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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상처의 급습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우리의 이상한 인연과 우연을 어색하게 복기한 후 잠시의 침묵이 있었고, 다시 어색하게 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 순간은 매우 어색하고도 이상했지만 일단 시작하고나자 진주는 빠르게 몰입했다. 계속해서 그 몸둘바 모르겠는 분위기에 남아 있는 건 나 혼자 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어색했다.

진주는 그날, 보이고 싶지 않았던, 연인과의 마지막 모습을 나에게 보였지만 나 역시 처음 보는 남자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아니 보여줄 거라고 생각지 않았던, 이미 헤어진 연인과의 질척이는 모습을 그에게 들켰던 기억이 있다. 그에게 우리 둘의 모습이 어떻게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에겐 무척 부끄러웠던 장면으로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쉽게, 그리고 감쪽같이 내 감정을 숨길 줄 아는 편이다. 숨기는데 재능이 있다기보다 적절히 표현하는 방식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솔직히 드러낼 줄을 모른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는 이보다 더 당황스러운 상황, 이보다 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랬던 사람, 더 창피했던 순간이 많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툭,툭,툭 방망이질치던 심장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쩔줄 모르던 표정도 다시 무표정하게 돌아왔다. 나의 당황스러움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의 이별에 조력자였을 수 있다는 것과 그를 일종의 '나쁜남자'로 생각했다는 것을 들키면 어쩌나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소리였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말했다시피, 그렇게 될 줄 알았던 사이였고, 그 단계를 밟고 있던 연인이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이 남자는 그때 그 나쁜남자가 아니라 나의 동업자 중 한명이고 나는 그의 중요한 파트너 중 한명일 뿐. 서로의 흑역사 부스러기는 잠시 주머니 속에 넣어두기로 하자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이름이 특이해요. 세련씨"


한참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기획을 들려 주던 진주가 갑자기 내 이름을 말했다.


"......특이한 게 아니라 촌스러운 거겠죠."


내가 대답했다.


"이름이 세련인데, 촌스럽다, 굉장하네요."


"뭐가요?"


"세련인데 촌스럽다는 것이요. 굉장한 자신감 아닌가요? 부모님이 그 이름을 지을 땐 의도가 있으셨겠죠? 혹시 필명이에요?"


"아뇨. 본명이에요. 저는 진주씨처럼 유명한 작가가 아니니까 그런 촌스러운 필명이 있다는 게 더 우습게 보일 것 같네요."


"뭐, 일종의 장난, 해학같은 느낌으로 지었을 수도 있죠. 처음에 글을 보기 전에는 이름이 눈에 띄었거든요."


"진주씨는 그랬나봐요?"


나는 너무 날카로워 보이지 않으려, 목소리를 작고 둥글게 내려 했다. 나는 항상 나와 관계된 것들이, 내 주변의 사람과 상황들이, 그리고 나에 대한 것들이 누군가의 눈에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의 표현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열등감과 피해의식 속에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조금만 삐끗해도 타인의 눈에 나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한때의 소설가 지망생이 나는 주변의 작은 것들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이런 저런식으로 풀어보는 것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아주 단순한 호기심일 뿐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표현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 이런 내가 너무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은 내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나도 이런 방어적이고 피곤한 고민을 할 필요 없는 인생이길 바랐으니까. 

그리고 그런 식의 '사서 걱정' 역시 일종의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의 한 조각일지도 모른다. 


"저는 그냥......남자의 느낌이 아니었으면 했어요. 그렇다고 여성적으로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남자 작가라고 하면 기대하는 '선이 굵은', '거침 없는' 이런식의 고정관념이 작품을 보기 전부터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게 싫었죠. 담당자들이 무의식적으로 그런식의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싫었고요."


"고정관념을 싫어해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부정적인 것이라면 싫어할 수도 있죠. 하지만 늘 부정적이진 않아요."


"이를테면?"


"명품을 들고다니거나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다니면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으로 보는 것. 많은 사람들이 명품을 소비하는 이유 중 하나죠."


"그런 이유로 소비를 해 본 적이 있나요?"


"......"


