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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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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혜정 maya

*소설 '발레리나' 속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옆집의 목련나무에 맺힌 봉오리들을 보며 굳은 몸을 풀던 그 날, 옆집과 대조적으로 휑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집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잔디밭은 이미 대부분이 누렇게 죽어 푸석푸석했고, 일년초들을 심는 꽃밭은 겨우내 얼어죽은 식물의 잔해들로 지저분했다. 아직은 한번씩 눈발이 날리는 시기지만 이제 슬슬 그녀의 마당도 봄의 무언가로 채워야할 때가 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무엇을 채워야할까. 무슨 꽃을 심어 다가올 봄을 준비할까.


"개나리 어때?"


저녁을 먹으며 올해에는 무슨 꽃을 심어볼까 의논을 하는데 준석이 개나리를 제안했다. 보통은 한해를 살며 꽃을 피우고 겨우내 얼어죽는, 그 다음해에는 새로 심어야 하는 꽃들을 주로 심었던 예주는 왜냐고 물었다. 매년 새로운 꽃들을 다양하게 볼 수 있어서 좋다고 그녀의 의견에 찬성했던 그였다.


"우리 울타리가 너무 낮아서 집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더라고. 담을 높이 쌓는 것 보다 개나리를 심어서 개나리 덩굴로 울타리를 높이면 좋잖아. 봄 되면 꽃도 예쁘게 피니까 더 좋고."


"그럼 매년 때때로 가지치기도 해야 하고 그럴텐데? 자기 가지치기 할줄알아?"


작고 아담한 마당이 울창한 개나리 덩굴로 가득차지 않을까하는 걱정에 예주는 슬쩍 준석을 떠봤다.


"가지치기야 뭐 대충 삐죽삐죽하고 복잡할 때 잘라주는 거지. 별 거 있겠어? 인터넷에 찾아보면 알려줄거고. 꽃 말고 나무를 심어 놓으면 크게 신경 쓸 것도 없잖아? 일년초들처럼 매년 새로 심어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년 내내 거기 그렇게 있으니까. 죽지도 않고,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거기에 있다고......

예주는 말없이 밥 한숟갈을 떠서 입안 가득 넣고 씹었다. 그러면 준석의 말에 대답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준석은 나무에도 수명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 아니, 준석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 나무도 죽는다는 걸.

단단하고, 딱딱하며 환경의 변화에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해 사람들은 과대평가를 하는 경향이 있다. 천년을 넘게 사는 나무도 있지만 기대수명 자체가 50년이 채 되지 않는 나무도 꽤 많다. 사람도 100년을 사는 세상에서 나무는 왜 거기에 늘 변함없이 머무르는 존재처럼 받들어질까?


"왜, 개나리 싫어?"


준석이 그녀를 슬쩍 보며 물었다. 예주는 고개를 저었다. 개나리가 싫은 게 아니라, 개나리에 거는 기대가 싫은 거지. 잘 알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거는 과한 기대가 부담스러운 거고.


"자기 나 사랑해?"


예주는 준석의 밥그릇에 가시를 발라낸 고등어 한 조각을 올려주며 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석이 예주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그럼. 사랑하지, 하고 대답했다.


"얼만큼?"


"엄청 많이."


예주가 발라내 준 것보다 더 큰 고등어 살점을 그녀의 밥그릇에 되돌려 주며 준석은 든든하게 대답했다.


"언제까지?"


이번에는 정말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말문이 막힌 준석이 대답대신 업,헙 하는 소리를 냈다. 예주는 드디어 그가 쉽게 대답하지 못할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 뿌듯했다.


"죽을 때까지라고 하면 너무 흔하지?"


준석이 예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던져준 새로운 질문에 맞는 창의적인 답변을 해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건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도 같았기에 예주는 대답보다도 뒤따른 준석의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





예주는 새로 등록을 하려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학원에 도착했다. 카운터에서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던 원장이 예주를 보고 박수까지 치며 그녀의 컴백을 반겨줬다. 원장은 다친 발목은 괜찮은지, 그동안 집에서 스트레칭은 꾸준히 했는지, 원래 다니던 레벨로 다시 등록을 할 건지 물었다. 예주는 쉬는 동안 아무런 운동도, 재활도 없이 그저 집순이로만 지냈음을 고백했다.


