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건한 무지의 세계

Autumn

by 문혜정 maya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2021년 4월 말, '꽃이 필요한 모든 순간'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발간 됩니다.


이제 서점에서 만나요!







가을 Autumn

굳건한 무지의 세계









꽃을 지금보다는 잘 알지 못하던 때 좋아하던 꽃들이 있다. 천일홍도 그런 꽃이었다. 선명한 자주빛, 보라빛을 띄는 작은 알사탕처럼 동그랗게 생긴 꽃.

살짝 만져보니 바스락거리는 마른 지푸라기 같은 질감인데, 천일동안 붉다는 이름만큼이나 오래동안 시들지 않는 꽃이라고 했다. 꽃이 가진 그 자체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아닌 그냥 예쁜 색, 단정한 모양, 지속성에 더 관심을 가지던 때여서 그땐 이 츄파춥스 같은 꽃이 좋았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영원할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스타티스, 후리지아와 함께 별로 선호하지 않는 꽃 베스트 5에 들어갈 정도로 시큰둥해졌다.

채도 높은 선명한 색도 부담스럽고, 알사탕 같이 땡그란 모양은 재미없고, 바스락 거리는 수분기 없는 촉감은 생화같지 않아 싫고, 무엇보다 그 천일이나 간다는 점이 참 마음에 안 든다. 지금의 나는 변함없이 오래가는 꽃보다 피고, 지고, 변화하는 모습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꽃에 더 관심이 간다.



천일홍은 언제나 그대로, 내가 좋아하던 그 특징 역시 그대로인데
나는 바로 그 특징들 때문에 이제 천일홍이 별로처럼 느껴진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인지.



꽃을 사러오는 손님들 중 대부분은 꽃을 잘 모른다. 꽃에 정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장미나 해바라기 정도를 말하고, 그 보다 조금 아는 사람은 수국, 천일홍, 후리지아 정도, 꽃수업을 조금 들었다 싶은 사람은 라넌큘러스나 리시안셔스, 작약을 말한다.

나의 꽃 냉장고는 언제나 꽃으로 가득 차 있는 편인데, 어떤 손님들은 자신이 아는 꽃이 없으면 ‘꽃이 별로 없네.’라고 말하며 슬쩍 들여다보고는 그냥 가버리기도 한다.

그들의 모습에서 ‘천일홍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내가 슬쩍 보일때가 있다. 제일 좋아하는 꽃이라며 천일홍으로만 만들어진 꽃다발을 주문하고 싶다는 그 손님의 세상에는 몇 종류의 꽃이 존재할까 궁금해졌다.

예전에 내가 좋아한다고 꼽았던 꽃들은 지금 ‘별로 선호하지 않는 꽃' 목록 상위에 이름을 올려 놓고 있다. 그리고 ‘좋아하는 꽃'의 범위는 점점 늘어나서 이제는 한 두 종류의 꽃만을 꼽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계절별로 좋아하는 꽃이 생기고, 꽃다발이냐 꽃꽂이냐, 만드는 방법에 따라 선호하는 꽃이 생기고, 컬러별, 텍스처별로 좋아하는 꽃들이 생기더니 이제는 모든 꽃들이 거의 다 ‘좋아하는 편'에 속하게 되었다. 꽃들의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카테고리를 분류하여 상황에 따라 가장 잘 어울리는 꽃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편이 정확하겠다.

더 많은 꽃을 알고, 더 많이 경험할 수록 나는 ‘가장', 혹은 ‘제일’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어려워졌다.





가을에 천일홍을 찾는 손님들을 만나면 나는 또 다른 꽃들을 추천해 봤었다.

냉이초나 줄맨드라미, 미니 메리골드나 마트리카리아, 루드베키아는 어떠세요? 가을 느낌을 주기 참 좋은데요. 하이페리쿰같은 열매도 괜찮아요. 풍선초나 꽈리같은 아이들도 아주 특색있죠.





하지만 그들은 단호히 말한다.



아니요. 그냥 천일홍만 주세요. 그런 건 뭔지 모르겠어요. 천일홍이 제일 예뻐요.


몇번의 거절과 서로간의 불편함을 경험한 이후로 나는 뚜렷히 원하는 바를 가지고 오는 손님에게는 따로 별도의 제안을 하지 않는다. 그 견고한 세계를 흔드는 것이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달라는 꽃을 주고, 원하는 꽃이 없으면 없다고 대답한다. 서로간에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대신 막연히 ‘꽃다발을 사고 싶은데....’라며 수줍게 들어오는 손님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변한다. 예산을 묻고, 받을 사람의 취향이나 사용할 곳을 물은 뒤 최대한 다양한 꽃들, 그들이 평소에는 잘 만나지 못했을 꽃들, 꽃다발에 쓰일지 생각 못했던 꽃들을 이것 저것 넣어준다. 좁은 세계는 들어가기 어렵지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세계는 오히려 넓게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



나는 처음 만들어질 그들의 꽃 세계가 장미와 안개꽃에서 닫히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인다.
언젠가, 좋아하는 꽃이 있느냐고 누군가 물었을 때
‘가을 꽃 중에서요?’라고 물을 수 있도록.





그리고 한편으로는 좁은 지식으로 내 세상이 너무 빨리 닫히지 않도록,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으려 경계하며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시 한번 살핀다.

천일홍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니 꽃잎 사이 사이에 노란 별들이 콕콕 박혀 있다. 지루하고 단조롭다 느낀 그 꽃이 다시 한번 마음에 슬쩍 들어온다.





가을에는 꽃도 예쁘지만 꽃이 지고난 뒤 열매가 맺힌 가지와 씨앗 꼬투리나 씨방이 달린 줄기도 참 예쁘다. 그런 건 가을에만 만날 수 있는 것들이다.

꽃집에서 레드베리, 남천 열매, 클레마티스 씨드, 스카비오사 씨드박스, 아미초 씨드박스, 연밥 같은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면 조금 낯설겠지만 꼭 한번 데려오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매번 같은 꽃만 들이는 게 아니라 계절에 따라 이런 것들을 적극적으로 들이는 꽃집을 만나게 된다면 그곳에서는 플로리스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보는 것도 좋다. 그들은 매우 행복해 하며 기꺼이 손님의 꽃세계를 한뼘 넓히는데 동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년, 열두달 흔들리는 꽃 출판 펀딩]

* 2020년 2월 10일까지
* 플라워엽서/에세이 등 다양한 펀딩 선물 선택 가능

https://www.tumblbug.com/yearfl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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