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아침이 언제나 힘들긴 하지만 눈을 잘 못뜨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걸었던 밤길이 꽤 길고도 피곤했던지 맞춰놓은 알람도 못듣고 늦잠을 잤다. 긴 밤산책이 피곤했는지, 돌아와 누워서도 떠오르던 시간들을 훑느라 뒤척이던 잠자리가 피곤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답도 없고 출구도 없는 긴 시간 속을 두서없이 걸어온 기분이었다.
출근 시간을 놓칠만큼 늦은 건 아니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급하게 움직였다. 파바밧 물을 튀기며 세수를 하고, 낚아채듯 옷장에서 옷을 꺼내어 입고, 운동화 뒤축을 구겨신듯 하고 뛰어 나왔다.
그래서 주머니 속 핸드폰을 꺼내어 본 건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였다. 간 밤 나를 찾았던 건 대출 관련한 두개의 스팸문자와, 진주와 윤주의 문자 하나씩이었다. 무엇을 먼저 봐야할까 잠시 생각하다가 그냥 순서대로 보기로 했다.
오전 2시 28분
유진주
잘 들어 가셨죠?
전화 하기엔 좀 늦은 것 같아 메시지 보냅니다.
잘 들어가셨으면 답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음 미팅날 봬요!
오전 3시 16분
안윤주
안 자면 전화줄래?
가만히 문자들을 들여다봤다. 답을 해야하나? 답은 필요하지 않는다는 새벽 2시 28분에 온 문자에, 3시 16분에 안 자면 전화를 달라던 문자에, 지금, 아침 9시 24분에 답을 해야 하는건지, 모두 유효한 시간이 지나버렸으니 그냥 무시해도 좋을지 고민이 됐다.
잠시 고민을 하는 동안 타야할 버스가 왔고,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에서는 내내 창밖만 바라봤다. 타자마자 자리가 있어서 금방 앉을 수 있었지만, 그래서 다시 전화기를 확인해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멍하니 눈빛을 풀고 창밖 저 멀리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봤다'라고 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눈빛을 거기에 두었을 뿐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눈빛에도, 머리속에도, 마음에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텅 빈채로 있었던 것 같다.
버스에 실린 내 텅빈 육신은 매일 같이 내리던 정류장에서도 마치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몸뚱이처럼 스르르 일어나 내렸고, 찬 바람이 휘릭 지나가는 정류장에 서서 나는 내가 여기까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곤 깨달았다는 것이 무색하게 금새 다시 텅빈 무엇이 되어 걸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런 식으로 내 몸에서 의식과 생각을 모두 지워 버리는 훈련을 해왔다. 훈련이라고 하지만 크게 노력을 기울였던 건 아니다. 살려고 하다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익숙해졌다는 게 더 맞는 설명일 것 같다. 나에게는 그게 휴식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몸을 멈출 수는 없으니 생각을 잠시 멈추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카페 문 앞에서야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떠올리기 위해 좀비같은 것에서 다시 나로 돌아왔다. 뭐였더라? 이곳에 들어가기 위한 번호는.
나로 돌아오는 그 순간, 잠시 멈춰 놓았던 의식은 마치 터진 둑이나 댐처럼 와르르 몰려왔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해야하고,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할지부터 과거의 나는 어떻게 해야했고,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왜 그러지 못했는지, 왜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할 이야기를 혼자만 변명처럼 되뇌이고 있는지와 같이 전혀 쓸데없는 고뇌와 질문들까지 퇴적물처럼 명치 끝에 쌓이곤 했다.
띠. 띠.띠띠
진흙탕 같은 퇴적물더비에서 건져올린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와 물먹은 솜처럼 천천히 스위치로 다가가 카페 안의 조명을 켜고, 커피 머신을 세팅하고, 테이블을 닦고, 내 커피도 한잔 내려 내 자리로 와 앉았다.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주머니 속 핸드폰을 잠시 만지작 거리다가 다시 꺼내어 보았다.
잤어.
왜?
무슨 일 있어?
덕분에 잘 들어왔습니다.
자료 잘 정리해 갈게요.
주말 미팅 때 뵙겠습니다.
