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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a Aug 02. 2024

나와의 차이





*[타로카드 읽는 가게]는 소설입니다. 모티브나 컨셉외의 모든 인물과 나오는 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
















나는 윤하선배가 주고 간 쪽지를 보며 전화를 거는 대신 문자를 써 보냈다. 전화를 걸어 본적도 없는 사람에게 '저는 누구고요, 누구에게 소개를 받았고요, 무슨 일을 한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하면 될까요?' 라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특히 '소개를 받은'이라는 말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내 팍팍하기 그지없는 인생에 영향력있는 누군가를 소개해주고 일거리를 가져다주는 나름의 뒷배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경이로운일이 아닐 수 없었으나 내 마음 아주 깊은 곳의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어려워했다. 창피하고, 말 그대로 '오글거렸다'.




안녕하세요, 신세련입니다.
하윤하님 남편분이신 황선규님께 소개를 받아 문자 드립니다.
스토리 작가를 구하신다고 하셔서요.
이력서나 면접이 필요하시면 말씀 해주세요.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메시지는 전날 밤 늦게 이미 써 놓았지만 보내기를 누른 건 아침 10시쯤이었다. 9시는 막 출근한 후거나 일과를 시작한 직후일테니  정신이 없을 것이고, 11시는 점심 시간이 코 앞이라 마음이 들떠 있을테니 적당한 시간이라 생각했다.

보내고 나서는 이 짧은 문자 안에서 혹시나 나의 글솜씨 같은 걸 엿보려하진 않을까 해서 별 내용도 없으면서 마음이 울렁였다. 선배가 처음 말을 꺼냈을 땐 조금 부담스럽고 어떻게 거절해야하나 싶었던 것이 사실은 진심이 아니었다는 듯 내 마음은 혼자 설레어 하고 있었다.


아직 몰라.

그냥 예의 상 소개해준다고 한 걸 수도 있어.

전화 했는데 이미 구했다고 할 수도 있어.

내 이력서를 받아보고 보잘 것 없다고 거절할 수도 있어.


문자를 보내기 전에도, 보내면서도, 그리고 보낸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내 마음 속 일말의 희망에 대해 계속 경고를 주고 자라나지 못하도록 억눌렀다. 그게 건강하지 못한 생각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싹을 틔우고 몸을 펼치기 시작한 희망을 잘라내고 뽑아내는 것 보다 이 편이 훨씬 쉽고 마음의 상처도 덜하기 때문이었다. 비겁해 보일지 몰라도 그게 지금까지 내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희망에 짓눌려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분명 나의 마음은 핸드폰 화면에 남아 있었지만 나는 절대 다시 쳐다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통해 시간도 보지 않았고, 인터넷 검색도 하지 않았다. 아예 휴대전화가 없는 것처럼 외투 주머니 안에 넣어두고 반나절을 지냈다. 어차피 나에게 급한 전화를 걸 사람도, 내가 급히 받아야할 전화도 없으니 잠시 휴대전화가 없는 채 산다해도 큰 일이 날리 없었다.

그렇게 겨울 해가 뉘엿 뉘엿 지려하던 늦은 오후 쯤, 경품 뽑기라도 하는 것처럼 벽에 걸어 놓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슬며시 전화기를 꺼냈다. 방망이질 치는 마음이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화면을 켜 보았다.


부재 중 (2)


...... 그리고 '안녕하세요' 로 시작 하는 메시지 하나의 미리보기가 보였다.


"뭘 그렇게 러브레터 몰래 보는 사람처럼 숨을 참고 봐?"


뒤에서 주인언니가 건네는 말에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다행히 전화기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요즘 이상해. 연애하나?"


언니의 촉은 좋으면서도 묘하게 적중률은 높지 않았다.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아니에요. 연애하면 꼭 먼저 말할게요."


"됐어. 그냥 내가 알아차리는 게 재밌지, 남이 연애한다는 얘기 전해 듣는 거 별로. 솔로 마음 짜증나."


언니는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자리를 떴다. 휴대전화의 비밀번호를 풀고 메시지를 눌렀다.




