터질 듯 채우고 꿀꺽 삼켰다.






Six of Batons (여섯개의 지팡이/막대기): 열심히 하는 척 하지만 하기 싫고 잘해주는 척하지만 마음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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