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와 버터밀크 프라이 치킨 버거
방송을 비롯해 길거리에서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외국인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삼성이 일본 기업이라 쉽게 착각하는 머나먼 호주에서 한국말을 하는 외국인을 보긴 힘들다. 영어를 모국어로 둔 사람이 다른 언어까지 구사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올리처럼 언어적 재능이 충분하거나 외국인과 붙어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안녕하세요, 형님’ 하고 인사하며 카페에 들어오는 올리는 한국말을 공부한 적이 없지만, 관심 덕분에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는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했고, 일본어 스터디 그룹에서 일본어를 배우다 일본인 변호사를 만나 법률 공부를 하게 됐다. 지금은 일본어를 구사하며 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사장이 일본 사람인 사무실에 한국, 중국, 일본 사람이 섞여 있다. 게다가 홍콩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어 한중일 3개 국어를 어느 정도 구사한다. 한국말이 가장 뒤쳐지지만 동기부여가 더 부족한 것 뿐이다.
남미 여행을 계획하던 시절, 스페인어 공부를 도전했다 포기한 적이 있다. 스페인어는 영어와 비슷한 문법을 가지고 있지만 주어에 따라서 동사 변화가 심하다. 외워야 할 것이 영어보다 많다고 느껴지자 자연스레 스페인어도 남미 여행도 덩달아 미뤄졌다. 지금은 호주에 살면서 영어를 주로 사용하지만 남는 시간을 이용해 일본어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다. 문법의 기초를 공부하고 간단한 표현을 외워가며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올리의 일본어는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그는 일본인 동료가 있어서,라고 말하며 겸손을 떤다.
새로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는데, 언어적 재능은 학습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킨다. 호주에 살면서 영어 공부하는 많은 사람 중에 나날이 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500년 뒤에도 그대로일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최소한의 재능과 최대한의 노력에는 적절한 비례가 필요하다. 올리는 재능이 충분한데다 노력마저 충분히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보다 어떻게 지내요, 라는 말이 인사라고 할 수 있는 호주에서 사람들은 만나면 서로 안부를 묻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한다. 카페에서 월요일이 되면 손님과 주말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화요일이 되면 월요일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식이다. 원활한 대화를 위해 전날 있었던 일을 메모해 놓는다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호주 사람인 올리도 일반적인 인사를 하는데, 하루는 골드코스트가 작은 동네라는 걸 실감했다. 주말에 축구를 했던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다니던 한인교회 목사님 아들과 올리가 같은 고등학교를 출신임을 알게 됐다. 그 후로 목사님 아들로부터 학창 시절 올리에 대해 들었는데 그는 유난히 아시안 친구들과 잘 어울렸다고 했다.
현재 올리는 아시안 사람이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아시안 여자 친구를 사귀며 아시안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제 23살밖에 되지 않은 그는 플랫화이트를 마시는데 날씨가 조금이라도 더워지면 아이스 라떼를 찾는다. 플랫화이트를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마이크로 폼’이 좋아서,라고 깔끔한 답변을 할 만큼 유식하다. 매일 아침 카페에 들르던 그가 2주 동안 안보인 적이 있었는데, 맞은편에 새로 오픈한 카페의 컵을 들고 가는 걸 봤다. 그 카페 주인은 대만 사람이다. 매일 찾아오는 손님을 놓쳐버린다는 것은 씁쓸함을 준다.
올리는 다시 카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밝게 인사를 건내던 그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아시안 친구들과 잘 어울릴 만큼 그는 아시안 정서를 잘 이해하고 있다. 맞은편 카페는 규모가 커서 그가 가진 그 다움을 충분히 발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규모가 큰 카페는 직원도 바리스타도 그만큼 많다. 일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바빠서 직원과 손님 사이에 친밀함을 쌓는 것이 쉽지 않다. 호주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자신의 카페를 찾을 때 가게의 규모보다 친밀함을 쌓을 여지가 충분한가를 먼저 본다. 스타벅스가 호주에서 실패한 이유이기도 하다. 호주 카페에서 커피 맛보다 더 중요한 것은 컨시스턴트한 커피다. 그러려면 바리스타는 손님을 기억해야 한다. 조금 더 가서 조금 더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 바리스타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비 온 뒤에 땅은 더 굳는다고 잠깐의 외도를 끝내고 돌아온 올리와 나는 더 단단히 친밀감을 쌓아가고 있다. 서로 연락처까지 주고받았고 파티에 초대까지 한다. 겉치레가 조금 섞이긴 했지만 맥주 한 잔 하자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기도 한다. 그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에 두 잔 이상 커피를 마시고, 간혹 여자 친구를 카페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카페에 이 정도 친밀함이 쌓이고서야 그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호주 카페의 단골손님을 보면 호주 사람 성향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 사람은 새로 오픈한 가게를 발견하면 호기심이 발동해 어떤 가게인지 알아내야 직성이 풀린다. 그리고 가게가 오픈하면 직접 확인까지 마친다. 호주 사람은 그런 쪽으로 전혀 발달하지 못했다. 그들의 호기심은 다른 곳에 있다. 익숙함과 잡담에 빠져 늘 가던 카페로 가서 비슷한 이야기를 실컷 하느라 새로 오픈한 카페마저 확인할 여유가 없다. 게다가 매일 커피를 마시러 카페를 오면서도 음식을 파는지 모르는 손님도 있다. 바로 눈앞에서 햄버거를 만들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저 커피 때문에 왔으니 커피 외에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호주에서 카페를 오픈하면 자리 잡는데 의외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호주 사람의 무심함 때문에.