안녕하세요, 신세련 작가님
학교 다닐 때 함께 작가 준비를 하시던 후배분이시라고 형수님께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글을 너무 잘 쓰시고 재능도 많으신데 사정 상 잠시 쉬고 계신다고요.
일단 먼저 만나 뵙고, 웹툰 작가님과 미팅도 진행하면서
향후 진행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해 보았으면 합니다.

전화를 드렸으나 통화가 어려우신 것 같아 메시지를 먼저 보내드리오니
괜찮으시면 미팅 가능 일자를 회신 주시거나 전화를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유성환올림


천천히 쿵쾅이던 심장이 이제 좀 더 빠르게 콩쾅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계기가 될까? 나는 다시 글을 쓰게 될까? 나는 글을 쓰며 먹고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망상이 막을새도 없이 연기처럼 마음 속에 피어 올랐다. 지금은 전화를 걸어도 목소리가 염소처럼 덜덜거리며 나올 것 같아서 답장도 문자로 하기로 했다.







카페에서의 일은 휴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주인 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 나절 자리를 비우기로 하고 날짜를 잡았다. 갑작스레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우는지 상황설명을 해야했기에 그녀에게 미팅 얘기를 했더니 연애 시작했다는 얘길 듣는 것보다 더 잘됐다며 좋아해주었다. 남자 때문에 울고 웃는 것보다 하고 싶었던 일 하면서 돈 벌게 되었다는 얘기가 훨씬 꽃 노래 같이 들린다고 했다. 아직 하게 될지 아닐지도 모른다며 내 마음 속 희망의 싹을 꾹 밟았지만 '시작이 반이다'라는 그 말에 싹은 쏘옥-하고 머리를 내밀고야 말았다.

미팅 전날 밤에는 몇 벌 있지도 않은 옷들을 늘어 놓으며 어떤 것을 입어야 '작가'처럼 보일까 고민도 했다. 내가 가진 옷 중에 그럴싸해 보이는 건 30대가 된 기념이라며 생일선물로 윤주가 사주었던 얇은 가을 코트 하나, 그리고 윤하 선배가 자기 취향이 아니라 안 입는다며 준 검은색 긴팔 원피스 하나 뿐이었다. 모두 5~6년 전 것이라 낡은 티가 나긴 했다. 아껴입는다고 했지만 이 옷들이 생긴 후로 나는 모든 결혼식, 장례식, 그리고 그 외에 예의를 차려야할 모든 자리에 그 옷들을 입었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달달 떨면서도 그렇게 입었고 한 여름에는 원피스 팔을 걷어 올려가며 입었다.

간이 옷장을 아무리 뒤져도 누군가와 처음 만날 때 입을 만한 '정장'이라고는 그게 다였다. 그게 아니면 거의 매일 입는 무릎이 나온 낡은 청바지를 입을까, 얼마전 인터넷 타임세일로 올라왔길래 충동적으로 샀던 19900원짜리 슬랙스를 입을까, 허리가 고무줄인 긴 스커트를 입을까 고민했지만 마음에 드는 답이 없었다.

예쁘게는 아니어도 너무 후즐근하거나 볼품없어 보이고 싶지는 않은데 왜 나는 이런 날을 대비해서 싸지만 깔끔한 외출복 하나 준비하지 않았을까 울적했다.

결국 다음 날 나는 언제나처럼 윤하선배가 물려준 낡은 원피스에 윤주가 사주었던 가을 코트를 입고 집을 나섰다. 한 겨울의 칼바람은 내의를 껴입었어도 가을코트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목에 두른 두꺼운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중간 중간 빙판길에 넘어지지 않으려 종종걸음을 치며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어젯밤 옷을 고를 땐 생각도 못했는데, 땅만 보며 걸으니 구두가 새삼 눈에 들어왔다. 사귄지 3년되던 기념일에 윤주가 선물로 주었던 검은색 가죽 구두였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신발 중 유일한 구두였고, 이제 10년이 다 되어가는 구두이니 코트나 원피스보다도 더 오래되고 더 낡은티가 나는 것이었다.


