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nter
브런치에 연재된 플라워 에세이 '일 년, 열두 달 흔들리는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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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Winter
계절적으로 겨울은 모든 것이 종료되고 정리되는 시간처럼 보인다. 예전엔 겨울이 추위라는 고난을 만나 잠시 멈춰서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겨울은 매우 이중적인 시기이다. 실제로 멈추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눈에만 멈춘듯 보이는 것 뿐이다.
겨울 역시 역동적인 시기라는 걸 깨달은 건 봄에 나오는 수많은 꽃들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봄의 꽃이 되기 위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를 시작했어야 한다는 당연한 것을, 꽃을 시작하기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겨울은 자연이 버린 시기라고만 생각했다. 얼마나 일차원적인 생각이었는지.
자연의 모든 것은 아주 섬세하게 설계되거나
아주 필사적으로 적응된 결과물들이다.
우연하거나 버려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많은 꽃들이 계절의 흐름 속으로 사라지고 다음해를 기약하는 때에 나는 구근을 산다.
히아신스, 수선화, 무스카리, 튤립, 글라디올라스 같이 크고 매끈하고 둥근 구근들은 팔각처럼 뾰족하고 바싹 마른 라넌큘러스 구근이나 호두처럼 작고 딱딱한 프리틸라리아 구근들 보다는 쉽게 싹을 틔울 수 있어 초보자들에게 추천한다. 크고 작은 화분을 가리지 않고, 띄엄 띄엄 심어도, 다닥 다닥 붙여 심어도 까탈부리지 않고 금방 싹을 올리고, 또 금방 꽃대를 올려준다.
수선화는 줄기 날씬하고 길어서 길고 높은 화분에 심어두는 게 예뻐 보인다. 작은 포도송이같은 무스카리는 화분을 해초 바구니 같은데 통째로 넣어 두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흙을 만지는 게 싫다면 히아신스로 수경재배를 해 봐도 좋다. 화려한 꽃을 즐기고 싶다면 튤립 구근 여러개를 큰 화분에 촘촘히 심어둔다.
이렇게 겨울에 구근들을 무심하게 툭툭 심어 놓고 잊을만 할 때 한번씩 물을 주면 누구보다 빠르게 봄 꽃들을 만날 수 있다. 그냥 양파덩어리 같던 구근의 머리 꼭대기에 어느 순간 연두색의 무언가가 슬쩍 비치기 시작하면 한숨 돌려도 된다. 구근이 썪지 않고 활동을 시작할 예정이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신호를 기준으로 새로운 계획과, 목표와,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 놀라운 자연의 시계는 외로운 겨울 밤을 나와 함께 보내며 다가올 봄의 시작을 천천히 함께 해 주거니와 아주 산뜻한 응원이 되기도 한다.
봄에 무언가를 시작하면 왠지 모르게 쫒기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겨울의 시작은 훨씬 더 여유롭고 안정적이다. 마치 새벽녘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해가 뜨길 기다리며 하루를 먼저 시작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한겨울의 날들엔 구근에 꽃이 활짝 필 때를 기다리며 조용한 준비의 시간을 보내도 좋다.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겨울을 지나 깨어나는 봄을 지켜본다.
가끔은 이 길고 지루한 시간들을 얼른 뛰어넘고 싶을 때가 있다는것,
땅속에서 부지런히 꾸물거리며 다가올 시작을 준비하는 내게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며 게으름뱅이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당장이라도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을 잘 안다.
이건 그저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라고 자신을 진정시키고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려 해도, 겨울은 너무 길고 밖은 너무 모질며 내 인내심은 한번씩 꼬라지를 부리고 싶어한다는 것도.
하지만 한번 시작이 되면 아무것도 되돌리거나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없다. 인생은 순방향만 있을 뿐 역방향으로 달리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이미 그 흐름에 타고 있고 이 파도 속에서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는 서퍼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다. 아니,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어떤 순간이 나의 것인지 신중하게 ‘선택’하는 중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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