각각 윤주와 진주작가에게 답장을 보냈다. 둘 다에게 답장을 할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냥 모두에게 답장을 보냈다.
카드덱을 섞는 동안 남자는 카드를 들고 있는 내 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패를 속이거나 화려한 기술을 선보이는 타짜는 아니었지만 왠지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능숙하게 덱을 펼쳐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록 손은 덜컥거리게 되어 있다. 부채꼴로 둥글려 전체 카드를 테이블 위에 촤락 펼치는 중간 테이블 표면의 어딘가에 걸려 카드의 간격이 조금 못생기게 펼쳐졌다.
"질문을 생각하시면서, 잘 쓰지 않는 손으로 일곱장을 뽑아 주세요."
"네."
남자는 고분 고분 얌전한 손길로 카드를 뽑아 주었다. 나는 내 손의 쫒는 그의 눈길을 느끼며 천천히 한장씩 뒤집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또 진지한 눈빛으로 카드들을 쳐다봤다.
"저, 이거 사진 찍어도 돼요?"
이윽고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그럼요. 라고 대답하자 바로 핸드폰을 꺼내어 자신의 스프레드를 찰칵찰칵 찍었다. SNS에 올린다거나 하는 용도보다 기록용인 듯 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스쳐가는 것들, 기억해야하는 것들이나 경험들을 세세하게 사진으로 남겨두는 타입인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은 평온한 삶을 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나처럼 곡절많은 인생들은 일상을 기록하지 않는다. 무엇이 기록해야할 정도의 일인지 결정하는 것이 어렵다. 이 정도는 별일 아니지 않나? 이 정도보다 더 힘든 일도 있었는데? 이 정도 일은 내일도 생길텐데?라는 생각에, '그냥 기억하고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해져서 그렇다.
보통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은 관찰과 기록으로 글 쓰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 관찰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겉모습만이 아니라 내면까지 관찰하고 지속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너무 힘들었다. 자기 객관화를 할 줄 아는 것이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굉장한 약골이다.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나를 보는 것이 괴로웠다.
언젠가 공모전에서 내 소설을 떨어뜨린 어떤 심사위원에게 메일이 온 적이 있었다. 글이 쉽게 잘 읽혔다, 내용이 흥미로웠다, 조금만 다듬으면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칭찬 뒤에 조심스럽게 붙어 있던 마지막 문단이 내 마음을 때렸다.
세련님의 글은 매우 재미있지만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설은 진짜가 아니지만 적어도 읽는 동안은 진짜처럼 들려야 독자들의 마음에 남을 수 있습니다. 내 이야기란 것은 나의 내면이라는 필터를 거쳤는지 아닌지로 가려집니다. 세련님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최종 선발되지 않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실례를 무릅쓰고 메일을 드립니다.
나는 몇번이고 그 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주인공의 감정을 조금 더 섬세하게 묘사했어야한다는 걸까? 아니면 내 실제의 감정을 주인공의 마음처럼 털어놓았어야 한다는 걸까?
나는 메일을 받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윤주에게 보여줬는데, 윤주는 심각한 얼굴로 메일을 읽어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아."
윤주가 조심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뜻인데?"
"음...... 가끔 너를 보면 무언가 회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내가?"
"응. 물론 넌 굉장히 책임감 있는 사람이지. 성실하고. 그런데 그게 뭐랄까. 이런 설명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육체적인 성실함이랄까? 네 몸의 움직임의 성실함과 솔직함이지. 하지만 어떨땐 네가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거든."
"......내가?"
"감정이 있긴 하지. 감정이 없지도 않고, 느끼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가끔......"
"가끔?"
"가끔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어. 그 감정을 분명히 보았지만 보지 못한 척, 느끼지 못한 척 하는 것처럼 말야."
"......"
윤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눈길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왠지 힘이 탁 풀리는 것 같았다. 느낄 수 있고, 느끼고 있지만 모르는 척하다니. 나는 내가 감정의 '표현'을 겉으로 충분하게 하는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마음 속에서도 그런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걸 어떻게 몰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결단코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나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윤주에게 더 캐묻고 싶었지만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더 들킬것만 같았다. 그게 나의 회피라는 걸까?