올리가 카페에서 처음 먹은 음식은 비프 & 치즈버거 (Beef & Cheese Burger)다. 방랑 끝에 집에 돌아와 먹는 밥이라 각별해서였을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맛있다고 했다. 카페에서 파는 비프 & 치즈버거는 호주에서 클래식 비프버거 (Classic Beef burger)라고 부르는 메뉴다. 클래식이란 이름까지 붙인 이 호주 전통 메뉴는 육즙을 품고 그릴 위해서 구워진 소고기 패티에 체다치즈, 캐러멜 라이징 어니언, 레터스, 토마토, 피클 등을 올려 만든다. 소스는 토마토 렐리쉬 (Tomato Relish)와 아이올리 (Aioli)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프랑스어로 마늘 (Ail)과 기름 (Oli)의 합성어인 아이올리는 프랑스식 마요네즈로 마늘과 레몬즙 등을 넣어 일반 마요네즈보다 더 풍미가 좋다. 호주 사람의 아이올리 사랑은 대단해서 버거와 함께 감자칩을 먹을 때 토마토소스 (Tomato Sauce) 아니면 아이올리 소스를 달라고 할 정도다. 참고로 호주에서 케쳡 (Ketchup) 은 토마토소스라고 부른다.
음식에 감격한 올리는 베이컨 & 치즈 롤 (Bacon & Cheese Roll)이나 해쉬 베니 (Hash Benny) 등 다양한 메뉴를 맛보았다. 하지만 그가 손에 꼽는 메뉴는 버터밀크 프라이 치킨 버거 (Butter Milk Fried Chicken Burger)다. 호주 사람 취향을 저격한 메뉴로 호주 카페에서 쉽게 맛볼 수 있다. 물론 카페마다 맛의 차이는 극명하다.
버터를 만들 때 부산물로 얻어지는 버터밀크는 기호성이 좋고 영양가가 높은 산성우유로 닭고기를 숙성시킬 때 사용하면 고기의 식감를 좋게하고 풍미를 더한다. 프라이 치킨 버거에 들어가는 치킨은 가슴살이 아니라 치킨 타이 (Chicken Thigh)라고 부르는 다리 살을 쓰는 것이 좋다. 호주 사람은 퍽퍽한 가슴살을 좋아하지 않는다. 핫 윙 (Hot Wing)과 같은 메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쫄깃한 식감의 날개나 다리 살을 더 좋아한다.
다리 살을 버터밀크에 5분만 담갔다가 후추, 소금, 파프리카, 마늘 가루 등과 섞은 빵가루를 입혀서 기름에 튀겨 준다. 튀김옷을 입힌 크럼블 (Crumbled) 치킨에 레터스, 토마토, 피클을 올리고 태국 고추가 주원료인 스리라차 (Criracha) 소스와 마요네즈를 섞어 만든 스리라차 마요 소스를 곁들여 햄버거 빵에 끼우면 완성이다.
여기에 몇 가지 업그레이드를 했는데 첫 번째가 튀김가루이고 두 번째는 소스다. 빵가루에 파슬리, 오레가노 등의 향신료를 넣어 케이준 (Cajun) 스타일과 비슷한 매운맛을 내고 강렬한 스리라차 소스 대신에 할라피뇨 (Jalapenos)와 치폴레 (Chipotle) 소스를 마요네즈와 섞어 더 좋은 식감의 소스를 만들었다. 케이준 스파이스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을 만큼 유명한데 버터밀크 프라이 치킨이 바로 케이준 치킨에 가까운 맛을 낸다. 튀김가루를 입혀서 튀기면 크럼블이란 형용사를 붙이는데, 예를 들어 치킨까스는 호주에서 크럼블 치킨이라고 부른다. 호주 사람은 탄수화물에 예민해서 치킨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메뉴에 반드시 설명해둬야 한다.
낯선 땅에서 들여 온 요리를 경험이라 생각하며 즐기는 호주 사람과 달리 아시아 사람은 익숙한 것을 주식으로 선호한다. 밥때가 되면 한국 사람은 주로 한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올리는 늘 아시안 동료들과 밥을 먹으러 가는데 주로 아시안 식당으로 간다. 호주 사람과 다니는 모습을 보기 힘든 그는 백인의 탈을 쓴 아시안 같다. 하지만 혼자 점심을 먹을 때면 카페로 오는데, 고국의 음식 맛이 그리워 찾아온 사람 같다.
한국 사람은 호주에 인종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불행하게도 사실이다. 캐나다와 호주 양쪽에 살아본 사람은 캐나다 사람이 얼마나 친절한지 잘 안다. 호주 사람 대부분은 친절하지만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받게 한다. 동양인과 흑인을 조롱하는 눈으로 쳐다보거나 소리를 지르면서 원숭이 흉내를 내고 바나나를 던져서 뉴스에 나오는 호주 사람도 있다. 이런 문제는 결핍된 교육과 빈곤한 인성으로부터 생긴다. 올리는 똑똑한 만큼 따뜻한 사람이다. 그처럼 다름을 즐기며 사는 것이 다양성을 품고 가야하는 호주 땅을 밝고 따뜻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