나는 조금 불편해졌다. 누군가와 긴밀히 일을 하면 당연히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내 개인사를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드러내야 할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줄은, 두번째 만나는 남자에게일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십년이 넘는 동안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윤주조차도 처음 사귀던 1, 2년 간은 내 개인사를 알지 못했다. 그저 끊임 없는 아르바이트에 지쳐있는 나를 '집이 조금 어려운' 여자친구 정도로 생각했을 뿐.


"......아니요. 없어요."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죠? 그것이야말로 고정관념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진주가 빙긋 웃었다. 그는 우리가 꽤 유쾌한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꽤 센스있는 질문으로 내 논리적 허점을 찔렀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조금 똑똑해. 나는 조금 논리적이야. 나는 조금 날카로운 편이야. 라고 으스대는 듯한 진주의 미소가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그래. 그는 구김이 없는 편이다. 구김이 없으니 이런 짧은 대화 속에서 진리를 깨달았다거나 누군가에게 진리를 일깨워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또 그런 대화가 즐거운 유희라고 느끼는 것이다. 구김없이 자라고, 먹고 살 것에 대한 걱정이 없는 아이들은 허세가 없다. 노력하지 않아도 누리게 될 긍정적인 고정관념 같은 것에도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걸 굴레라고 느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들은 그런 편이다. 나는 수저는 커녕, 아무것도 쥔 것 없이 태어났다는 걸 누가 알아볼까 너무 두렵고 당황스러운데, 많은 것을 쥐고 있는 아이들은 남들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것으로  평가받는 것을 굴레라고 느낀다. 그것 때문에 순수한 자신의 능력과 자아가 훼손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산이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걸까?


"......그런 고정관념이 싫어서 명품을 사지 않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는 그런 이유로 소비할 여유조차 없을 수도 있어요. 진주씨의 주변에는 그 정도의 사람이 없었을 수도 있겠지만요."


나는 너무 따지거나 억울해 보이지 않으려 목소리를 다시 차분하게 한 톤 낮췄다. 이건 그저 너의 의견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이지 내가 그렇다는 게 아니야, 라는 뉘앙스를 싣고 싶었다. 내 열등감이, 피해의식이 벌써부터 낯선이에게 펼쳐보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 때문에 그가 굳어버리거나 나를 조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의식한다는 걸 느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첫 미팅은 새벽 한시가 다 되어 끝났다. 야행성이라는 진주는 오히려 11시가 넘어가면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는 자고싶은 만큼 자고, 느즈막히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카페로 출근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그의 사무실로 출근한 나는 11시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다. 고정관념에 대한 짧은 토론을 나눈 이후로 그냥 일 얘기만 하고 싶기도 했다. 그런 식의 대화조차 나에겐 사치였다. 몇 시간 후면 나는 다시 일어나서 출근을 해야하고, 사람들을 만나 부딪히고 이야기를 하며 돈을 벌고, 틈틈이, 퇴근후의 시간을 쪼개어 다음 미팅 자료를 준비해야했으니까.

나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 가벼운 아이스브레이킹 식의 대화를 쿨하게 툭툭 던지고, 먹고 사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지적 허영심과 호기심을 채워주는, 답이 없는 토론을 하고 싶다.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나는 그 누구보다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다음날의 나를 위해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막아야했다.

한시쯤 되자 진주는 무엇을 타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를 물었다. 아니 정확히는 '차는 가져오지 않으셨을 거고, 집에는 어떻게 가세요?'라고 물었다.

그때서야 집으로 돌아갈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하철은 이미 끊어졌을 시간이고 버스 역시 확실치 않았다. 택시를 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지만 택시비를 생각하니 그 조차 내키지 않았다.


"택시를 불러드릴까요?"


진주가 물었다.


"아니면 제가 가는 길에 데려다 드려도 되고요."


 어두워진 내 기색을 살피며 덧붙였다. 그 어떤 선택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나를 두고 진주가 콜택시를 호출했다. 


"저는 괜찮은데, 좀 불편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택시 불렀어요. 괜찮죠?"


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택시는 10분 정도 후 도착했고, 어쩔 수 없이 며칠간의 용돈을 택시비에 쏟아부어야 하는 나는 편치 않은 마음으로 주섬 주섬 택시에 올라탔다. 그리고 인사를 하러 내린 차창 사이로 진주가 5만원짜리 지폐를 넘겨주었다.