윤하선배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대뜸 담배 같은 거네. 라고 말했다.
"담배 같은 게 뭔데요?"
내가 묻자, 선배는 그녀의 반짝이는 작은 가방에서 더 작고 더 반짝이는 명품 담배갑을 꺼내어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담배 한 개피를 입에 물었다. 윤주도, 나도 담배를 피우지 않아 담배같은 것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주변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윤하 선배가 거의 유일했다.
"너, 겉담배, 속담배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 피워볼래?"
그녀가 담배 한대를 더 꺼내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그걸 받아든 뒤 윤하 선배가 하는 것처럼 입에 물었다. 선배는 퐁!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나는 금빛 라이터를 켜 내 앞에 들이 밀었다.
"가만히 있지말고 담배를 빨대 빨듯 쭉 빨아. 그래야 붙이 붙어."
뽀뽀하듯 담배를 입에 문 채 입술을 쭉 내민 나에게 선배가 웃으며 말했다. 흐-읍! 하고 들이 마시자 목구멍을 콕콕 찌르는 듯한 연기가 입안 가득 찼다. TV에서 본 것처럼 쿨럭쿨럭 하며 폐병환자같은 기침을 하진 않았다. 오히려 담배연기는 남의 연기를 맡을 때 보다 내 입속에 있는 것이 더 구수하게 느껴졌다. 이런 맛에 담배를 피우는 건가? 하며 입안의 연기를 후- 하고 내 뿜었다. 구름 같은 연기가 뭉개뭉개 퍼졌다.
"그게 바로 겉담배라는 거야."
선배가 나를 슬쩍 보면서 담배 연기를 깊에 들이 마셨다가 후- 내 뿜었다. 그녀의 담배 연기도 내것처럼 뭉개뭉개 흩어졌다. 봤어? 라고 선배가 물었다.
"뭐가 달라요?"
"뭐가 다르긴. 넌 지금 담배의 연기를 그냥 입안에 넣었다 뱉은 거잖아."
나는 끄덕였다.
"난 지금 내 폐 깊숙히 그 연기를 넣었다 뺐어. 네가 내뿜은 연기와 내가 내뿜은 연기는 일단 몸의 어디까지 들어갔다 나왔는지가 달라. 입안에 머금었다 뱉은 건 물론 네 안에 들어갔다 나왔긴 하지만 정말 너를 거쳤다고 볼 수 없지. 하지만 내 담배연기는 내 장기를 한번 훑고, 체 쳐진 것처럼 나왔다고. 그런 차이야. 비슷하지만 다르지. 화학적인 성분은 같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엔 내 폐에 머금고 있던 공기가 들어 있는 거니까."
나는 다시 한번 담배를 물고 깊게 들이 마셨다. 나의 폐로 그 연기를 넣고, 담배 연기가 내 폐포 사이 사이를 한번씩 돌아나온다고 생각하면서.
곧바로 쿨럭쿨럭하는 기침이 쏟아졌다. 눈물이 핑 돌았다. 선배는 그런 나를 보더니 큭큭큭 웃었다.
"그런거지 뭐. 내 내면의 필터를 거친다는 건 몸이든 마음이든 좀 괴로운 일인데 넌 겉담배 피듯 글을 쓴 것 같다는 거 아니겠어? 심사위원에게는 네 고뇌가 느껴지지 않았나 보다."
나는 손에 쥔 담배를 내려다 보았다. 한번도 재를 털지 않아 곧 툭 떨어질 것처럼 길게 타 있었다. 검지 손가락으로 가느다란 담배를 한번 툭치니 반백의 머리카락과 비슷한 색의 재가 통째로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이렇게 한동안 계속 쉬기만 해도 괜찮을지, 쉬고나면 마음이 더 나아질지가 궁금하시다고 했잖아요."
나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남자는 반짝이는 눈빛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쉬셨는데요?"
"한......3개월쯤이요."
"충분한 것 같으세요?"
"어....어....."
남자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에 잠겼다.
