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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불완전한 시작

*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빌리버튼)'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전국 온/오프라인 서점에서 만나요!

















유대표를 만나고 돌아오자마자는 마음이 무척 떨리고 긴장되었지만 별 일 없이 일주일이 지나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일을 앞두고 당장 무언가 신나는 일이 생기거나, 좌절하거나, 일상의 변화가 생길 것 같았지만 실제로 나의 일상은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심심하고 정체된 듯 느껴졌다.

다만 그 날이후 나는 나의 오랜 아이디어 노트를 다시 꺼내어 밤이면 그날 나를 찾아왔던 여러 상담 손님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들의 사연을 간략히 적는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치 심리 상담을 하고 내담자들의 상담 내용을 기록하는 상담사처럼 무미 건조하게 날짜와, 성별, 추정 나이, 그들의 질문을 아주 간단히 적어두는 정도였지만 며칠 후부터는 거기에 나의 답변과 그들의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 나의 답을 들은 그들의 반응, 그리고 돌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에 대한 예측까지를 적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되던 날, 나는 내가 '~했음.' 으로 끝맺던 문장을 완성된 문장으로 적고 있다는 것을, 어느새 문장과 문장 사이에 접속사가 등장하고 그것이 매끄럽게 읽히는지 확인한 뒤 노트를 덮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괴롭게 떠나왔는데.

이젠 좀 지겹다고도 생각했는데 그 때문에 윤주와도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나는 다시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일까.

어느 밤, 열심히 그날의 상담 내용들을 적고 후련한 마음으로 노트를 탁! 덮고난 뒤 나는 오늘 할 일을 다 끝낸 듯한 마음이 든 나를 발견하곤 이상한 괴리감에 깜짝 놀랐다. 왜 이러지. 왜 뿌듯하지. 왜 만족스럽지. 왜 즐겁지......

나는 그날 나 대신 울어주었던 아이를 떠올렸다. 그 애는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했을까? 아빠에게 지원을 요청했을까? 잠시 꿈을 묻어두기로 결정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륵.


테이블 위에 올려 놓은 휴대전화가 주기적으로 몸을 바르르 떨었다. 화면에 '유대표님'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아주 작은 두근거림을 느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신작가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으실까요?"


유대표가 예의 바르지만 시원시원하고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기분이 20%쯤 업된 상태인걸까? 누군가 그와 함께 있는 나를 비교하면 나는 늘 20%쯤 다운된 상태의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네. 괜찮습니다."


"유진주 작가가 갑자기 여행을 다녀온다고 해서 답이 좀 늦었습니다. 전화도 꺼놓고 떠났거든요. 그녀석이 원래 좀 그래요. 예술가라고 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하하."


"......"


나는 유대표의 동생 뒷담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예술가라고 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라......


"아이고, 작가님도 예술가신데, 제가 실수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하하."


유대표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니에요."


 나는 그저 등단도 못한 나를 작가라 불러주고 예술가라 불러주는 것이 황송할 따름이었다.


"어제 유작가가 돌아와서 작가님이 보내주신 레퍼런스 작품들을 훑어봤고요, 밤새워서 본 건지 지금 막 연락이 와서 작가님과 일을 해 보고 싶다고 하길래 저도 바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


나는 여전히 어버버한채로 뭐라 반응하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누군가 나를 선택해 주는 전화를, 그런 상황을 만나본 것이 거의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늘 뒤에 남겨졌고, 아무도 내가 거기에 있는지 몰랐다.

아니, 알면서도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난 그럴만한 영향력이 있는 사람도, 매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늘 20% 정도 가라 앉아 있는 사람일 뿐이었다. 함께 끌고가기엔 조금 무거운.


"아......혹시 의사가 바뀌신 건 아니시죠? 제가 너무 늦게 연락을 드렸을까요?"


내가 아무 답이 없자 유대표가 나즈막히 물었다.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대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연락이 없으셔서 다른 분과 하시려나보다 했어요. 갑작스러워서 놀라서 그랬습니다."


"아이고, 그러셨군요. 제가 문자라도 드리고 연락을 드릴 걸 그랬어요. 저는 빨리 말씀 드리는 게 서로 일정 조절 같은 것이 편할 것 같아서, 바로 전화를 드렸는데 저 혼자 너무 들떴나봅니다. 하하."