"신발은 애인한테 선물하는 거 아니라던데?"


그 날 나는 내가 준비한 선물이 초라해서 괜히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윤주에게 쪼아댔다. 내가 준비한 선물은 20대 중반의 연인들이 주고 받기에는 유치한 손편지와 향초였다. 윤주는 그때 막 취업을 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적인 어른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기였고, 나는 학생이라는 방패를 잃고 작가지망생과 백수 사이를 위태롭게 오가던 시기였다.


"그럼 언제 신발을 사줄 수 있는 건데? 3년이나 사귀었으면 된 거 아니야?"


윤주가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거 신고 도망가면 어떡하려고?"


"갈거야?"


"아니, 그게 미신이잖아. 애인한테 신발 선물하면 그거 신고 다른 남자한테 간다고. 신발 선물했다가 내가 도망가면 어떡할 거냐고."


"미신이라며. 너 미신 탓 하면서 도망갈거야?"


"아! 됐어, 됐어."


나는 얘기가 안 통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제 그런 미신이 우리에겐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라는 것에, 윤주가 이제 우리의 관계를 신발을 사주어도 도망갈 우려가 없을 정도의 안정된 관계라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내심 기분이 좋았었다. 우리가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단지 겨우 3년만에 나는 우리는 영원히 단단할 것이라는 성급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후로 10년을 더 그와 사귀었지만, 나는 10개의 선물을 더 받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서로에게서 도망쳐버린, 탈옥수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꽁꽁 얼어붙은 발에 신겨진 그 구두는 처음의 그 반짝이던 빛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일이년간은 애지중지 소중히 여기며 시간 날 때마다 닦아주고, 물기라도 닿으면 신문지를 꽉꽉 채워 넣어 말려주고 했었지만 지금은 어딘가 잔뜩 찍혀 보푸라기가 일어난 듯 너덜너덜해진 앞코에 따각 따각 소리가 나는 닳은 굽을 한, 볼품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죽이 찍혀 벗겨진 부분에 매직을 콕콕 찍어 감추던 것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낡은 가죽의 색이 바래면서 오히려 티가 더 나는 듯 해서였다.

그리고 보면 윤주는 나에게 이런 선물을 잘 해주었다. 코트도 사주고, 구두도 사주고, 색이 너무 바래 지금은 버렸지만, 여름용 투피스도 사주었다. 그 후에는 지갑도 사주고, 우리의 마지막 기념일에는 가방도 사주었지만 그건 너무 과한 것 같아서 돌려 주었다. 하지만 언제나 기념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날이 되면 그는 어른으로서 꼭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들이 있어서 나는 어른이 가야할 여러 곳들을 예의를 차리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검은 색이었다. 그는 내가 그 선물들을 아주 오랫동안 써야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나에게 유일한 것이 될 것도 알았을 것이다. 핑크색의 원피스를 사주고 싶었지만 적어도 수년 간 있을 결혼식과 장례식과 친구들의 모임, 혹은 우리가 그렇게 기다렸던 작가상 시상식에 입고 가야할 옷임을 생각했을 것이고, 반짝이는 애나멜 구두를 사주고 싶었지만 그때 맞춰 신어야할 구두가 필요했을 것임을, 빨간 지갑을 사주고 싶었지만, 지갑이 두둑히 채워질 그 날까지 그 지갑이 내 손에 들려 있어야 할 것임도 알았을 것이다.