"충분하지 않았는데 계속 쉬어도 될지가 고민이라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
카드에는 의외로 코인 카드가 많지 않았다. 돈과 관련된 문제였다면 코인카드가 많이 섞여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카드는 주로 칼(Swords)과 나무(Baton)가 대부분이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었나봐요."
그의 과거 카드를 보며 말했다.
"네......번아웃 증후군처럼 무기력증이 왔어요. 처음엔 체력적인 문제인가 해서 연차를 길게 내서 쉬기도 하고, 운동도 다니고 그랬는데 나아지질 않더라구요."
"일이 많았는데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었나 봐요? 주로 내가 벌린 일이니 도와달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습은 해야겠는데 손은 부족하고......"
"맞아요. 제가 하고싶다고 해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는데 어느 순간 대표님이 관심을 안 갖더라구요. 그리고 나니까 회사 내부에서 지원도 별로 없고, 다들 바쁘니까 도와달라고 하기도 그렇고......그렇게 몇번이나 무기력에서 벗어나질 못해서 그만 뒀어요.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하더라구요."
"어쩌면 일이 많아서 번아웃이 온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카드로 볼 땐 인간 관계의 문제였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음......도와달라고 해보지도 않으셨죠?"
"......"
"힘들다고는 해 보셨어요?"
"......아니요."
"왜요?"
"모르겠어요.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내가 하자 그랬으니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고, 그것도 하나 책임 못지면서 누군가에게 그 부담을 같이 지자고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하고......"
"현재의 카드를 봐도 상담자 분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생각되진 않아요. 그때와 비슷하게, 이제 쉴만큼 쉬었고, 때가 되었으니 다시 일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 것 같아요. 몸이 힘 든 것이 진짜 원인이 아닌 것 같다고 하셨으니 그 문제를 직면하거나 해결한 뒤에 다시 일을 시작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남자는 고개를 떨구고 잠시 생각에 잠 긴 것 같았다. 그리곤 곧 고개를 들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게 저는 참 어려워요. 내가 해결하지 못해서 그런 것 같고, 내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내가 좀 자기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 들어요."
그의 눈동자가 참 처연해 보였다. 그는 아마 능력있는 사람일 것이다. 배울만큼 배웠고, 자기 몫의 일은 척척 해내고, 불평이나 불만을 잘 내 비치는 타입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의 문제를 키웠을 거라고 생각했다. 표현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른다. 괜찮은 척 하면 괜찮은 줄 안다. 이겨낼 수 있는 척 하면 이겨낸 줄 안다. 그래서 난 나 자신에게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괜찮은 줄 알라고. 이겨낸 줄 알라고. 나 자신까지 속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지 마세요."
내가 말했다.
"힘들다고 하세요. 둘이 하면 금방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함께 해 주겠냐고 물어 보세요."
"......"
"저는 상담자님이 왜 도움을 청하는 게 어려운지, 그게 왜 나의 약점처럼 비춰질까 두려운지 자세히는 잘 몰라요. 분명히 그게 나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던 적이 있었겠죠. 아니면 살면서 아예 그런 감정을 드러낼만한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결국 그 감정이 상담자님을 멈추게 만들었잖아요. 잠시 멈춰서 도움을 요청하면 다시 나아갈 수 있었을텐데, 그냥 가려고 하다가 아예 모든 것을 멈춰버릴 수 밖에 없었어요. 다시 달려가보려 해도 진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얼마 못가 다시 멈춰설 수 밖에 없을 거에요."
"......"
남자는 착잡해 보였다.
'내가 버틸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사람에게 '버틸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한 '괜찮은'의 지점이 궁금했다. 그는 무엇이 어떤 상황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버틸 수 있는지를 묻지 않는다. 이제 더이상 안될 것 같은 사람만이 되묻는다.
나는 그에게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이 주변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지금까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도 손을 내밀면 잡아줄만한 누군가가. 기다렸다는 듯 그래, 알겠어.라고 말하며 웃어줄 누군가가.
위로가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담아 혼란스러운 등을 한 그를 보내고 휴대전화를 켰다.
조금 망설이다가 천천히 글자를 하나씩 눌러 문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보냈다.
The High Priestess (여사제):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상황이 확실치 않아 결정하지 못하고 마음을 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