여전히 유쾌했다. 이런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어쩐지 모든 일들이 다 술술 쉽게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도 5% 정도는 업되는 것 같고.


"여튼, 아주 잘 됐지요. 유작가가 좀 까탈스러운 편인데 이번에는 의외로 빨리 결정을 했거든요."


" 아, 네."


"저도 내심 작가님이 함께 해 주셨으면 하고 있었는데 유작가도 그렇게 느껴서 신이 나네요. 왠지 그 망아지 같은 녀석이 작가님을 만나면 좀 차분해 질 것 같기도 하고, 제멋대로인 게 좀 고쳐질 것 같기도 하고...그러네요?"


"아, 네."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에게 망아지처럼 보이는 20대후반의 여자를 상상해봤다. 20대 후반에 망아지 같고, 예술가 같은 타입의 여자애.

유대표는 은연중에 나를 여동생을 길들일 가정교사나 과외선생님처럼 대하고 있었지만 오빠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미 어른이 되었고, 자립했지만 큰 오빠에게는 언제까지나 그냥 늦둥이 막냇동생처럼 보이는 걸지도. 내가 그녀를 잡으려고 한다면 유대표의 바람과는 다르게 우리 둘의 사이는 시작도 하기 전에 파탄이 날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 둘 사이의 관계 줄타기가 생각보다 까다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신작가님만 유작가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 앞으로 프로젝트가 술술 풀리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두 작가님 미팅을 언제쯤으로 잡으면 좋을까요?"






저녁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더 일찍 나올 수도 있었지만 유작가가 야행성이라며 오히려 제 정신인 상태로 미팅을 하려면 저녁 시간대가 낫다는 유대표의 말에 그냥 카페 영업이 끝나갈 시간 쯤으로 약속을 정했다. 나 역시 이 쪽이 더 편하니 마다할 것 없었다. 아직 이 일을 시작한 것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도 아니니 작가 흉내를 내며 그럴듯한 미팅에 하루 매출을 포기하는 건 나도 부담스러웠다.

주인언니는 더 일찍 퇴근해서 금수저 집안의 젊고 성공한 작가에게 얕보이지 않게 집에서 예쁘게 꾸미고 가라고 6시부터 내 등을 떠밀었지만 꾸민다고 초라하지 않은 건 아니란 걸 지난 번 미팅에서 깨달았다. 그런 걸 신경쓸 수록 초라해 진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오늘은 늘 입던대로, 늘 신던대로, 늘 들던대로, 원래의 나대로 하고 길을 나섰다. 길이 들대로 들어 이제 내 발처럼 느껴지는 스니커즈에 역시 내 몸에 착 붙는 말랑말랑한 오래된 청바지, 오래 전 플리마켓에서 사서 들고 다니다가 몇번이나 빨아서 조금 빛이 바랜 에코백을 들었다. 솜을 빵빵하게 넣어 두툼하고 따뜻한 패딩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퍼를 목끝까지 올리고 고개를 푹 집어넣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밤이지만 견딜만했다. 오늘 아침 출근하던 나의 모습 그대로였다.

계단을 오르는데 지난번처럼 따각이는 닳은 구두굽소리가 나지 않았다. 닌자처럼 아무 소리 없이 사뿐 사뿐 계단을 올라갔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했다. 스며들듯 그곳으로 들어갔다.

이미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서 대부분의 자리는 비어 있었지만 여전히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며 키보드를 두드려대는 직원들이 두어명 정도 있었다.


"신작가님?"


유대표가 미리 언질을 준 모양인지 어려보이는 자그마한 여자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 나를 발견하고는 벌떡 일어나 아는 척을 했다.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하자 이리로 오라며 끌고 가는데 지난 번 유대표를 만났던 회의실로 들어가려던 나는 회의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녀를 보곤 삐끗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타다닷!하고 속도를 냈다.


"대표님과 유작가님은 대표실에 계시거든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나의 주춤임을 느꼈는지 작은 직원이 말했다.


똑똑.