나도 핑크색의 샬랄라 원피스가, 반짝거리는 애나멜 구두가, 부자가 되게 해준다는 새빨간 지갑을 가지고 싶었지만, 그 마음을 알았기에 언제나 검은색인 그의 선물에 미약한 서글픔과 묵직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대표가 보내준 주소 속 3층짜리 작은 건물 앞에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이런 식의 미팅은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그냥 무작정 들어가서 제가 누굽니다. 왜 왔습니다. 라고 하면 되나, 아니면 지금 1층인데 들어가면 되나요, 하고 물어봐야하나 하는,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고민을 하다가 결국 전화를 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목소리를 듣게 된 대표는 밝은 목소리로 건물 전체가 모두 자신의 사무실이라며 2층으로 올라오면 된다고 했다. 굽이 닳아 드러난 못이 대리석 계단에 짜각짜각 울리는 소리가 민망하여 나는 뒷꿈치를 들고 까치발로 올라갔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기 전 유리문 옆에 붙어 있는 전신 거울에 슬쩍 나를 비춰보았다. 화려하거나 화사하지는 못해도 깔끔해 보였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너무 낡은 것들은 아무리 깨끗하게 빨고 닦아도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린지 얼마 되지 않아 밝고 젊고 세련되 보이는 이 사무실에 어울리지 않는 낡은 커튼 같은 모습이었다. 어디 찢어지거나 구멍난 곳은 없지만 이제 버려도 되는 그런 커튼.


"아, 작가님? 신작가님 맞으시죠? 어서 들어오세요!"


밖에서 망설이는 나를 발견한 대표가 유리문을 벌컥 열며 반겨주었다. 문이 열리는 순간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꽁꽁 얼어붙은 얼굴에 온기가 확 닿았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들어오라고 손짓하는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뚜르르르 - 울리는 전화벨 소리, 타닥타닥 치는 자판 소리, 지이이잉 - 하며 종이를 뱉어내는 복사기 소리가 거슬리지 않게 각자의 소음을 내며 따뜻한 사무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열명 남짓한 직원들은 바쁘다기 보다 적당히 자신의 일들을, 몫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대표는 복사를 하러 나왔다가 나를 발견했는지 손에 종이 뭉치를 몇장 들고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네요. 전달 드려야 할 내용들을 복사하고 있었거든요. 일단 회의실 안에 가 계시면 서류들 가지고 가겠습니다. 차는 어떤 걸 드릴까요? 커피나 녹차, 홍차도 있어요."


대표는 두 걸음 정도 앞서 나를 걸으며 반은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홍차요.' 라고 대답하고 그를 따라 안내 받은 작은 회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손으로 가리킨 의자에 앉았다. 대표가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가자 부드러운 소음들도 함께 멈췄다. 사무용 책상과 의자가 가득 찬 작은 회의실안에는 정적과 나, 둘 뿐이었다.

아무도 없었음에도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가방에서 노트와 볼펜을 꺼내어 책상위에 올려 놓았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마구잡이로 적어두던 막노트였다. 늘 가방 안에 넣어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언갈 적고, 또 찾아보던 노트였으나 마지막으로 펼쳐본 것은 6개월도 훨씬 전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무엇을 적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젯밤 뭔가 메모할 것을 챙겨가야겠다고 생각하고선 꺼냈으나 차마 펴보지는 못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다시 문이 벌컥 열리고, 자잘한 소음과, 경쾌한 대표의 목소리가 함께 들어왔다. 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는데 그가 인자하게 웃으며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잘 나가는 웹툰 작가진을 매니지먼트 하고 있다고 하지만 자리가 잡히기 전엔 신생 회사의 대표치고는 여유로워 보였다. 윤하 선배의 남편과 동창이라니 그 역시 여유로운 집 자제일 것이다. 자신의 꿈 외엔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는 삶을 살아 온 사람들은 이룬 것이 없어도 초조해 보이거나 쫒기는 기색이 없다. 나와는 다르게.

그는 한 손에 들고온 종이컵을 내 앞에 내려 놓고 다른 한 손에 있는 서류는 자신의 앞에 내려 놓았다.


"아......먼저...... 들으셨겠지만, 저희가 유진주 작가의 신작을 준비하면서 전작에서 유작가가 아쉬워했던 스토리라인을 보강하고자 전문 작가분을 찾고 있습니다."


"아, 네."


"이것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작가의 전작이 꽤 흥행됐어요. 혹시 보셨어요?"


"아...... 아직이요."


"웹툰을 즐겨보시지 않으면 모르실 수 있죠."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대표는 걱정말라는 듯 눈 웃음을 보여주었다.


