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rouette
*소설 '발레리나' 속 모든 에피소드와 인물은 허구입니다.
예주는 헛소문이 퍼지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나중에 가면 실체가 없이 흐물흐물하게 변하는 이상한 소문일지라도 처음에는 모두 진실에서 시작한다. 물론 그 진실한 시작이 종착지에 이를 때 쯤엔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이가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남편이 주문한 정원용 가구들은 다음주쯤 도착한다고 했다. 가장 찝찝하게 여기던 의혹이 풀리자마자 그는 찝찝하다고 칭얼댔던 것에 비해 너무나 가벼운 태도로 콧노래를 부르며 정원 가꾸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집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정원 때문이었던 예주와 다르게 그 정원을 가꾸는 것이 번거로운 일이 될까 싶어 꺼려했던 그였다. 그냥 뭔가를 마구 사들이고 싶은 마음에 눈에 불을 켜고 살걸 찾던 그의 눈에 우연히 봄과 정원이 들킨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뭐가 됐든 끝이 좋으면 좋은 거니까. 셰익스피어가 말했잖아. 그렇다고.
"어쨌든 기분 나쁜 소문이었지만 그덕에 우리가 집을 싸게 살 수 있었던 거 아냐?"
이사는 없다는 선언과 함께 예주가 좋은 끝을 위해 마무리 대사를 했다. 끝까지 따지고 보면 그 덕은 하나의 아이가 죽은 그 시점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게 맞지만, 그런 생각은 애써 지워버렸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그냥, 타이밍이었다. 그렇잖아. 살면서 모든 걸 의도할 순 없어. 모든 상황을 만들거나 통제할 수도 없지.
"피루엣을 돌 때 말이에요. 여러분들은 생각이 너무 많아요. 두바퀴 돌아야지, 세바퀴 돌아야지, 밸런스를 유지해야지, 빨리 팔을 돌려야지, 완벽한 턴을 완성해야지......맞아요. 다 맞는 말이에요. 근데 턴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거에요. 오늘 몇바퀴를 돌 수 있을지, 끝까지 클린하게 돌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건 프로 발레리나도 몰라요."
선생님은 동시에 시작한 피루엣을 한 바퀴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여기 저기 처참히 무너져 버린 수강생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누군가는 오른쪽으로, 누군가는 왼쪽으로, 또 누군가는 앞이나 뒤로 균형을 잃은 채 와르르 쓰러졌다. 돌기 전 선생님이 풀업을 절대 유지하라고 했으나 소용없었다. 말을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여러분이 턴을 돌 때 생각해야 할 것은 업을 선 채로 파세를 최대한 오랫동안 서 있는 거에요. 그냥 서 있는 거! 돌거나 돌리지 말고 그냥 파세를 풀지 않고 계속 서 있겠다는 것만 생각하면 턴은 저절로 돌아가요. 돌리려고 의식하는 순간 풀업도 풀리고 골반 정렬도 흐트러지고 힘도 없어서 몸이 날아가는 거라구요."
예상치 못한 공격에 넘어진 노병들처럼 수강생들은 굳은 얼굴로 분연히 일어나 다시 피루엣을 돌기 위한 포즈를 취했다.
"제발 뭘 하려고 하지 마세요. 피루엣은 뭐다?"
"......하늘이 내려준다."
선생님의 채근에 서너명이 감정없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작게 대답했다.
"우리는 뭘 해야 한다?"
학생들의 풀죽은 목소리와 다르게 선생님의 목소리는 높고 활기찼다.
"그대로 서 있는다."
"네, 맞아요. 그대로 서 있는다. 한 쪽 다리를 떼는 순간부터 남은 다리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팔을 돌리고, 몸이 돌아가고, 스팟을 위해 고개를 휙 돌려도 기둥 다리는 그저 꼿꼿하게! 무너질 것 같으면 차라리 콩콩 뛰세요. 조금 콩콩 뛰더라도 다시 풀업, 턴아웃 잡고 그 자리에서 마지막 포즈까지 마무리 하세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날아가는 게 최악이에요."
풀죽은 학생들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앙 다물었다. 이번엔 해내리라, 다짐하는 표정들이었다.
"여러분, 턴은 하늘이 내리는 거라고요. 입술 깨물지 말고 그냥, 서세요."
선생님은 아직도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학생들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언가 깨달은 듯 했던 학생들의 얼굴은 다시 의문 투성이가 되었다. 돌긴 돌되, 돌리지 않는다. 돌긴 돌되, 옆이 아니라 위로 선다. 돌긴 돌되, 마지막까지 서 있는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말아라. 그저 평온하게 있어라. 그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까.