직원은 짧고도 정확한 손놀림으로 문을 두번 두드렸고 안에서 들어오시라는 유대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직원이 문을 열어주며 몸을 비켜서서 나에게로 들어가라고 길을 터 주었다.


"아이고, 신작가님! 어서오세요. 늦은 시간인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대표의 환대로 내 주위의 공기가 20% 정도 가벼워졌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며 직원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서야 고개를 들었다. 처음 와 본 대표실은 유대표처럼 밝고 실용적으로 보였다. 본래의 용도는 식탁이었을 것이 분명한 희고 커다란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모니터와 무선 키보드가 있고, 보통의 사무실과 사무용 책상이라면 어지러이 흩어지거나 쌓여있곤 하는 서류뭉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 앞으로는 책상의 세배쯤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소파가 ㄷ자의 형태로 사무실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장정 세명이 누워도 될만한 거대한 소파였다. 그리고 그 중 한쪽엔 이미 한 남자가 누워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정교사가 되어 줘야할 나의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유진주 작갑니다."


유대표가 소파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유진줍니다."


누워있다 앉은 남자는 유대표의 손짓에 다시 일어서서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그의 손을 맞잡고 흔들었지만 차마 여자인줄 알았어요, 라고 말을 덧붙이지는 못했다.


"놀라셨나봐요. 제가 남자라서?"


남자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씨익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얌마, 이름이 그게 뭐니. 사람들이 다 널 여잔 줄 안다니까. 작가님 놀라셨어요? 말씀을 드릴 걸 그랬나 봐요."


유대표가 나에게 소파의 한쪽을 권하곤 진주작가를 돌아보며 나무라듯 말했다.


"필명을 참 요상하게 지었단 말이죠. 그렇죠?"


유대표가 계속 아......하며 입을 벌리고 있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듯 말을 건냈다. 뭐라 대답해야할지 몰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유대표와 유작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주 작가에 대한 묘사를 할 때 유대표의 태도는 분명 천방지축 철이 안든 막내 남동생을 대하듯 한 것이 분명했다. 왜 당연히 여자일거라고 생각했을까. 왜 필명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참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소설가가 될 수 없었던 걸까?


"아, 네네."


나는 어벙벙하게 유대표가 가리킨 자리에 철퍽 앉아서 다시 한번 진주 작가를 쳐다봤다. 이런 상황이 너무 즐겁고 재미있다는 듯한 진주 작가 역시 얼굴 가득 미소를 띄고 나를 바라봤다.


"이제와서 이름을 바꿀 수도 없고, 매번 이러니 어쩌냐."


대표실 한 구석의 커피머신에서 얼른 커피 한잔을 내려와 내 앞에 내려 놓으며 유대표는 여전히 진주작가를 탓했다.


"이런 재미 때문에 그 이름을 지은 건데 바꾸긴 왜 바꿔? 형 또 날 굉장히 이상한 애처럼 얘기해 놨지? 아주 세상 괴팍하고 괴상한 놈으로."


"이상한 놈이니 이상하게 얘길했지. 뭐 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형 기준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더 이상해. 사람이 너무 네모네."


"네모 같은 소리하네. 넌 작가라는 애가 사람을 묘사하는데 그정도 밖에는 표현을 못하냐? 네모같은 사람이라니. 너무 추상적이야. 그럴 거면 순수미술을 했어야지. 넌 대중예술을 하는 웹툰 작가잖아."


"네모를 네모라고 하는데 갑자기 내 인격모욕? 네모형, 화내지마. 더 네모나게 보이니까."


유대표와 진주작가는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투닥거렸다. 분명히 사이가 좋은 형제사이였다. 나는 한번도 내 동생들과 이런 식의 대화를 해 본적이 없다. 네모나다, 세모나다 하는 이야기는 서먹하거나 팍팍한 사이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다.

나와 동생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눴더라......

나는 그들의 티키타카를 멍하니 바라보며 동생들과의 대화를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빨리 말씀드려. 바쁜 분을 늦은 시간에 모셔놓고."