"늦은 시간에 당연히 숙녀분을 데려다 드려야 하는데 죄송해요. 다음엔 조금 더 일찍 만나요."


받아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이는데 진주가 얼른요, 라며 지폐를 흔들었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그 돈을 잡았다. 진주가 나를 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찌르르한 기운이 가슴에 울렸다. 나는 이 기운이 나의 열등감일 거라고, 못난 마음이 당연한 매너를 못알아보는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5만원짜리를 손에 꽉 쥐고 있던 나는 결국 중간쯤 가서 택시를 세우고야 말았다. '아저씨, 여기 그냥 세워주세요.'라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남의 것처럼 들렸다.

'아니야, 제발 그냥 타고 가!' 라고 하는 마음이 택시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나에게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는 척 했다. 택시비를 내고도 잔액은 3만원이 넘게 남았다.

입김처럼 흰 연기를 바르르르르릉 내뿜으며 택시가 사라지자 그 차갑고 텅빈 거리에는 정말 나 혼자만 남은 것 같았다. 새벽의 겨울 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말그대로 뼈가 시릴 정도의 추위가 턱을 자동으로 달달 떨리게 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을 흘리면 더 추울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아쉽게 헤어지는 친구의 뒷모습을 쫒듯 멀어져가는 택시의 뒷꽁무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쫒았다. 그리고 택시가 완전히 사라져 보이지 않자 패딩에 고개를 푹 파묻고 가로등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무섭진 않았다. 이런 시간, 이런 추위에서까지 나쁜짓을 꾸밀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조차 따뜻한 집과 포근한 이불 속에서 내일을 준비할 것이다. 내일의 나쁜짓을 떠올리며 스르르 잠에 들 것이다.

다시 울컥 무언가 목구멍에 꽉 차며 올라왔다. 그냥 왠지 서러웠다. 이런 감정은, 이런 기분과 이런 상황은 이미 서른을 지나며 어디론가 녹아서 내 몸을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사춘기엔 마구 태어나는 동생들의 뒷치닥거리를 하면서 공부를 하느라 그런 감정에 빠져들 새가 없었고, 그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신들만의 시간과 친구를 찾아나가기 시작할 때 쯤 되어서야 나도 미뤄두었던 내 사춘기를 꺼내어 볼 여유가 생겼다.






스물하고도 한참이 지난 언젠가, 서른이 가까워 오던 그 날도 오늘처럼 버스도 전철도 끊긴 어느 날 밤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던 날이었다. 다른 심야 알바생 하나가 무단 결근했다. 그의 빵꾸를 메꾸는 대신 사장은 야근 수당을 좀 더 챙겨준다고 했다. 그렇게 열두시간이 넘게 내리 서서 일을 하고 나왔는데 차 시간이 지났다는 걸 몰랐다. 택시를 타면 어렵게 받은 야근 수당이 도로묵이 된다. 함께 일을 끝낸 어린 알바생들 중 집이 가까운 누군가는 걸어가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가기도 했다. 또 경험 삼아 알바를 한다는 누군가는 엄마가 차를 끌고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픽업을 했다. 우르르 다함께 나왔던 알바생들은 손가락 틈으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어느샌가 스르르 다 사라지고 불꺼진 가게 앞에 덩그러니 서 있는 건 나 하나 뿐이었다.

윤주에게 전화를 해서 데리러 와 달라거나, 가는 동안 전화통화를 해달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새벽 두시에 곤히 자는 남자친구의 잠을 깨워 칭얼대기엔 내 나이가 너무 많았다. 이젠 그런 게 실례라는 걸 모를 수 없는 나이였다. 

