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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듀

Fondu

by 문혜정 maya

*소설 '발레리나' 속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처음에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그 다음에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아닌 줄 알았다.


"새댁!"


가만히 누군가를 부르던 목소리가 신경질적인 외침이 되고 나서야 예주는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누군가 애타게 찾는 그 새댁은 대체 어디에 있어서 자신을 부르는 줄도 모르나 싶어서.


"아유, 젊은 새댁이 왜 그렇게 못들어! 여기 좀 봐요."


낮은 나무 울타리로 나누어 놓은 옆집의 정원 한쪽에서 자신을 향해 손짓을 하는 할머니를 그제서야 발견한 예주는 그녀가 목놓아 불렀던 새댁이 자신임을 깨달았다.


"아, 예, 안녕하세요."


누군가 젊은 새댁이라 지칭하는 자신을 보고 비웃진 않을까 해서 빠르게 주위를 살폈으나 다행인지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그녀 만큼이나 집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옆집 할머니는 이렇게 한번씩 마주칠 때마다 예주를 새댁이라고 불렀다. 결혼한지는 벌써 꽤 됐는데 아이가 없으면 늙은 신부는 언제까지고 새댁이라고 부르는 건지, 할머니는 늘 그 민망한 호칭을 하면서도 태연했다.


"그 뭐냐, 여기 이 벚나무랑 감나무! 이거 가지치기를 했어야 했는데 못했어. 우리 할아버지랑 나랑 둘다 이제 늙어서 그런 걸 못해. 돈주고 해야하는데 그건 좀 아깝고."


할머니는 예주네 정원과 붙어 있는 쪽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언제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우람한 걸 보니 나무에 대해 아는 것 없는 예주가 보기에도 십수년은 넘었겠다 싶었다.


"봄에는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질 거고, 겨울에는 감나무 잎들이 또 우수수 떨어질거야."


할머니의 뜬금없는 나무타령에 예주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네에에,하며 말끝을 길게 늘이며 고개만 끄덕였다. 인테리어 공사를 할 때는 소음 때문에 집안에서 쉴 수가 없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었고, 이삿날엔 이사차가 골목을 온통 막고 있어서 드나들기 힘들다며 예주의 집까지 쫓아와 큰소리로 호통을 치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소소한 이야기를, 굳이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예주가 그녀가 이야기의 끝을 어떻게 끝맺을지 몰라 약간은 긴장을 하며 뒷이야기를 재촉하는 눈빛으로 할머니를 쳐다봤다. 네, 그래서요......? 그래서, 원하시는 것이......?


"그래도 봄엔 그 집에서도 흐드러진 벚꽃을 맘껏 구경할 수 있잖아. 남들은 여의도니, 진해니 뭐니 꽃구경하러 간다는데 베란다만 내다보면 되니까."


할머니는 역시나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예주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예주는 벚꽃놀이 시켜주는 값이라도 내라는 건가 싶어 아무 소리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까지 비상식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만약 그런 비슷한 소리라도 하면 오늘 저녁 준석과 이 골치아픈 이웃에 대한 긴급 대책 회의가 필요할 것 같았다.


"감나무도 그래! 많진 않아도 심심찮게 감이 열리잖아. 그걸 하나 둘 따 먹는 재미가 있다구. 우리 할아버지가 다른 건 몰라도 이 감나무에는 일년에 두번씩 거름을 사다 뿌려주니까 다른 집들보다 감도 서너배는 더 열리고. 새댁도 알잖수? 워낙 오래된 나무라 그집 마당까지 가지가 넘어가니까......"


예주는 할머니의 시선이 가는 쪽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2층집 높이쯤 되는 튼실한 감나무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아름드리 감나무는 낮은 담장 위로 거침없이 가지를 뻗어 예주의 정원 쪽으로 1/3 정도는 넘어와 있었다.


"그러니까, 그 쪽으로 넘어간 건 새댁이 쪄먹든, 구워먹든 상관 안할게. 대신 우리가 관리를 못해도 이해를 좀 해줘요."


할머니는 '알겠죠?'하고 묻더니 예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휙 돌아 집으로 총총 들어가버렸다. 예주는 벙찐 표정으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옆집 마당과의 경계에 걸쳐있는 벚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 보며 그 아래서 한참을 이리 저리 걸어보았다. 천천히 봄이 오고 있었지만 커다란 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아래 쪽은 여전히 서늘했다. 아직은 겨울티를 다 벗지 못해 잎도 변변치 않은 나무들인데도 그랬다.