유대표가 진주작가의 실없는 소리를 끊으며 나를 대화 안으로 초대했다. 진주작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태블릿을 내 앞에 펼쳐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후다닥 가방안에 넣어 온 나의 아이디어 노트와 볼펜을 꺼냈다. 그 모습을 보더니 태블릿 화면을 빠른 손놀림으로 이리 저리 훑던 진주작가가 잠시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잠시 말 없이 나를 보던 그는 다시 화면안의 앱과 폴더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무언가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형은 이제 가."


진주 작가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유대표가 미팅에 계속 참여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조금 놀랐지만 유대표는 자신의 역할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듯 바로 일어나 벽에 걸린 외투를 걸쳐입었다.


"작가님, 유작가와 이야기 잘 나누시고요. 이제 두분이 마음 맞춰서 결과물만 잘 만드시면 됩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하지만 제 말도 잘 안듣는 녀석이니 저보다는 작가님이 혼도 내고 등짝도 한번씩 후려치면서 데리고 계셔 주세요. 절대 중간에 버리고 가시면 안됩니다!"


유대표는 말 안듣는 유치원생을 학원에 맡기고 가는 엄마처럼 나에게 당부인지 경고인지 모를 말을 하고 바로 사무실을 나갔다. 나는 들어올 때처럼 어버버하며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살짝 얼이 빠져서 그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여기 이거. 이걸 봤어요."


멍하게 있던 내게 진주작가가 내민 태블릿 화면에는 내가 보냈던 단편 소설이 띄워져 있었다.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그가 보여 준 내 소설은 대학 시절 썼던 소설이었다. 지금은 밥벌이 수단이 된 타로카드를 처음 배운 계기가 된 소설.


"주인공이 타로카드 리더더라구요. 마치 정신과 의사나 심리 상담가처럼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들에 대한 답을 타로카드로 찾아주고, 자기 자신도 성장을 하는. 뭐, 아주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인데...... 저는 마음에 들었어요."


진주작가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쳤다.


"어릴 적에 쓴 소설이라 그래요. 그때는 너무 이리저리 꼬아서 만든 이야기나 호흡이 하나로 쭉 긴 이야기보다 쉬엄 쉬엄 읽을 수 있는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거든요. 지금 보면 조금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웹툰이라는 형식에는 그런 단순한 구조의 이갸기가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그걸로 보냈어요."


나는 유작가처럼 노트를 손가락을 톡톡 치면서 말했다. 노트에 그 소설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는 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제스처를 따라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랬군요."


유작가가 나를 가만히 들여다 보는 게 느껴졌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건데, 그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하고, 말을 걸고는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계속 나를 관찰하는 것 같았다.


"타로를 원래 할 줄 알았던 건가요? 아니면 이 소설을 쓰면서 배우게 된 건가요?"


나도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의 호기심 어린 눈빛이 무엇인지, 나의 무엇을 관찰 중인 건지 나도 역시 관찰하고 싶어졌다.


"겸사 겸사, 배웠어요. 선배 중에 타로카드를 독학으로 배운 언니가 있었는데 레포트 몇개 대신 써주고 가르쳐 달라고 했어요. 그걸 소설의 소재로도 쓰고 싶었고, 배워 두면 써 먹을 곳이 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그럼 지금은 이 소설을 다시 쓰려고 하는 건가요?"


 "네......? 아니요. 일단 보내드린 건 완성된 것이었어요. 물론 이걸로 웹툰 작업을 하게 된다면 줄거리나 구성을 조금 손 봐야 하겠지만......"


진주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의 눈빛에 나는 말을 멈췄다.


"......"


기이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왜? 뭐가 문젠데?'라고 말했다.


"......그런데 왜,"


너무나 이상하다는 듯, 그가 말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눈빛으로 '뭐가?'라고 물었다.


"그런데 왜 지금도 타로카드를 보고 있죠? 소설은 이미 끝이 났는데."


나는 그제서야 진주의 얼굴이, 자기 외의 타인에게는 무심한듯한 표정이, 배려없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 눈빛을 어디선가 마주친적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내가 기억 저편의 안개숲에서 더듬거리며 그를 건져내는 동안 그는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헤어졌어요. 그 다음 날. 타로카드로 궁합을 보고 난 바로 그 다음 날."


