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엘 Mar 21. 2020

#17 호주에서 바리스타

이합의 피콜로

카페 맞은편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이자 같은 동네에서 그리스 레스토랑까지 운영하는 이합은 카페 부동산 계약을 중개했었다. 그는 카페가 오픈하고 누구보다 많은 커피를 주문해 마셨는데, 마주치면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는 말을 인사처럼 한다. 결국 우리는 골드코스트 서퍼스 파라다이스가 보이는 그의 집에서 종종 와인을 마실 만큼 가까운 친구가 됐다.



서퍼스 파라다이스 야경



180센티미터가 넘는 키에 스키니한 몸을 가진 이합은 슬림한 셔츠, 스키니한 바지에 뾰족한 구두를 신는 것으로 옷맵시를 뽐내는데, 시속 1미터로 부는 미풍에도 스카프를 두르고 다닐 만큼 패셔니스타 (Fashionista)이다. 먹구름이 낀 날에도 보잉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그는 하루에 최대 다섯 번까지 옷을 갈아입는다. 옷뿐만 아니라 수시로 헤어-샵에 들러 1센티미터도 안 되는 머리카락을 손질받는데, 마치 매일 잔디 깎기 기계를 돌리는 정원을 연상시킨다.


이집트에서 태어난 이합은 성인이 되자마자 벨기에로 건너갔다고 한다. 식당 주방에서 설거지 보조로 시작해 레스토랑 사장까지 됐다. 그리고 호주로 건너와 생츄어리 코브의 유명한 그리스 식당 사장과 만남을 계기로 그리스 레스토랑을 시작하게 된다. 남자는 ‘보스’라고 부르고 여자는 ‘마담’이라고 부르는 그는 많은 사람을 친구로 만들었다. 그중에 이탈리안 부동산 중개업자인 산토를 만나 부동산 중개업소 사장까지 된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마다 고난과 역경의 시간이었다고 강조하는데 웃음이 만연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이 사실인지는 듣는 사람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식이다.


이합은 오전 10시 전에 부동산 사무실에 출근한다. 점심시간 전에 잠깐 레스토랑에 다녀오고 오후 5시에 퇴근해서 옷을 갈아입고 레스토랑으로 출근한다. 카페 맞은편 부동산 사무실에서 틈나는 대로 커피를 주문해서 마시는데 대부분 한두 모금 마시고 싱크대나 책상 위에 그대로 둔다. 누군가 치워주지 않는다면 몇 평 안 되는 사무실을 커피 컵으로 빽빽이 채울 것이다. 여하튼 카페인 과다복용과 거리가 먼 사람이라 수많은 커피를 만들어 주면서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


커피는 1000가지 이상의 화학물질을 품고 있는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카페인이다. 커피에 사람에게 해로운 화학물질이 몇 가지 있지만 극소량이고 커피를 만드는 과정에서 공기 중으로 사라지니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사람 몸에 좋은 성분이 주를 이루는데 혈액순환, 당뇨나 염증 예방에 좋다. 커피 한잔에 100밀리그램 정도의 카페인이 들었는데 이 소량의 카페인은 집중력을 향상하고 두통을 완화하는 일종의 각성제 효과를 낸다.


과유불급이라고 카페인의 양이 지나치면 해가 되는데 사람이 죽지는 않더라도 10그램 정도 섭취하면 쓰러지고 만다. 하지만 커피 100잔 정도는 마셔야 그 정도 카페인을 섭취할 수 있으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카페인은 섭취 후 10분 안에 효과가 오며 3시간 정도 효능이 지속된다. 예를 들어, 호주 사람이 6시에 일어나고 7시 출근길에 커피를 사서 마시면 대략 10시 모닝 티-타임에 약빨이 떨어지니 또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나면 약빨이 떨어지고 이때 카페인을 충전하면 4시 정도 되는 퇴근시간까지 버티는 것이다. 호주 모닝티-타임의 설정은 호주 국민의 활력 증진을 위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만들어졌다.


이합은 로우 슈거 (Raw Sugar) 한 스푼을 넣은 피콜로를 마신다. 조금 마시다 잔을 내려놓는 탓에 큰 사이즈의 커피를 마실 필요가 없다. 작은 잔에 에스프레소와 소량의 밀크를 넣어 만드는 피콜로는 그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마른 체형에 초콜릿 컬러 (본인의 의견이다) 피부색을 한 그가 아담한 피콜로 잔을 들고 홀짝이는 모습은 흡사 피콜로를 고안해 낸 사람이라 해도 어색할 게 없다. 그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맛이나 밀크의 온도가 어떻든 ‘뷰티풀 커피’라고 수도 없이 말한다. 그에게 ‘언 뷰티풀 커피’ 란 적어도 지구 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그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좋은 분위기에 좋은 사람과 마시는 커피다.