도를 닦는 건지 춤을 추는 건지, 선생님의 주문 사항은 늘 마지막에 가서는 도사님과의 선문답처럼 끝이 났다. 발레는 예주에게 운동이고, 수련이며, 철학이고, 동시에 가르침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무언가였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가 난무하고(나중에서야 그게 불어라는 걸 알게 됐다), 선생님과 비슷해 보이게 동작을 따라해도 늘 틀렸다는 지적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힘도 별로 들지 않았다.
무릎을 구부렸다 펴기, 발끝을 뾰족하게 만들기, 팔을 들었다 내리기 같은 것들을 정신 없이 따라하다보면 한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오늘은 뭘했더라?하고 떠올려봐도 한 1년 정도까지는 '모르겠는데?'라고 대답할 수 밖엔 없었다.
그러다 어느날, 어느 순간 땀이 터졌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그건 '터졌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당연히 운동이니까 수업이 끝나고 나면 조금은 땀이 났지만 그 전까지의 땀이 '났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였다면 그 날의 땀은 누가봐도 터져버린 정도였다. 등과 가슴이 흘러내린 땀으로 온통 번들거렸고, 배에서 옆구리쪽으로 흐른 땀은 둥글고 길게 레오타드에 땀자국을 남겼다. 그 뿐 아니라 두피에서부터 뿜어져 나온 땀이 단정하게 틀어올린 머리를 방금 감고 나온 것처럼 축축하게 만들었다. 수업이 끝날 때 쯤엔 힘이 들어서 잠시 허리를 숙인채 무릎을 짚고 있다 일어났더니 턱끝에서 떨어진 땀방울이 바닥에 방울방울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그날부터였다. 발레가 그녀에게 곧 삶이 되었던 것은.
남편은 예주에게 '만물 발레설'을 주장하는 사이비라고 놀릴 때도 있었다. 어느날 그가 몸이 좀 찌뿌둥하다고 하면 '발레해 볼래?'라고 묻고, 또 어느날은 거울을 보니 나이가 드는 티가 난다고 투덜거리면 '발레를 해봐'라고 조언했다. 가끔 울적하다고 해도 '발레를 하면 안그래'라고 했다. 어떨 땐 근육통에 시달리는 자신을 향해 '발레를 좀 더 해야겠다'고 하거나 '그동안 발레수업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보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러니 발목부상으로 발레를 잠시 쉬던 그 순간들이 그녀에게는 얼마나 괴로운 순간이었겠는가.
예주는 그날 아침 수업을 가기 전 발레 가방을 싸며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다. 맞아. 이런 기분이었지, 이런 기대였지?하는 생각에 이것 저것 가방에 집어 넣었다. 매트 운동을 할때는 이런 워머를 걸치고, 바를 시작하면 이 슈러그를 걸치고, 센터를 시작하면 이 스커트를 둘러야겠다, 시뮬레이션도 돌렸다. 오랜만에 모든 걱정 근심이 사라진 듯 했다. 정말 오랜만에.
찜찜한 것도 없고, 고민해야할 것도 없고, 반드시 해결해야할 것도 없이 그저 최선만 다하면 되는 그런 순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가방을 둘러메는 주인을 보며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강아지가 칭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럴때면 찰랑이는 강아지가 아니라 어린아이 같았는데, 예주는 그 소리에 미안함이 들었지만 강아지에게 강아지의 삶이 있는 것처럼 그녀에겐 그녀가 살아야 하는 삶과 시간이 있었다. 찰랑이의 귀뒷부분부터 목덜미 깊은 곳까지 벅벅 문지르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미안, 다녀와서 산책 나가자'라고 속삭였다. '산책'이라는 말을 알아들은 찰랑이가 똘똘한 유치원생처럼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 거렸다. '간식 주고 갈게'라고 했더니 입이 양쪽으로 헬쭉 벌어지더니 헥헥 소리를 내며 웃었다.
수업이 끝나고 댄스홀 밖으로 나와 이마 앞에 발레타올을 펼치고 머리를 털었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맺혀있던 땀방울들이 후두두 떨어져 작은 핑크빛 수건에 스며들었다. 예주는 그대로 수건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축축한 이마에서 보송한 천으로 부드럽게 수분이 옮겨가는 것이 느껴졌다.