어쩐지.

정원에 꽃들을 심을 때, 다른 곳들보다도 이 울타리 아래 심던 꽃들이 이상하게 금방 시들거나 시들시들하게 자라곤 했다. 우리집, 우리 마당에 있지 않은 무언가가 내 정원의 꽃들에게 영향을 미친단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 정도의 온도 차, 이 정도의 그늘이라면 그럴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해볼 생각을 못하고 늘 비료를 안줘서 그런가, 땅이 문젠가 고민했을까.

문제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었다. 스스로 만들지 않아도 생길 수 있고, 원인은 모른채 답답해 하는 순간이 있을 수도, 갑작스레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이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다. 내 노력이나 좌절과는 상관 없이. 의지가 아니라 흐름으로 존재하는 문제들이 있다는 걸 예주는 갑자기 깨달았다.


"저, 이거 가져다 먹어요."


집으로 들어갔던 할머니가 어느새 다시 나무 곁으로 다가와 울타리 위로 바구니 하나를 쑥 내밀며 말했다. 바구니 안에는 냉이와 달래가 들어있었다. 예주가 이게 뭐냐는 얼굴로 받지는 않고 쳐다만 보고 있으니 할머니는 답답하다는 듯 예주의 품에 바구니를 밀어넣듯 안겨주었다.


"새댁이래두, 어떻게 먹는지는 알지? 냉이는 된장국 끓여먹고, 달래는 종종 썰어서 양념장으로 만들어서 꼬막을 무쳐먹든, 참기름 듬뿍 넣어서 밥을 비벼먹든 하면 돼."


그녀는 이 정도면 할일을 다했다는 듯 다시 서둘러 몸을 돌렸다. 예주는 또 멍하니 서서 바구니를 든채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할머니를 불러세웠다.


"할머니!"


할머니는 예주가 자신을 붙잡을 줄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으로 깜짝 놀라며 예주를 돌아봤다. 예주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여기 오래 사셨죠?"


이번에는 할머니가 아까 예주처럼 멍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했다. 뭘 물어볼지 모르겠다는 듯, 그 질문이 당황스러운 것이면 어쩌나 하는 얼굴이었다.




준석은 예주가 야심차게 내놓은 냉이 된장국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눈치였다.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자연스럽게 변한다고는 하는데, 준석의 입맛은 여전히 중고생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초등학생이 아닌 게 어디냐 싶었지만 그럼에도 예주는 남편이 냉이 향이 폴폴 나는 그 봄의 된장국을 좀 더 적극적으로 즐겨주길 바랐다.


"맛이 없어?"


"아니이. 맛있지 왜 맛이 없어."


"근데 왜 팍팍 안 먹고 그렇게 깨작거려?"


"그냥 나는 향이 강한 게 좀 어렵네."


그는 '맛없다'는 말 대신 '어렵다'는 말을 골랐다.


"어디서 난 거야? 샀어?"


준석이 젓가락으로 된장국에 들어있던 냉이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곤 예주에게 보란 듯 왕 베어물었다. 우적우적 씹는 모습이 누가 봐도 억지로 먹는것 같아 보였지만 그래도 찡그린다거나 도로 뱉어내진 않았다.


"옆집 할머니가 줬어."


"웬 옆집 할머니?"


"몰라. 학원 다녀오는데 갑자기 불러 세우더니 가지치기 어쩌고 하다가 미안했는지 주더라고. 달래도 줬는데 그건 내일 꼬막 사다가 달래장에 무쳐줄게. 그건 먹을거지?"


준석이 예주가 준 걸 언젠 안 먹었냐면서 눈을 흘겼다. 예주는 키득거리며 남편 쪽으로 구워놓은 스팸 접시를 밀어주었다. 네 노력을 높이산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더 먹지 말고 먹고 싶은 걸 먹어도 좋다는 사인이기도 했다. 준석의 반색하는 얼굴을 보며 예주는 낮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나이가 들어 더는 가지치기를 못한다는 노부부의 이야기며, 벚나무나 감나무의 소유권 일부를 일시적으로 양도 받은 이야기같은 것.