이합은 비우지도 않을 커피를 수도 없이 주문하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이 중개해 오픈한 카페 매출을 올리겠다는 것과 사무실에서 커피를 핑계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도 하면서 남아도는 시간을 때워보려는 것이다. 이것만 봐도 그가 인생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얼핏 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커피가 아니라 행복, 두 번째는 돈이 아니라 사람, 세 번째는 옷이 아니라 평판이다.


카페 임대 계약을 할 때 처음 만난 이합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행복하다. 지독하게 가난한 나라 필리핀 사람의 행복지수가 높아 놀라움을 줬다. 가진 것이 적어 오히려 행복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는 풍요 속에서도 행복하다. 카페까지 찾아와 커피를 마시던 그는 사무실에 앉아서 마실 수 있게 가져다주는 커피에 익숙해졌다. 소소한 흥이라도 주고 싶어 뜬금없이 시키지도 않은 커피를 가져다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가뭄에 내리는 비를 본 사람처럼 환희가 넘친다. 홀-서빙 (Hall Serving)을 하는 직원은 커피를 가져다줄 때마다 그의 행복지수를 체크하는데 10점 만점에 8점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이합은 그리스 레스토랑을 팔고 부동산 중개업에 집중했다가 팔았던 레스토랑을 다시 사서 운영하고 있다. 늘 행복한 그는 레스토랑에서 손님과 만나는 일이 좋다고 한다. 그래서 이참에 부동산 중개업을 정리하고 레스토랑 사업에 집중하고 싶다고 했다. 나라를 옮겨 다니며 다양한 일을 경험해본 그가 충동적인 결정을 할리는 없다. 때마침 호주의 부동산 시장은 내리막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호주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계기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로 이민이나 관광객이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덩달아 부동산 투자도 붐을 탔다. 그때부터 중국 투자자는 호주 부동산에 사이즈가 다른 돈을 뿌리기 시작했는데, 시드니를 중심으로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올려놓게 된다. 7년 전쯤 글로벌 금융 위기 당시 호주 부동산도 잠깐의 하락세를 보였지만 중국인 부동산 투자 덕분에 가격 상승은 계속됐다.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중국의 경제성장은 절정에 다다랐다. 폭발적인 성장 이면에 정부, 기업, 개인까지 폭탄에 비유될만한 부채를 떠안고 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오르는 집값을 보다 보면 빛을 내서라도 집 하나 사게 만드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1억 원 빛을 내서 산 집이 1억 5천만 원까지 올랐다가 5천만 원까지 가격이 떨어졌다고 치자, 이 사람은 가만히 앉아 오천만 원이라는 빚을 떠안게 된다.


느리더라도 안전 제일을 추구하는 호주는 다른 나라 경제위기를 학습한 덕분에 중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 투자에 늘 미지근한 반응을 보여 왔다. 호주는 예나 지금이나 외국인의 부동산 구입을 불허하고 있으며 중국인 투자 붐과 함께 투자이민의 문을 거의 닫았다.


한국에서 호주를 방문하는 어른들은 호주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 아파트 한 채 가격은 얼마인지 월세로 내놓으면 얼마를 벌 수 있는지, 세금은 어느 정도 발생하는지, 한국 부동산 투자와 비교한다. 호주는 외국인이 부동산을 구입할 수 없다. 외국인에게 허용된 부동산은 새로 분양하는 아파트 뿐이다. 이것을 투자의 기회로 보기 힘든 것이 호주 아파트는 사고 나면 대부분 가격이 떨어진다. 자동차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비싼 인건비, 건축 자재 대부분을 수입하는 호주에서 건설비용은 유별나게 비싸다. 그러니 다 지어진 아파트는 유별나게 비싼 수고 비용이 붙어있는 것이다. 이러니 외국인이 호주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벌고 싶다면 치밀한 노력과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외국인이 호주에서 집을 사고 싶다면 투자 목적이 아니라 살 집을 구입하는 것이라고 충분한 해명을 해야만 가능하다.


이합도 사람인지라 아주 간혹 안 좋은 일을 겪어 인상을 찌푸릴 때가 있다. 그에게 침울함은 하루 정도 그럴 수 있지만 이틀 연속 이어진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한 번은 사무실에서 이틀 연속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합, 너의 행복이 곧 골드코스트의 행복이야. (Ihab, your happiness is the happiness of Gold Coast)'라고. 그는 문자를 확인하더니 카페를 바라보고는 무수히 많은 손 키스를 날렸다. 그는 단박에 행복해졌다. 그리고 나도, 골드코스트도 더 행복해지고 말았다.

이전 16화 #16 호주에서 바리스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