"그럼 예전 레벨로 그대로 등록해 드릴까요? 아니면 한 단계 낮은 레벨에서 한 달 정도 수업을 받아 보시겠어요?"


예주는 조금 망설이다가 이달만 기초반을 등록하기로 했다. 기초반에서는 체력이 없는 초보자들을 위해 한 30분 정도 매트를 깔고 하는 스트레칭과 근력운동을 다 함께 하지만 고급반은 워밍업 없이 바로 바 순서를 나가기 때문에 부담스러웠다. 바로 이것 때문에 기초반을 싫어했던 예주지만 두달만에 근육이 다 빠져버린 중년의 몸에겐 그 고난의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만에 돌아 온 학원의 댄스 스튜디오는 친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예주는 층고가 높은 교실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서 양말같은 발레슈즈를 신고 그 위로 긴 레그워머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렸다. 15분만 있으면 헉헉 대는 사람들의 숨소리와 청아한 피아노 선율로 가득 찰테지만, 지금은 가죽 바닥이 내는 사락 사락하는 마찰 소리와 발가락을 앞뒤로 꺾을 때마다 나는 발가락 뼈마디의 두두둑 하는 소리만이 넓고 텅 빈 공간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공허하다.

미리 펴 둔 매트 위에 앉아서 예주는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공허하고 막막하다. 그렇게나 열심히 발레에 빠져들었던 시간들이나, 수업 중 육체적 한계에 다달았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희열이 모두 완전히 지나간 옛일처럼 느껴졌다. 다시 발레를 시작한다고 해서 그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늘 수업에서 하는 동작들을 하나도 제대로 따라하지 못할 것 같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어버버 거리며 그냥 펄쩍거리다 나올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전, 처음 발레를 배울 때 느꼈던 기분이 문득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이건가? 저건가? 아니 이렇게인가? 오른발 왼발도 구분 못하는 유치원생처럼 굴었던 자신의 굴욕적인 모습, 그리고 순식간에 지나버린 60분. 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공주님 인사같은 레베랑스를 가르쳐 준 선생님이 이제 돌아가라고 했다. 끝났다고. 얼레벌레 허겁지겁 쫓기만 했는데, 끝이라고 했다.

이게 끝이라고?


"안녕하세요."


누군가 교실로 들어오며 수줍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예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수업 시간 간간이 지나치며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멍하니 있던 예주도 얼굴에 자동으로 미소를 띄고 인사를 했다. 학원에서 인사만 나눌 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는 사이였지만 오랜만에 마주친 익숙한 얼굴은 생각보다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안녕하세요."


간만에 보는 익숙한 얼굴이 예주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시간이 지날 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두들 짧고 가볍게 인사를 던졌다. 그 중에는 아는 얼굴도 있었고 처음 보는 얼굴도 있었다. 수업 시간에 임박하자 수강생들이 깔아 놓은 매트로 교실 안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싸늘하던 댄스홀의 공기에 드디어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예주는 오늘 수업을 망치더라도 혼자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폰듀에서 완전히 죽을 쑤면 누군가는 데가제를 죽쑤고, 또 누군가는 론데잠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프라페를 망쳐서 선생님께 공평하게 혼이 날 것 같은 기분.

어쩌면 누군가는 평소라면 싱글도 못 돌던 피루엣을 더블로 돌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를 부러운 눈으로 보며 박수를 쳐주면서도 나도 내일은 꼭 더블에 성공하고 말겠다는 승부욕에 불탈지도. 예주는 그녀를 둘러싼 익숙한 얼굴의 타인들이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몸을 푸는 것을 보며 그녀 안을 채우고 있던 공허가 조금씩 옅어지는 걸 느꼈다.