나는 흐릿한 안개속에서 드디어 또렷한 한명의 얼굴과 상황을 낚아챘다. 심드렁한 남자와의 궁합에 한껏 두려움에 떨던 작은 새 같던 그 여자. 그를 잡고싶어하던, 그와의 관계를 절대 무너뜨리고싶어하지 않던 그 여자. 그 여자와 함께 왔던 그 남자였다.


"아......그 팔찌......?"


진주가 날카로운 눈빛을 풀고 픽하고 웃었다. 유대표와 비슷하게 눈꼬리가 휘어지며 부드러운 눈빛이 되었다. 유대표가 다소 능글맞은 느낌으로 주변 분위기를 가볍게 해주는 미소와 분위기를 가졌다면 그와 비슷한 눈매를 가진 유작가는 웃어야만 그런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처음부터 알아봤던 걸까?


"네, 그 팔찌. 타로카드를 보고 자리로 돌아가서 걔가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그 팔찌까지 잃어버려서 그날 하루종일 아주 칭얼거리는 게 대단했어요. 물론 저녁 때 다시 카페로 돌아가서 찾긴 했지만, 둘 다 기분을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었죠."


"......"


나는 갑작스러운 이별 고백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보다 우리가 구면이라는 사실이, 그가 과거 내 야망과 의욕이 가득 담긴 소설을 읽었고, 현재의 다소 초라하고 망가진 모습을 알고 있으며, 앞으로 계속 교류를 해야할 동료가 될 거라는 사실이 너무 당황스러웠다.

대체 언제부터 내가 나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어차피, 궁합같은 거 보지 않았어도 그렇게 될 줄 알았던 사이니까."


"......언제......언제부터 알았어요?"


나는 더듬 더듬 유대표가 앞에 놓아준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물었다.


"뭘요? 작가님이, 작가님인줄?"


"......네. 그렇죠."


"글쎄요. 보내 준 소설을 보면서 그 날 생각이 났고, 아까 처음 보면서는 긴가민가 했고, 얘기하면서 완전히 생각이 났어요. 그런데 그 소설을 다시 쓰려고 타로카드를 보는 게 아니에요?"


"아......."


"당황하게 하려던 건 아닌데. 당황하셨어요?"


"아......."


나는 뭐라 대답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커피를 홀짝였다. 진주는 그 상황이 재미있는 건지, 내가 당황한 모습이 즐거운 건지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날의 상황이나 에피소드로 보아 우리의 만남에 당황해야할 사람은 이 남자인데, 왜 내가 당황스러운 걸까?


"당황은 내가 해야하는 거 아니에요? 난 헤어진 여자친구랑 궁합까지 봤잖아요. 작가님 앞에서. 그리고 그날 엄청 정곡을 찔렸다고요."


"......"


진주는 내가 정곡을 찔렀다고 했지만 지금 정곡을 찔린 건 나였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내 면전에서. 내 여자친구에게."


"아니,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요."


나는 괜히 발끈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긴 했다. 그 여자가 생각하는 것 만큼, 이 남자가 그 여자를 생각하는 건 아니라고.


"뭐, 그 비슷하게 얘기했죠. 하지만 당연히 그동안의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그녀도 그렇게 느꼈을 거고, 저도 그랬고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아뇨. 차라리 잘 됐어요. 아니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네가 날 사랑하네 마네, 덜 사랑하네 더 하네 같이 답도 없는 얘기로 서로를 괴롭히고 있었을 거에요. 물론 그게 흔한 연애의 얼굴이긴 하지만."


진주가 짐짓 전문가 같은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나는 이 남자가 상당히 솔직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그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본인은 상처를 주기 위해 솔직한 것이 아니라 호기심이 많은 성격이라, 혹은 타인의 감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그렇다는 것도 알았다.

이런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감정적으로 얽히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될 것 없는 타입의 인간이다. 오히려 자신의 평판, 타인의 평가에 크게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괜한 예의를 차리거나 얘기를 빙빙 둘러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그 반대의 사람에게는 불편하고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역시나 감정적으로 얽히지만 않는다면 꽤나 쿨하고 합리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얽히지만 않는다면.






The Fool (바보): 새로운 시작, 순수한 열정, 인생의 여행이나 이동. 그러나 불안정한 현실로 무턱대고 새로운 시작을 해서는 안되고 절제와 계획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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