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기의 즐거움

by 문혜정 maya








배우기의 즐거움










제목을 '배움'이 아니라 '배우기'라고 쓴 이유가 있다. 나에게 '배움'은 무언가 완결된 느낌이고 '배우기'는 다소 미래형이거나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해 봤다. '취미부자'라고 불리우던 나의 과거를.


나는 무엇이 좋아서 그렇게 무언가를 배우러 이곳 저곳을 지치지도 않고 흘러다녔던가.



처음엔 내 마음이 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허해서 무언가 채워넣고 싶은데 그것이 공교롭게도(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무언가를 배우는 것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열중하던 나의 집중력이 그리 길게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은 그 왕성한 의욕이 일년을 넘지 못했다.

그렇지만 꽃일을 시작한 이후에는 그 에너지가 호기심에서 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부어도 부어도 끝없는 갈증처럼 솟아나는 '호기심'.



나의 호기심은 게으른 나를 일으켜 돌아다니게 하고, 머무르게 하고, 깊이 탐구하게 했다. 꽃이라는 'Love of my Life'를 만난 이후로 나의 모든 관심과 열정은 꽃으로 포커스가 맞춰졌지만 배우기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 꽃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 더 잘 하기 위한 것,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으로 넓혀졌다. 중구난방 뻗어나가던 '배우기'는 드디어 구심점을 찾고 방사형으로 펼쳐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나의 취미들이, 들끓는 열정으로 뛰어들었다 차게 식어버려 떠나버렸던 취미들이 다시 모두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온갖 종류의 공예, 디자인, 컬러, 향기, 음악, 춤, 문학, 철학, 사진, 요리, 식물...... 그 모든 것들이 희미한 추억속에 묻혀있다가 어느 순간 반짝 깨어나 나에게 '영감'을 주고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에서 여러차례 안도감을 느꼈었다.



내가 이걸 배우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배우기'는 나에게 여러가지 시각을 안겨 주었다. 한때는 혼란스럽기도 했다.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도 있는 내가 너무 복잡하고, 우선순위를 정하지 못하는 내가 우유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얇게 한장 한장 낱장이던 것이 차곡 차곡 쌓이고, 쌓인 것들이 한 권쯤이 되자 나름의 정리 기준이 세워졌고 우선순위를 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때 알았다.


아, 나는 내 인생의 임상실험이 좀 부족했던 거였구나.


비록 아직도 확실히 무언가를 통달한 나이나, 그런 사람이 된건 아니지만 나는 이제 조금 당당히 이것 저것 '배우기'를 좋아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마음이 허해서도, 호기심이 넘쳐 흘러서였던 것이 아니었다.

그때의 나는 인생의 임상 샘플을 채우는 나이였던 것이고 나는 그 과정을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사람이었다. 외골수가 되기 딱 좋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나는 본능적으로 그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우기'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배움의 개미굴]

ex 1)
어느날 엄마가 보내준 피아노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다 보니 들고다니며 연주를 할 수 있는 악기를 배우고 싶어져셔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음악에 맞춰 춤추고 싶어서 발레가 배웠고, 좀 더 빠르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아 피겨스케이팅을 배웠다.

ex 2)
집에서 혼자 요리하고 먹는 것이 좋아 쿠킹 클래스를 찾아 다니다가 달달한 디저트가 만들고 싶어져서 제빵을 배웠고, 그와 함께 같이 마실 커피를 배웠고, 내 카페에서 그것들을 팔고 싶어져서 상품 포장과 패키징을 배웠다.

ex 3)
블로그에 내 경험들에 대해 짧은 글을 쓰다가 소설이 쓰고 싶어서 스토리 텔링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내가 쓴 작은 글들을 하나로 묶어 잡지를 만들고 싶어서 웹디자인과 편집 디자인을 배웠고, 그 안에 넣을 사진이 필요해서 사진 강의도 쫒아다녔다.

