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달인이 뭘까 혼자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잘 풀리지 않는 연애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친구에게 이런 저런 조언과 격려를 하던 중, 내가 뭔데 남의 연애에 참견을 하나 싶어서였다.
연애 코치를 한다면 연애를 잘하는 사람, 경험이 많은 사람, 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텐데 누가 봐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숫자로 연애의 횟수를 세는 거라면 유치원생 수준이고, 연애의 능수능란함으로 치자면 신생아 수준이기 때문이다.
나는 '연애의 달인' 칭호를 받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조건을 몇 가지 떠올려 봤다.
조건 1. 어느 때고 필요할 때면 금방 연인을 만든다.
조건 2. 연애의 경험이 많다.
조건 3. 연애에 성공한 횟수가 많다.
조건 4. 사귀는 연인과 사이가 좋다.
조건 5. 평생의 연인을 만났다.
그리고 가만히 이 조건들을 생각하다가 이 모든 선행 조건들이 묘하게 서로 모순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건 1. 어느 때고 필요할 때면 금방 연인을 만든다]
- 금방 사랑에 빠지는 것을 진실한 사랑이라고 볼 수 있을까?
- 진실한 사랑이 아닌 연애를 '달인'의 연애라고 할 수 있을까?
[조건 2. 연애의 경험이 많다]
- 같은 조건 하에서 보자면 나이가 많아질 수록 경험은 쌓이게 될텐데 '연륜'이 달인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 양다리가 아니라면 하나의 연애가 끝나야 다음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텐데 여러명을 사귀는 것이 '달인'인가?
- 연애의 경험을 사귄 기간으로 본다면 한명과 오래 사귄 '달인'의 데이터를 다른 사람에게 일반화할 수 있을까?
[조건 3. 연애에 성공한 횟수가 많다]
-연애의 성공은 사귀자고 했을 때 100%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내는 것인가?
-성공 횟수가 많으려면 헤어진 횟수도 많아야 하는데 헤어진 연애가 많다는 게 '달인'이라고 할 수 있나?(위의 조건과 같은 의문)
[조건 4. 연인과 항상 사이가 좋다]
- 운명의 연인을 만났기 때문에 사이가 좋은 것일까? 내가 맞춰주거나 상대가 나에게 맞춰주기 때문에 좋은 것일까?
- 단순히 운명의 상대를 만나서 좋은 것을 '달인'이라고 할 수 있나?
- 내가 노력해서 사이가 좋은 것을 '달인'의 연애라고 할 수 있나? 내가 딱 맞는 사람을 잘 못알아 봐서 그렇다면 그것을 '달인'이라고 할 수 있나?
- 상대가 노력해서 사이가 좋은 것이라면 나를 '달인'이라고 할 수 있나? 내가 그것을 알아챌 수 있을까?
[조건 5. 평생의 연인을 만났다]
- 보통 운명의 상대를 만나면 결혼을 하는데, 결혼을 한 사람들은 연애의 달인인가? 아니면 결혼과 동시에 연애의 달인 졸업인가?
- 운명의 상대를 만났지만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연애의 달인인가 아닌가?
안다.
이 질문들을 읽으며 알쏭 달쏭해졌을 당신의 머리속을.
혹은 '뭐 이런 걸 이렇게 고민하고 있어?'하고 코웃음칠 당신의 피로함을.
나는 단지, 연애에 있어서 '달인'이라는 칭호가 내려지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이 달인이라면, 그 말은, 다시 말하면 많이 헤어져 본 사람이 달인이라는 뜻이다. 많이 헤어졌다는 건 연애에 실패한 경험이 많다는 뜻이다. 실패의 경험이 많은 사람을 달인이라고 하다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럼 반대로, 연애의 성공을 가지고 달인인지 아닌지를 가른다 치자. 처음 연애를 시작한 사람과 오래동안 사귀다가 한번도 헤어지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된 사람을 연애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에게 연애의 경험을 만들어준 사람을 단 한 사람 뿐인데. 그 경험을 '연애'라는 광범위하고도 풍파 많은 카테고리에 일반화하여 적용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연애를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다 달인이게?
그러므로 연애라는 이 알쏭달쏭한 행위는 누구도 '통달'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누가 누구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뜻이다.
어불성설.
인간이 70억명이면 세상에 존재하는 인생 역시 70억개다. 70억개의 인생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울고 불고, 웃고 떠드는 그 과정들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연애의 달인이라는 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해?
내가 오늘 생각을 해봤는데 말야......"
나는 퇴근 후 남편에게 '연애의 달인 이론'에 대한 발견을 들려주며 신나게 밤 산책을 했다. 나의 달인 이론에 대해 그는 또 다른 반론을 제기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을 덧붙이기도 했다.