적막한 거리를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서 있던 다리는 무겁다 못해 감각이 무뎌졌다. 그 묘한 무딘 느낌이 내가 지금 진짜 길을 걷고 있는 건지 꿈 속을 헤매고 있는 건지 몽롱하게 다가왔다. 너무 피곤하기도 했다. 지금 여기가 집이라면,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이 나온다면 바로 쓰러져 잠들 것 같았다. 눈도 반쯤 감고 걷고 있었는데, 뒤에서 갑자기 아주 크게 빠앙! 하는 클락션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비닐 봉투를 그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안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던 식당에서 팔고 남은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동생들에게 주려고 싸왔던 것들이었다. 봉투는 뭉툭하고도 묵직한, 물기를 머금은 '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달라붙듯 떨어졌다

나를 놀래킨 차는 신경질적인 빠앙 소리를 한번 내던지고는 빠르게 지나쳐갔다. 나는 무릎을 구부려 바닥에 넙덕하게 퍼져있는 봉투를 주우려다가 주저 앉아버렸다. 놀라기도 했고, 다시 일어설 힘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앉으면서 그대로 두 무릎을 안으며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말 오랜만에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울었던 밤이었다. 조용한 와중에 들리는 건 훌쩍이며 코를 들이키는 내 울음소리 뿐이었다.

한 이십여분쯤 바지 무릎에 무릎보호대처럼 둥그런 눈물 자국을 내고서야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외롭고 서러웠다. 집으로 돌아가면 엄마는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가져오는 음식 때문이더라도 동생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보며 '어서와'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물먹은 솜같은 내 어깨를 주무르며 '오늘 힘들었지?'라고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일어서며 주우려던 봉투를 그냥 두었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들고 윤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주는 받지 않았다. 시간은 새벽 세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걸었다. 입술을 앙 다물고. 왠지 모를 서러움과 분함을 아무 상관도 없는 그에게 터뜨릴 것만 같아 나 자신이 두려웠지만 그날 밤에는 그 누구라도 한 명은 내 이 울적한 마음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보세요?"


윤주는 자다 깬 것이 분명한 갈라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하지만 막상 그가 전화를 받자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데리러 와줘? 오늘 너무 힘들어? 나는 왜 이래? 


"어디야? 집이야?"


기지개를 켜는 신음소리를 내며 윤주가 물었다.


"......아니."


"그럼?"


"길이야."


"길? 무슨 길? 길에서 뭐해? 지금 몇시야?"


수화기 넘어로 다시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시간을 확인하는 듯 했다. 히엑!하며 놀라는 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새벽 3시야. 세련아 너 왜 밖에 있어? 오늘 집에 안들어갔어?"


"아직 못들어갔어. 야간 타임 알바가 빵꾸를 내서 내가 대신 했어."


"몇시까지 했는데 아직도 집에 안갔어?"


"......"


"......차 끊겼지, 너."


"......"


"집까지 걸어가려고 했어? 어디까지 걸어갔어?"


"......"


"아직 집까지 많이 남았으면 내가 지금 갈까? 거기 괜찮아? 위험하진 않아?"


"모르겠어. 아무도 없어. 다들 집에 들어갔나 봐."


"......"


윤주는 말없이 짧게 끙, 하고 한숨 섞인 앓는 소리를 냈다. 그는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깬 것 같았다. 나는 그를 깨우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답이 없는, 철없는 여자친구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첫 의도는 어쨌던 간에 지금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근처에 편의점 있어? 거기 들어가 있어. 그리고 문자로 어딘지 보내줘. 내가 지금 갈게. 거절하지말고 꼭 그렇게 해. 주변에 둘러 봐봐. 편의점 보여?"


나는 꿋꿋이 온 가족을 돌봐야할 가장에서 갑자기 돌봐주어야 할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보여."


"들어가. 그리고 문자 보내. 차 가지고 갈 거니까 어디든 30분 안 걸려. 저녁은 먹었어?"


"......대충."


"그럼 거기서 뭐 하나 더 먹어. 삼각김밥에 컵라면 하나 먹고 있어. 그리고 나 커피 한잔 사주라. 단 거 말고. 나 자주 먹는 거 알지?"


".....응."


"그래. 얼른 들어가."


"응."


윤주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나에게로 달려오기 위해. 나는 끊어진 수화기를 볼에 대고 남아 있는 온기를 느꼈다. 조금은 다리의 감각이 돌아온 것 같았다. 무겁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꿈속을 휘저으며 걷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방향을 바꿔 저 멀리 간판 불이 환하게 켜진 편의점을 향해 걸었다.











Four of Swords (네개의 칼): 치열한 경쟁, 쉬고 싶지만 쉴 수 없는 상황. 마음이 지치고 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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