ex 4)
꽃이 좋아서 꽃을 배우다가 자격증을 공부했고, 꽃에 관심이 생기니 향에 대한 관심이 함께 딸려와 조향 공부를 시작했고, 플로리스트가 되고 보니 내가 직접 꽃농사를 짓고 싶어져 주말농장을 빌리고 매년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그 밖에 굴로 연결되지는 못했지만 개미굴 속에 파놓은 작은 방처럼 짧게 배운 것들]
한국 무용, 북아트(제본), 애니어그램, 타로카드, 마크라메, 일본어, 요가, 캘리그래피, 일러스트, 통기타, 보자기아트


[.....그리고 그다지 열심히 공부하지는 않았던 전공]
심리학, 광고홍보학

[누군가에게 배우지는 않았지만 꽤 오래 판(덕질 한)것들]
고전 추리 소설



아마 이 외에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자잘한 다른 거리들이 더 있을 것이다. 대체 이 많은 것을 배워서 어디에 쓸거냐는 물음을 심심찮게 들을정도로 나는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고 난 후의 나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타겟을 향해 미련없이 돌아섰었다.

하나의 배움은 끝날 때쯤 다음 배우기의 주제를 던져줬다. 꼬불꼬불 끝없이 이어진 개미굴을 헤메이는 개미처럼 나는 어디론가 계속 파고 들어갔다.



다시 돌아가서, 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배움'이 아니라 '배우기'인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사실 답은 단순하다.

왜냐하면 나는 그 '과정'들이 좋았기 때문이다. 배운 것이 채워진, 완료된 상태보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새로운 감정, 새로운 인사이트, 새로운 인연, 새로운 영감들이 좋았다. 그러니 '그걸 배워서 다 어디에 써먹으려고 그러니?'라는 비아냥 섞인 질문에도 '어, 다 써먹을 데가 있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내가 배운 것들을 기필코 써먹긴 했다. 반드시 어딘가 써먹어야지!하는 마음으로 덤벼든 적은 없었다. 나는 그저 어두운 숲속에 떨어진 과자를 주우며 길을 찾는 그레텔처럼(실제로 헨델과 그레텔은 새들이 과자를 다 주워먹어서 길을 잃었지만) 내 눈에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하면 하나씩 주워들었고,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어디론가 인도하고 응용할 힌트가 되어주었다.

근 10년간, 무언가 두가지를 배우면 하나는 금방 써먹을 곳이 생기고, 또 하나는 다음으로 배우고 싶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는 영감의 징검다리가 되는 경험을 해왔던 것이다. 무언가를 배우다보면 자격 시험을 준비해야하는 괴로운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로 나는 '배우기'의 전체적인 과정을 즐겨왔다.



예전에는 그런 생각도 했다.


이렇게 배우고 싶은 걸 다 배우고 나면 만족스러울까?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더 배우고 싶은 게 없어지는 때가 오면 어떡하지?


아마도, 나는 그때가 되면 내가 나이가 들었다고 생각하게될 것 같다. 더 이상 배우는 것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고, 당장 쓸모 없는 것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깝고, 누군가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게 싫어지는 때. 드디어 나라는 인간이 완성이 되는(혹은 완성 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때.

목적지에 도달한 차는 더이상 달릴 필요가 없다. 네비게이션도 목적지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종료된다. 목적과 방향이 필요없어지는 그때가 진짜로 늙어버린 때가 아닐까? 지금 당장은 의미 없는 것들을 배우면서 '언젠가'를 기대하는 삶을 살고 싶다. 끝날 때까지.



무언가 새로운 '배우기'를 시작할 때 자주 들었던 질문 중 또 다른 하나는 '이런 것도 배워요?'였다. 처음엔 '이런 것'이라는 지칭 자체에 짜증이 날 때가 많았다.


지들이 뭔데 내가 배우는 걸 '이런거' '저런거'래. 이런게 뭔지 저런게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하지만 우리는 사회화된 예의바른 인간. 나는 매너가 사람을 만드는 사회에 사는 인간이므로 조금 더 정중하고도 정제된 답변을 만들어야했다. 이 답변을 만들고나서는 단 한번도 이 답에 의문을 제기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니, 나와 비슷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한다.




인생은 돈주고도 배울 수 없는 것 투성이죠.

이건 돈만 내면 배울 수 있는데 왜 안 배우나요?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워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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