"기존의 타겟층을 공략하면서 전작과 비슷한 수준의 흥행을 바란다면 유작가가 스토리를 써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희 회사에서는 이 컨텐츠를 웹툰으로만 두고 싶지 않거든요. 앞으로 드라마나 영화와 같은 영상매체로도 넓히고 싶어요. 그래서 저희가 웹툰 작가를 매니징 하고 있는 거고요. 웹툰이 최종 컨텐츠가 아니라 시장성을 보는 1차 컨텐츠인 셈입니다. 유작가는 아직 완결 작품이 두편 밖에는 되지 않는 신인축에 끼지만 데뷔 후부터 지금까지 조금씩 팬층을 넓혀오고 있고 또 앞으로 더 발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저희 회사에서도 밀어주려고 하고 있어요."


"아, 네."


"그러다 보니 스토리 쪽에 도움을 받을만한 전문 작가님이 필요했습니다. 스토리만 따로, 작화만 따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유작가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할 작가님이요."


"네."


"저희가 찾기도 하고, 주변 분들께 소개를 받아서 몇몇 작가님들을 만나 봤습니다. 작가님 포함이요."


"아, 네, 네."


나는 목이 타서 홍차를 한 입 마셨다. 여기서도 경쟁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물론 작가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작가와 서로 함께 작업을 해야하니 작품의 성격이나 개인적 성향이 서로 잘 맞을지, 저희도 파악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내 마음을 읽은 듯 대표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것도 들어셨는지 모르겠지만 유작가는 제 동생입니다. 친동생."


대표가 빙긋이 미소지었다.


유성환, 유진주.

그렇군.


"처음에는 웹툰 그린다고 집에서 부모님 반대가 많았어요. 노인 양반들이 웹툰에 대해 뭘 알겠습니까. 그런 거 하면 다 굶어 죽는 거 아닌가, 그러셨던 거죠. 그런데 처음부터 생각보다 잘 되어서 현재는 오히려 제가 사업적으로 동생 덕을 보는 셈이죠. 주변 친구분들의 손주들이 유작가의 작품을 봤다고, 좋아한다고 하는 얘기를 듣고 부모님도 이제는 마음을 놓으셨고요. 유작가가 저희 집안 늦둥이거든요."


대표가 민망한지 아하하 소리내어 웃었고 나 역시 아무 감정 없이 예의상 그를 따라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진주는 참 좋은 오빠를 두었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진주가 조금 부러웠다.


"다른 작가님들은 이미 다른 웹툰 작가와 작업한 결과물이 있거나 발표한 작품들이 있으셔서 그것으로 참고를 했는데 신작가님은 아직 등단 전이시라 들어서 메일로 작품 제출을 요청 드렸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저녁, 방문 전 그 간 써두었던 단편 중 몇 편을 뽑아 메일로 보내주었다.


"아직 유작가가 확인은 못했어요. 오늘까지 마감해야할 작업이 있다고 했으니 지금은 밤을 새고 뻗어있을 거에요. 내일 중 확인할 것 같습니다."


"네."


나는 꺼내 놓은 노트 표지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미팅에서 내가 이 노트를 펴 볼일이 있을까?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불렀을까?


"같이 일한다는 사람도 없고, 다른 후보 작가들과 저울질 하면서 왜 날 추운데 굳이 여기까지 오라고 했을까 궁금하시겠죠?"


대표가 여전히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채 정곡을 찔렀다.


"유진주 작가가 성격이 그렇게 사교적이질 않아요, 예민하다면 예민하고, 괴팍하다면 괴팍하고, 무심하다면 또 무심하죠. 뭐 독특해요. 늦둥이라 더 신경써서 예의바르게 키웠다고 하는데 어떨 때 보면 아주 시건방지거든요. 똑같이 예민하면서 괴팍하고, 무심한 사람이면 함께 일하기 어려울 거에요. 제 동생이니 제가 제일 잘 알죠. 괜히 안 맞는 사람 둘을 붙여놓고 파국이 되는 걸 보느니 제가 먼저 만나서 두 분이 잘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프로젝트가 망하면 손해는 대표인 제가 보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표는 또 하하하 소리내어 웃었다. 나도 다시 빙긋 웃었다.