"오성과 한음 같은 얘기네."


케챱에 스팸을 쿡 찍어 먹으며 준석이 한마디 거들었다.


"그 반대지. 오성은 몸통이 주인이므로 가지가 옆집으로 넘어가도 소유권은 몸통이 있는 곧에 있다고 했는데, 할머니는 몸통은 자기 집에 있어도 우리집 쪽으로 넘어 온 건 우리가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까."


예주가 바로 잡았다. 남편은 네에, 네에, 사모님 말씀이 무조건 옳습니다,라고 놀렸지만 예주는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에게는 그보다 더 큰 이야기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을 하다보니 입술이 간질간질 했다. 웃음이 슬쩍 삐져나오기도 했다.


"뭔데 그래?"


준석이 예주의 눈치를 보면서 물었다. 누가 봐도 예주는 신이나 보였다. 조금 들떠 보이기도 했다.


"우리 아파트로 이사 안가도 돼."


예주는 결국 결론부터 꺼냈다.


"그 남자 여기서 죽은 거 아니래."


국 한 수저를 뜨던 준석은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꿈뻑거리며 예주를 쳐다봤다. 예주는 더 말을 붙이지 않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남편의 눈빛을 받아냈다. 수저를 든 채 가만히 멈춰있던 준석의 눈빛에서 한순간 흐릿함이 확 걷혔다.


"아, 그......?"


"어, 그 남자."


예주가 생글생글 웃었다. 준석은 못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국을 마저 떠 먹었다. 그 남자야 살아있음 어떻고, 죽었음 어떠랴. 그는 그저 이 찜찜한 상황에서, 왠지 모를 불안한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건 뿐이었다.

반면 예주는 무언가와 줄곳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게 자신도 모르는, 저 높은 곳에 있는, 아니면 불길한 어떤 것이 자신을 밀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걸 알아낸 표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이 든듯 했다.


"그럼 뭐가 어떻게 된거래?"


"아무것도. 그냥 애기가 죽고 부부가 매일같이 소리지르고 뭘 막 부수고 엄청 싸우더래. 할머니 말론 자기가 가서 몇번이고 뭐라고 하려다가 애기가 죽은 집에 모진 소릴 할 순 없어서 어디까지 가나 두고 봤는데 어느 날 여자가 나가고, 그 다음엔 남자가 나가고."


"그리고?"


"그리고 나선 빈집으로 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던데? 귀신 나올 것 같이."


"그래서?"


"할머니가 또 구청인지 어딘지 계속 흉물스럽다고 신고를 했대. 집에까진 아니어도 밤이 되면 노숙자나 불량 청소년 같은 애들이 마당에 들어와서 자고, 담배피우고 그랬나 봐."


"그런데?"


"그게 끝이야. 빈집이 되고 몇달 후에 둘 중 누가 불렀는지 청소 회사에서 와서 청소 싹 하더니 종종 부동산에서 사람들이 와서 집을 보고 가고 하다가 우리가 온 거래. 할머니 말로는 경매로 나온 걸 산 사람이 그런 거 같대."


예주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더이상 들려줄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었다. 준석도 별 뜻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이제 이사 얘기 하기 없기야?"


다 먹는 접시를 걷으며 예주가 말했다. 준석은 에흐,하고 한숨을 내 쉬고 장난스럽게 예주를 흘겨봤다. 저 고집을 누가 꺾어.


"벚나무랑 감나무 아래에 야외용 테이블 같은 거나 하나 가져다 놓자. 나중에 날 따뜻해지면 그 아래서 벚꽃놀이도 하고, 브런치도 먹고 하게."


준석은 핸드폰으로 정원용 테이블과 의자를 검색하며 말했다. 고집을 꺾기 어렵다면 그 고집에 맞춰 제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예주의 남편으로서 터득한 준석의 방식이었다. 끈적하게 가라앉다가 다시 꼿꼿하게 떠오르는 폰듀처럼 가라앉는 예주를 끌어올리는 것도, 일어선 그녀가 다시 휘청이지 않도록 지탱하는 것도 모두 그의 몫임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그 반대의 경우가 온다 해도 예주가 그의 기둥다리가 되어주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다. 그럼 됐지 뭐, 준석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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