복도에서 내려다 보이는 큰 창 밖으로 작은 새싹들을 조금씩 올려보내고 있는 가로수들과 여전히 어두운 겨울 외투 속에 고개를 푹 넣고 땅만보며 걷는 사람들이 대비되어 보였다. 이제 곧 그녀도 그런 무리 속의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봄이 왔는데 나무와 풀들 말고는 아직 봄 같지가 않았다.
"예주님,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땀에 절은 레오타드 위에 맨투맨 티셔츠를 뒤집어 쓰는데 누군가 그녀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돌아보니 원장이었다. 예주는 순간 이번달 수업료 결제를 안했나 싶어 급히 기억을 더듬었으나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와서 등록을 했던 게 생각 났다. 그녀에게 컴백을 축하한다던 원장의 얼굴도 생각났다. 아무렴, 내가 그런 걸 잊어버릴 사람은 아니지 싶었다가, 또 금새 의아해졌다.
뭘까. 원장이 '잠깐 얘기 좀' 하자고 할만한 거리가.
예주는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선 그녀의 뒤를 따라 원장실로 들어갔다. 늘 입구에 있는 카운터앞과 댄스홀만을 오갔기 때문에 학원 안쪽 깊숙히 위치한 사무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슬럼프에 빠진 전공생들이나 입시생들이 종종 어두운 얼굴로 끌려들어가던 곳이었다.
호기심만 가지고 있던 사무실 안에는 작은 책상과 컴퓨터, 학원에서 쓰는 휴지, 종이컵 같은 온갖 생필품이 여기 저기 쌓여있었다. 보기 전에 가졌던 비밀스러운 느낌과는 다르게 그닥 깔끔하거나 효율적인 업무공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문을 닫으니 학원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피아노 반주 소리나 학생들을 다그치는 선생님의 높은 목소리가 모두 문 뒤에 남겨졌다. 둘뿐인 작은 공간에 고요함만 남자 예주는 오히려 그 어수선함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이 적막이 주는 어색함을 어찌할 줄 몰랐을 것이다.
"저, 왜 보자고 했는지 궁금하시죠?"
원장이 자리를 권하며 물었다. 그리곤 답을 기다리지 않고 휙 돌아서더니 곧장 믹스커피 한잔을 타서 예주 앞에 내려놓았다. 예주는 얼떨떨한 마음 반, 이유도 모르게 불안한 마음 반으로 원장을 힐끔 보고선 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네."
그리고 솔직히 대답했다. 원장은 고개를 끄덕 끄덕 하더니 별 말 없이 따로 믹스커피를 한 컵 더 탔다. 그녀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신데요? 편히 말씀 해 보세요."
결국 더 나이가 많고, 더 아줌마인 예주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내향형 인간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그녀였지만 언제부턴가, 아마도 스스로를 '아줌마'라고 스스럼없이 부르게 되면서부터는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도, 어색한 상황에서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것도 조금은 쉬워졌다. 나이가 들수록 모든 것이 녹슬어가는데, 그거 하나만은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그,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세요?"
원장은 당부를 먼저 했다. 예주는 최대한 온화하게 웃으며 그녀가 타준 커피를 크게 한 모금 마셨다.
"주하나님 말이에요, 예주님이 데려오신 회원님."
원장은 마른입술을 혀로 적시며 이야기를 꺼냈다. 예주는 잊은 적 없지만 잊고 있었던, 알고 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인 하나의 이름이 원장의 입에서 나오자 생각보다 깜짝 놀랐다. 얼마나 놀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일 정도였다. 그 바람에 들고 있던 종이컵 속 커피가 함께 들썩 하더니 예주의 손등에 몇방울이 튀었다.
"앗 뜨거!"
예주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손등을 입으로 가져갔다. 뜨끈한 부분을 입으로 쭉 빠는데 달달하고도 쌉쌀한 맛이 느껴졌다. 어른이 아닌데 어른인 척을 할때마다 꼭 누가 놀리거나 나무라는 것처럼 이렇게 어린애같은 실수를 하게 된다. 우습다는 듯, 웃기다는 듯 상대가 그녀 몰래 킥킥대는 모습이 상상될 때도 있다. 그게 누군지도 모르고 구체적인 얼굴 같은 것이 떠오르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상상은 종종 예주의 머리속에 찾아왔다.
"잘......아시는 분이세요?"
