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ring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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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Spring
꽃을 사랑하는 나는 모든 시간, 모든 계절의 꽃이 모두 흥미롭고 즐겁지만 누군가 꽃을 배우기 가장 좋은 계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봄'을 추천한다. 봄의 꽃들은 그 계절이 주는 느낌을 그대로 담고 있다.
어림, 설레임, 천진함, 순수함, 연약함, 부드러움……
우리가 봄을 생각할 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봄 꽃들의 특징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날이 따뜻해짐에 따라 점점 많은 종류의 다양한 꽃들을 만날 수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봄에 나오는 그 많은 봄꽃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그때문에 행복한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봄 꽃들을 보며 화사한 기분에 빠질 때 착각하기 쉬운 것이 있다.
봄에 피어나는 꽃들이 봄에 시작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꽃은 결과다. 봄에 결과물인 꽃을 피우기 위해 그 씨앗과 구근들은 훨씬 이전, 그러니까 가을이나 초 겨울 쯤 땅에 뿌려졌을 가능성이 높다. 보이지 않는 캄캄하고 차가운 흙 속에서 견디고, 기다리며 천천히 더 깊은 땅속으로 뿌리를 뻗어나가는 한편 위로는 새싹을 올려 보낸다. 아침과 밤에는 추위를 견디고 따스한 날에는 조금씩 꽃대를 키워나가며 완벽히 피어날 적당한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날 짠, 하고 나타난 봄 꽃들을 보며 ‘아,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무언가를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봄에 시작한 우리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그 해의 봄을 떠나 보낸다.
길고 긴 겨울을 버티며 얼마나 많은 꽃들이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런 사실을 떠올려 보기도 전에 봄은 너무 짧고 빠르게 지나간다. ‘나도 이제 시작하자'는 마음을 먹자 마자 끝나버린다. 사실 마음을 먹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인데 그 미션을 완수하자마자 지나쳐버리는 봄을 보면 부풀었던 마음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후욱-하고 갑자기 가라앉는다. 분명 시작의 분위기와 맞물려 함께 시작한 것 같은데 나만 뒤쳐진 것 같고 다른 사람들만 성공적으로 결과물을 내는 것 같다.
분명한 착각이다. 꽃에게 봄은 시작의 계절이지만 행동의 시작이 아니라 결과의 시작이다. 결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증폭하여 가을 쯤에는 완결을 보이고, 겨울에는 다시 땅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착각의 원인은 보이지 않는 땅속에 있다. 캄캄하고 춥고 어떨땐 축축하고 또 어떨땐 한 없이 메마른 땅 속에서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는 그 안에 있는 씨앗만이 알 수 있다. 내가 씨앗이 되어 그 안에 함께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이 씨앗의 사투와 기다림, 그리고 기회의 포착을 모두 알 수 없다. 그나마 주의 깊게 땅을 살피며 다닌 사람만이 땅위로 힘차게 머리를 들이미는 새싹을 조금 더 먼저 발견할 수 있을 뿐.
봄에 무언가를 시작하는 건 이미 늦은 것이다. 봄에 시작한 씨앗은 봄에 꽃을 피울 수 없다. 그러니 찰나와도 같은 봄이 지나날 때 자책할 필요 없다. 우리가 못나서, 늦된 것이 아니라 단지 정말 늦게 시작한 것이니까.
봄에 시작하면 빠르면 가을쯤엔 무언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손가락도 까딱하기도 싫은 무더위를 버텨야 한다. 아니면 그 해를 꼬박 아무 성과없이 지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꽃이 일년을 주기로 꽃을 피우지는 않는다. 이년생의 꽃들은 한 해를 결실 없이 보내고 나야 꽃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망초(Forget-me-not)는 푸른색, 또는 흰색의 아주 작은 꽃이 오밀조밀 피는 이년초 중 하나이다. 바글바글 여러 송이가 함께 피어나 청초한 느낌을 자아내는 물망초를 보려면 한 해는 먼저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옮겨 심는 걸 싫어해서 꽃이 피었으면 하는 곳에 바로 씨앗을 뿌리는 것이 좋은 물망초는 추위를 잘 견디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일단 부지런히 씨를 뿌려 두면 꽃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꽃시장에서 희고 푸른 물망초를 발견할 때면 나는 이 꽃을 키운 농부들의 부지런함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올해가 아닌 다음해를 위한 씨를 뿌리고 기다린다는 건 생각보다 인내심이 필요하다. 특히나 다른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면 기다림의 시간은 더더욱 더디게 느껴지고 무언가 뒤쳐진 듯한 기분이 들 것도 같다. 하지만 긴 준비 시간이 끝나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의 기쁨은 두배가 훨씬 넘으리라.
물망초의 유명한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이다. 한편으로는 서글프고 수동적으로 들리는 이 꽃말 뒤에 한 마디를 덧붙이면 갑자기 굉장히 씩씩한 다짐으로 바뀐다. ‘나를 잊지 마세요. 꼭 다시 돌아올테니까.’ 나는 이 꽃말이 이년생인 물망초의 성격과 참 많이 닮아 있는 것같다고 생각한다.
봄에 시작하면 늦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봄이 아니라 다음해 봄을 목표로 삼는다면 빠르다. 아주 느긋하게 알아보고 준비하고 시작해도 된다. 다른 사람보다 두배의 시간을 가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어디를 시작 지점으로 보느냐의 문제는 실제의 시간과는 무관하다. 삶의 주도권을 시간의 흐름에 넘겨주느냐 내가 가져오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년초를 키우기에 너무 늦어버렸다면 이년초를 키우기로 결정하면 된다. 그러면 다시 시간이 충분하게 리셋된다.
다시 한번, 결정은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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