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mmer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여름 Summer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떠나는 것 같은 시즌이 왔다. 모두들 어딘가 조금씩 나사가 빠진 것 같고 ‘더워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더워죽겠다, 들어오면서도 더워 죽겠다고 한다. 너무 더울 때는 꽃들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꽃시장의 꽃들도 다양성을 잃어버려 꽃구경하는 재미도 덜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TV를 틀면 모두가 물놀이다, 바캉스다 아주 신나고 익스트림하게 지내고 있는 것만 같은데 현실의 나는 반쯤 녹은 아이스크림이 된 기분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힘에 겹고, 앉아도, 누워도 몸이 무겁다. 아침에 땀에 푹 절여진 채로 불쾌하게 눈을 뜨는 것은 평생동안 여름마다 겪는 일인데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래서 나는 한 여름에는 휴가를 잘 가지 않는다. 예전부터 그랬다. 더운 나라로 휴가를 가더라도 여름엔 가지 않았다. 더운데 더운 곳을 찾아갈 이유가 없을 뿐더러, 그냥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죽은 듯 있는 것 뿐인 것 같았다.
곰은 겨울에 동면에 들어가지만 나는 여름에 동면에 들어가는 곰처럼 그렇게 무뎌진다. 모두가 휴가를 떠난 마당에 굳이 부지런할 필요가 있나 싶고, 뭐가 늦거나 늦춰져도 큰일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나 혼자 다급한 메일을 보내도 담당자는 대부분 휴가중이다. ‘이렇게 프로페셔널 하지 못하다니!’ 하고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그 다음 주 여름휴가를 떠날 것이라 혀만 끌끌차고 그냥 기다린다.
온 세상 시계가 다 고장난 것같다. 아니, 녹아버린 것 같다.
단순히 해가 길어졌을 뿐인데 하루 24시간이 28시간쯤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어진 낮만큼 더위도 길어지고, 하루도 길어지고, 결국 여름이 지겨워진다. 그렇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떠들썩하게 여름 휴가를 가고, 다시 돌아와 자리를 채워도 여름은 끝나지 않는다.
이런 여름에 나오는 야생화들은 이름들이 참 재미있다. 매의 발톱을 닮은 꽃잎이 달려 있어서 이름이 매발톱이 된 꽃, 줄기의 마디가 꿩의 다리처럼 생겨서 금꿩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은 꽃, 뿌리에서 노루 오줌 냄새가 난다고 해서 노루 오줌이 된 꽃 등, 초등학교 때 친구들 별명을 붙여줄 때처럼 생각나는대로 그냥 막 붙인 것 같은 이름이다. 이 웃기는 여름 꽃들의 다소 성의 없어 보이는 이름은, 아마 여름에 피는 꽃이라 그런 것 아닐까 싶다.
더워 죽겠는데 그냥 보이는대로 부르지 뭐. 무슨 상관이야, 더워 죽겠는데. 이런 마음?
나는 언젠가 ‘진지병'에 걸렸냐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진지충'이냐는 소리를 들었었다. 그 얘기에 마음이 상해서 진지하게 내가 왜 진지충이냐는 질문을 했다가 진짜 진지충이라는 비웃음을 샀다. 연도는 기억나지 않는 여름이었는데,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나에게 진지충 드립을 날렸던 친구와는 ‘내가 왜 진지충이냐’, ‘그렇게 정색하는게 바로 진지충이다’라며 서로 진지하게 언쟁을 벌이고 열불이 터졌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쓸데없이 진지했고, 부지런했다. 그냥 그런가보다 했어도 됐을 시기였는데.
매발톱은 꽃잎이 매의 발톱을 닯았지만 또 어찌보면 엘프의 고깔모자 같기도 하다. 꿩의 다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내 눈에 금꿩의 다리는 부드러운 연보라색 미스트를 뿌려 놓은 것처럼 아스라이 아름답다. 꽃시장에서만 보기때문에 뿌리의 냄새까지는 맡아본 적 없는 아스틸베는 뾰족한 솜사탕처럼 생겨서 커다란 꽃 사이사이에 끼워서 꽃다발을 만들면 포슬포슬하니 잘 어울린다.
이 웃기는 이름의 꽃들은 주로 여름의 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어느 무더운 여름 날 산을 오르다 이 꽃들을 발견하고 처음 이름을 붙여주던 나무꾼을 생각해 봤다. 등에 진 나무지게도 무거워 죽겠는데 저 꽃들은 다 뭐람. 나는 힘든데 팔자 좋아 보이는 저 꽃들!
에라이 매발톱이나 되라. 너는 꿩의 다리. 너는 그냥 오줌! 노루 오줌.
이런 상상을 하고는 피식 웃어버렸다.
한 여름에도 진지한 삶을 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없을 거야.
그러니 그냥, 바보같이 나사빠진듯 살아도 된다. 그냥 시원하게 대놓고 게을러지고, 기회가 있으면 슬쩍 할일을 내일로 미뤄버려도 괜찮다. 부지런히 종종거려도 나갈 때 더워 죽겠고, 들어올 때 더워죽겠는 건 변하지 않는다.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주가 여름휴간데, 그 누가 진지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 예쁜 얼굴을 하고도 발톱이니, 꿩이니, 오줌 소리를 들은 꽃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지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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