할 수 있겠다는 마음과는 별개로, 예주의 쉐네는 엉망이다 못해 못봐줄 정도였다. 어지럼증에 눈앞이 핑핑 도는 순간에도 그녀의 쉐네에 눈을 가리는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팽이처럼!"


잊고 있었던 선생님의 날타로운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쉐네 할 때는 이거 하나만 기억하세요. 한번에 180도씩 돌 때 축이 두 다리에 한번씩 옮겨가는 건 맞지만 무게중심의 이동이 뒤뚱뒤뚱 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돼요. 초보자라 중심을 빨리 옮길 수 없다고 생각하셔서 천천히 도는 것 같은데, 그러면 오히려 어려워요. 팽이는 천천히 돌 때보다 빨리 돌 때 오히려 반듯하게 서서 돌아가 잖아요. 속도가 느려지면 휘청이다가 엎어지고요. 허벅지 안쪽에 힘을 꽉 주고 풀업 확실하게 하고, 스팟! 스팟 하는 거 잊지 마세요. 오른쪽 다시!"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고 했던 선생님의 조언은 늘 그랬던 것처럼 설명이 끝날 때쯤엔 서너개로 늘어나 있었다. 제 생각에는 팽이처럼 핑핑 돌았다고 생각한 수강생들은 울렁이는 속을 꾹 누르며 다시 쉐네를 돌기 위해 교실 사선 끝에 줄을 섰다. 팽이처럼, 빠르게, 허벅지 안쪽에 힘 주고, 풀업 안 풀리게, 스팟 잊지 말고.

예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지적은 그 중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문득 12월 31일 생각이 났다. 별 생각 없이 멍하니 쳐다 보고 있던 TV속에서 보신각 종소리가 울리자 쇼를 진행하던 MC들은 호들갑스럽게 이제부터 새해라고 선언을 했다. 반짝이는 얼굴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연예인들을 보고 있자니 그녀도 무언가 반짝이는 새로운 목표나 계획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부터는 진짜 일찍 일어나야지, 영어 공부도 조금씩 시작해야지, 다이어트 해야지, 딱 5kg만.

그런데, 그게 정말 새로운 목표가 맞나?

어디 구석에 쳐박혀 있는 5년전 다이어리를 꺼내어 첫번째 페이지를 펼치면 똑같은 이야기가 적혀있을 것 같았다. 5년전이 뭐야, 한 20년전 다이어리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면 그 또한 비슷할 것이다. 지금보다 조금 더 바른 생활을 하고, 앞으로의 인생에 도움이 될만한 뭔가를 더 배우고, 보기좋은 몸매를 만드는 것.

새해 목표라는 걸 세우게 된 이후로 그것이 목표가 아닌적이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삶은 진행되고, 그녀는 서서히 늙어가는 중이지만 바뀐 것이 없어 보였다.


"잘 안돼죠? 당연히 안될 거에요. 저도 쉐네 한참 돌고나면 어지러워요. 그런데 몸의 축을 무너지지 않게 꽉 잡으면서 내가 가려는 방향을 향해 한 점을 딱 찍고, 돌기 직전부터 돌고난 직후 바로 바로 그 스팟을 탁, 탁 봐주는 거에요. 내가 어디로 가려고 했지? 다음은 어디지? 하면서요. 길을 잃지 않게. 어지러운 건 어쩔 수 없어요. 그건 그냥 두고 가야 할 곳만 보세요."


선생님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한 쉐네 시범을 보이고선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다시 설명했다. 자기도 어지럽다면서 그녀는 호흡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나도 저럴 수 있을까? 연습을 하면 정말 나아질까? 할 수 있을까?

스팟을 탁,

스팟을 탁.

돌고, 내 몸이 도착하기 전에 더 빠르게 고개를 돌려 갈 곳을 먼저 바라본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는다. 쓰러지지 않고, 덜 어지럽다. 아무리 스팟을 제대로 찍어도 수도 없이 뺑뺑 돌다보면 어지럽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럽지 않은 척 서 있을 수 있게 된다.

가야 할 곳만 본다. 내가 갈 곳만.

예주는, 아니 교실 안의 모든 이는 수많은 의심 속에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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