괜찮냐, 데었냐, 괜찮다 수선스럽게 오간 몇 마디 끝에 원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예주는 어딘지 모르게 엉켜버린 머리속이 엉키다 못해 텅 빈 것 같았다. 안다고 하기에도, 모른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원래 살다보면 이렇게 애매한 관계들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하나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애매한 관계에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왜요?"
예주는 원장의 말에 대답대신 질문을 던졌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탈출구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원장이 방금전 예주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오......어......하는 이상한 머뭇거림 끝에 원장이 말했다.
"혹시 같은 교회 같은 거 다니세요?"
"아니요!"
예주는 별 소릴 다 듣는다는 듯이 펄쩍 뛰었다. 절대 아니라는 뜻이었지만 오히려 그 덕에 뭔가 더 수상해 보이긴 했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 되기도 한다는 말도 있으니.
"왜요?"
결국 예주는 한번 더 묻고 말았다. 아니, 설마. 설마 설마. 설마하면서도 원장이 왜 그런 걸 묻는지, 왜 이렇게 망설이는 건지 짐작이 갔다.
"......하나님이 회원분들께 전도 같은 걸 하고 다니시는 것 같아요."
원장은 어두운 얼굴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주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뭐라 대꾸해야할지 고민하는 동안 원장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주가 학원을 나오지 못했던 지난 석달 간, 하나는 천천히 화, 목 초급반의 인싸가 되었다고 했다. 다들 발레가 처음이라 쭈뼛거리는 수강생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수업이 끝나면 포도당 캔디 같은 것을 나누고, 우스꽝스러운 실수를 하고도 활짝 웃으며 다시 도전하는 열정적인 학생으로 선생님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 먼저 나서서 초급반 단톡방을 만들어 같은 수업을 듣는 사람들에게 공지사항을 전달하거나 꼭 봐야 할 발레공연 소식까지 전하는, 그야말로 그 수업의 반장 같은 존재로 인정받았다. 단 석달만에.
"발레도 꽤 금방 늘어서 다음달에는 중급반으로 레벨업 해도 된다고 한 모양이에요, 담당 선생님이."
"벌써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예주는 그렇게 물었다. 초급반을 벗어나기 위해 예주는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우습게도 그 순간 느꼈던 감정은 질투였다. 발레는 타고 나는 거다. 누군가는 100시간을 투자해도 발레에 적합한 턴아웃을 만들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턴아웃을 구현한다. 잔인한 바가노바의 말처럼 발레는 타고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런데 몇몇 수강생분들이 저에게 와서 말씀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이 좀 불편하다고."
예주의 질투 따위, 닿을 수 없는 하나의 재능에 대한 그녀의 감정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원장은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자꾸만 전도를 하려고 하신단 거에요. 이상한 전단지나 책자 같은 것도 나눠주고. 또......"
원장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누군가 엿들을까 걱정되는 것처럼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더니 예주에게로 고개를 쑥 들이밀곤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성경공부 모임 같은 걸 해보자고, 자꾸......"
그리곤 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주도 그녀를 따라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러리란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럴줄은 몰랐다. 당황스러움에 눈 앞이 핑그르르르 도는 것 같았다. 아닌가? 공복에 운동을 해서인가? 뭐 어찌됐든 간에.
"예주님이 하나님과 친하시면......"
"안 친해요!"
예주는 원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학원에서는 전도라던가, 종교에 대한 권유나 강요는 좀 자제해 달라고 해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아무래도 제가 나서서 바로 말씀을 드리는 게 서로 좀 불편하기도 하고......일단 가볍게라도 먼저 예주님이 말씀을 드리고, 그리고 나서도 계속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다른 수강생분들이 불편해 하시니까 더는 저희 학원에 다니시는 게 어려울 것 같다고 제가 단호하게 말씀 드릴게요. 발레 학원에서는 누구든 즐겁게 발레를 즐기고 가는 게 최우선이니까요."
원장 역시 예주의 말은 아랑곳 없이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끝냈다. 그래, 그러니까 어쨌거나 원장의 눈에는 그녀가 하나와 친해 보였다는 뜻이다. 의도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학원에 어딘지 수상한 학생 하나를 풀어놓은 예주가 그리 곱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작은 호의를, 사랑하는 발레를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이 순수한 마음을 이렇게나 불쾌하게 이용하다니. 예주는 미칠 듯이 억울했지만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내가 뿌린 씨앗이니까.
늘 그렇지만 열심히 뭘 하려고 한다 해서 진짜로 무언가 되는 건 아니다. 하늘이 내리는 피루엣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