"작가님들 실력이야 다 좋겠죠. 그건 유작가가 판단할 몫이기도 하고요.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그냥 작가님들과 유작가의 궁합을 본달까요? 뭐 그런 역할입니다."


자존심을 버리자. 나는 지금 베스트 셀러 작가로 여기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간택되길 바라며 정안수 앞에 두고 빌고 있는 후궁 후보같은 거니까. 그놈의 궁합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표의 눈에 우리가 잘 맞을 것처럼 보이도록, 그런 표정을 짓자.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유작가가 신작가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립니다. 아직 서른도 안됐어요. 지금까지 만난 후보 작가님들은 유작가보다도 나이가 어렸고요. 솔직히 얘기하면 저는 나이가 많으신 분이 옆에서 마감도 닥달하고 게으름 못피우게 쪼기도 하고 그러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냥 서글서글한 인상에, 말투를 보고 막연히 좋은 사람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남의 단점을 쿡쿡 찌르는 사람이었다. 아니면 이것도 나의 피해의식 같은 걸까? 혹은 일부러 자존심을 상하게 해서 성격의 바닥을 본다는 압박면접 같은 걸까? 아르바이트 말고는 한번도 취업활동을 해본 적 없던 나는 이런 저런 생각만 하다가 다시 차를 한 입 꿀꺽 마셨다.


"특별히 자신이 있는 장르의 글이나 자신 없는 장르가 있으실까요?"


그가 물었다.


"글쎄요. 자신이 있는 장르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없는 장르는 있어요. SF나 환타지 쪽이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유작가의 바로 전 작이 SF였어요."


나는 뜨끔했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런 쪽은 유작가가 잘 해요. 오히려 로맨스 쪽이 약하죠. 그녀석이 연애도 꽤 많이 해 본 거 같은데 로맨틱한 이야기는 잘 못쓰더라구요."


대표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후속작의 장르는 아직 정하지 않았고, 아마 작가님이 정해지면 유작가와의 협의를 통해 결정하게 될텐데 저는 로맨스 쪽 장르를 선호합니다. 아무래도 영상물로 제작할 때 특수 장르 대비 제작비나 흥행에 대한 부담이 덜하니까요. 잘 되면 저희가 제작사로 참여할 수도 있거든요."


유대표는 오빠모드와 대표모드를 자유롭게 오가며 나와의 면접을 이어갔다. 한 시간여의 면접시간 동안 나는 본래는 엔터테인먼트사를 운영하던 대표가 과거에는 집안의 유일한 반항아였으나 현재는 어쩌다 보니 잘나가게된 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 아예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한번도 집안 사람들에게 골치 덩어리가 된적이 없었다. 내가 사고를 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집안 사람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뭔가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어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우리 집안의 가장이었고, 그들은 내가 사고를 치든 말든, 내면적 고뇌가 있든 말든, 어떤 꿈을 꾸든 말든, 방세만 내고 냉장고만 채워넣으면 되었다.


나라고 다를 게 있었을까?


나 역시 내 동생들이 사고를 치든 말든, 사춘기가 왔든 말든, 내가 학교 불려 다닐 일만 없고 옥바라지만 안할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건 그저 너희들 입에 밥을 넣어주는 것 뿐. 지금은 그 마저도 너무 버거워 도망쳐 나왔지만.

대표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야기에 간간히 맞장구도 치고, 대꾸도 했지만 그가 가족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면서부터 나는 거기에 없었다. 대표는 진주를 반항아, 또는 자신의 집안에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문제아처럼 묘사했지만 나는 그 속에서 진주에 대한 가족들의 관심과 애정을 느꼈다. 버겁게.

그리고 자꾸만 나의 가족을, 나의 동생을, 그리고 나를 그의 이야기 속 가족들과 비교하며 조금씩 우울해지고 있었다.








Five of Swords (다섯개의 칼) 자신감의 하락. 주변 상황이나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자신감이 떨어지고 위축된 상태이다. 상대방이 내게 마음이 있어도 마음을 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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