뜬금없는 화두를 던지고 그에 대한 의견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편안한 분위기에서 즐기는 산책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가활동 중 하나다. 함께 천천히 동네나 집 앞 공원을 돌며 쓸데없고 의미없는 이야기 한 스푼, 앞으로의 걱정 두 스푼, 오늘 하루 있었던 일 한 스푼, 오늘 하루 만났던 재수없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반 스푼 정도를 비빔밥처럼 쓱쓱 비벼서 나눠먹다보면 한 두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그와 평소대로의 익숙한 패턴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갑자기 깨달았다. 아,그러고 보니 우리는 처음으로 사귀어 보는 거구나. 지금은 이런 일상이 자연스럽지만 몇년 전만해도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구나.
결혼 전 사귀었던 연인들과 꽤 오래 만났기 때문에 내가 연애를 잘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한명에게 집중할 수 있는 안정적인 관계. 하지만 각각의 연애들이 모두 지긋지긋하게 길었기 때문에 나는 다양한 연애를 경험해보지는 못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그들은 모두 연애 말미에서 양다리를 진하게 걸치며 내 뒷통수를 후드려 까고 떠나갔다. 그 과정의 눈물겨움, 찌질함, 분노는 지금 다시 떠올리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그들과 헤어지는 과정은 인류애가 다 바스라질 정도의 배신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지만 나는 가까스로 인간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 다시 보송보송한 연애를 하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모든 과정이 일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저런 것들을 고려해 봐도 나는 전혀 연애의 달인이 아니다. 마지막 애인이 되어 준 남편을 만났던 것은 순전히 운이었고, 마침 그때 우리가 사랑에 빠진 건 타이밍의 마법이었다. 그래서 친구의 연애 상담을 하며 누군가의 연애에 훈수를 두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나의 연애는 온갖 행운과 우연, 타이밍의 산물이었을 뿐이니까.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그 남자의 마음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정히 내쳐버리지 못하는 내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그녀의 괴로운 고백을 들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냥 지금을 즐겨' 밖에는 없었다. 지나고 나면 연애의 가장 즐거운 시기는 아직 이어지지 않은 그 시점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눈길이 가는 사람을 만나고, 어느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 사람의 얼굴이, 웃음이, 실없던 농담이 떠올라 피식 웃는 날이 늘어나고,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걸까?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다른 사람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가 왠지 밉고, 마음이 싸르르 아파지고, 그의 마음은 어떤지 궁금해지고, 혹시 무슨 메시지라도 오진 않을까 집에 돌아오면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그 시기.
우리가 연애를 하는 상대는 모두가 다르지만 사랑에 빠지고 전전긍긍하는 그 스타일만은 대충 비슷할 거라고 확신한다. 내가 내 마음을 확인 하는 과정과 그의 마음을 알지 못해 괴로운 과정은 100% 누구나 겪는 연애의 과정 중 하나이다. 그리고 분명히, 이 과정은 편치 않다. 상대의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늘 뭔가 불안하고 그를 보면 기분이 좋고 들뜨지만 어딘가 모르게 서글프다.
하지만 그 주체가 내가 아닐 때를 떠올려 보자. 내 친구가 이 과정의 한 가운데 놓여 있을 때, 혹은 어린 동생이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언니! 어떡해.'하면서 한숨을 푹 쉴 때, 뭐라고 하고 싶은지.
좋을 때다.
내 얘기가 아닐 때 우리는 그때가 참 좋은 때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빠르게 지나가버릴 것도.
우리는 곧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것이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결과는 나올 것이다. 긍정적으로 결론이 나서 연인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되면 아마도 이때를 떠올리며 '그때 우리 참 설레고 재미있었는데.'라고 얘기할 것이다. 부정적인 결론이라면, 다음 번에는 성공할 것이고 새로운 사람과 '그때 우리 참 풋풋하고 두근거렸는데.'라고 얘기할 것이다.
한 사람과 절대, 다시는 두번 경험하지 못할 그런 감정과 시간들이다. 지나고 보면 이 보다 더 설레이는 시기는 만날 수 없다.
이 즐거운 연애를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찰나의 순간들과 감정들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양 옆의 시야를 가린 말처럼 앞만 보고 달려나가는 건 너무 아깝다. 차라리 한 발자국 떨어져서 몰입도 높은 로맨틱한 소설을, 남의 연애 이야기를 구경한다고 생각하며 즐기는 게 좋겠다.
하나의 연애에는 하나의 공식만이 존재한다. 자타공인 연애 박사들에게 이것 저것 물어보고 조언을 구한들, 내 사람에게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 연애의 정답은 타인이 아니라 나의 그 사람이 가지고 있으니 '남자들은 어떤 여자를 좋아해?'같은 질문은 답이 없는 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차라리 그 사람에 '넌 어떤 여자를 좋아해?'라고 묻는 게 답을 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당신에겐 여전히 들리지 않을 이야기겠지만 풀리지 않는 공식에 괴로워 하는 대신 내 연인에게 꼭 맞는 공식을 찾는 탐험 중이라고 생각해 보면 연애하기가 참 재미있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