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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Mar 04. 2020

#15 호주에서 바리스타

애니와 하프 스트렌트 라떼

오랜 기간 살 의도로 국가의 경계를 넘는 것을 이민이라 한다. 이민자는 기원국과 거주국 간의 취업, 교육, 생활수준 등의 차이로 인해 보다 좋은 기회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동한다. 기회의 땅이라 불렸던 미국은 가장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고, 중국은 가장 많은 이민자를 내보냈다. 캐나다와 호주도 많은 이민자를 받아들였는데, 살기 좋은 곳이기에 가능했다.


한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훌륭한 성적을 받아 들며 살만한 나라가 됐지만 ‘헬조선’이라 불리는 오명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삶이 가능한 곳을 찾아 떠나고 있다. 이웃인 일본은 한때 소니, 도요타 같은 기업을 앞세워 부자 나라로 군림했다. 도쿄의 땅 값으로 미국 땅 전부를 살 수 있다던 일본은 버블 경제 위기가 터지고 잃어버린 시대라 부르는 불황기를 보냈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수많은 해외 관광객과 이민자를 만들어냈는데, 어디든 갈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충분했다. 하와이, 괌, 사이판, 호주 케언즈나 골드코스트 같은 아열대 기후의 휴양지로 많은 일본인이 모여들었다. 골드코스트에 살고 있는 일본 이민자 대부분은 그때 온 사람들이다.


일본과 다르게 중국 이민자는 열약한 생활환경을 벗어나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이민을 해왔다. 크기에 걸맞게 중국 이민자는 대략 1,800만 명이나 된다. 동포끼리 잘 뭉치고 본국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중국 이민자는 화교라고 불리며 중국 밖의 중국을 만들어 가고 있다.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는 말처럼, 수많은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그들에게 호주 골드코스트도 예외는 아니다.


카페의 중국인 단골손님 중 가장 사랑스러운 애니는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나 어릴 적 호주로 이민 왔다. 호주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하고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병원의 접수대에서 일하는 그녀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매일 커피를 마신다. 그녀는 전형적인 아시안-오스트레일리안 (Asian-Australian)이다.


애니는 스몰 사이즈 하프 스트렝스 (Half Strength) 라떼를 마신다. 그녀는 하루에 한 잔의 커피만 마시는데, 커피 다음으로 핫 초콜릿을 마신다. 그 이상의 커피는 불면증을 가져온다고 했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가장 작은 사이즈에 에스프레소 절반의 양으로 만든 커피다. 호주 커피 기준으로 보면 약한 커피다. 카페인에 약한 사람은 이렇게해서라도 커피를 마신다. 아니면 카페인이 없는 디카페인 커피 (Decaffeinated Coffee)를 마셔야 한다.


디카페인 커피는 말 그대로 카페인을 줄인 커피이다. 커피에서 카페인을 최대한 없애면서 커피의 향과 맛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만들어졌다. 카페인을 제거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물 또는 용매를 이용하거나 이산화탄소 추출법 등이 있다. 원두를 물에 담그면 카페인과 여러 성분이 추출되는데 이런 방법으로 카페인을 없애는 방법을 널리 사용한다. 디카페인이라고 해서 카페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1-2% 정도 양이 남아 있지만 카페인이 없는 커피로 분류한다. 카페에서 디카페인 원두가 떨어지면 손님에게 물어 소량의 에스프레소를 넣고 커피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커피의 향과 맛만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호주 카페에서는 하프 스트롱 (Half Strong)이라고 해도 되는 이 표현보다 하프 스트렝스 (Half Strength)란 표현이 주로 쓰인다. 강도를 뜻하는 스트렝스는 에스프레소의 강도를 의미하고 하프는 양을 절반으로 줄여달라는 것이다. 강도를 1/4로 줄여달라는 손님도 있는데, 쿼터 스트렝스 (A Quater Strength)로 통한다. 하프 스트렝스는 약한, 이라는 단어 윅(Weak)을 대신 쓰기도 한다. 하지만 헬스로 몸을 다지고 타투로 치장하길 좋아하는 다부진 호주 사람은 윅이라는 단어를 은근히 싫어한다.


카페에서 여러 잔의 커피를 동시에 만들다 보면, 커피마다 설탕이나 우유, 에스프레소 강도 등이 달라 제각각의 커피를 만들게 된다. 이 때 뚜껑에 어떤 커피인지 적어 놓는다. 하프 스트렝스 커피의 경우 간단히 쓸 수 있는 WEAK 이란 단어를 적어 놓는데, 대놓고 싫다고 표현하는 호주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면 커피를 주문할 때 윅 커피라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대부분 하프 스트렝스 커피를 달라고 한다.


애니는 하프 스트렝스 커피를 마시지만, 그녀가 마시는 커피의 강도는 다른 나라에서 표준이 되기도 한다. 강한 커피를 지향하는 호주 커피는 다른 나라 커피에 비해 에스프레소 양이 많다. 호주가 아닌 곳에서 라떼를 주문하면 호주의 하프 스트렝스 라떼가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호주 커피는 레귤러 사이즈에 에스프레소 더블 샷을 기본으로 넣는다. 그래서 더블샷 (Double Shot) 커피를 달라는 말에는 레귤러 사이즈를 암시한다. 그녀는 호주에 오래 살아 호주 사람이 됐지만, 커피는 호주 사람처럼 마시지 못하고 있다.


애니가 일하는 병원은 쇼핑몰 상가에 위치해 크지 않지만 10명 내외 직원이 일하고 있다. 그녀와 한 동료만이 종종 카페로 커피를 마시러 온다. 나머지는 아침에 픽업해가는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는 직원들은 돌아가면서 아침마다 커피를 사러 오는데, 카페는 사는 사람이 마음껏 정한다고 한다. 매일 커피를 마신다던 그녀가 정작 내 카페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만 오는 것이 의아해 물어서 알게 됐다.


커피를 마시는 호주 사람은 컨시스턴트한 커피를 찾아 언제나 같은 카페에서 같은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애니의 경우라면 서너 명 되는 사람이 매일 다른 카페에서 만든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커피 맛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호주에서 보기 힘든 경우다. 한국이라면 직장 상사가 커피 한 잔 사다 줄래, 라고 부탁했을 때, 괜찮은 카페에 가서 괜찮은 커피를 사다 주면 된다. 호주에서 직장 상사가 커피 한잔 사다 주라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그랬다면 그가 다니는 카페로 가야 한다. 가끔 카페 앞에서 다른 카페의 컵을 들고 가다 마주친 단골손님은 상사가 시킨 것이라며 컵을 흔들어 나를 안심시키기도 한다.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커피를 부탁하는 사람이 마시는 커피를 가져다줘야 되고, 그 카페의 바리스타는 그가 마시는 커피를 만들어 줘야 된다.


애니는 커피를 주문할 때, 휴대폰으로 미리 메시지를 보내는 특별한 손님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에도 연락처를 주고받은 사이가 됐다. 그녀의 사랑스러움에 경계심이 무너졌다고 본다. 바리스타도 사람인지라 손님의 매력에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이번 여행으로 호주 골드코스트에 왔을 때, 하늘에서 떨어진 것 마냥 혼자였다. 휴식을 누리다 카페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게 되면서 커피 만드는 일에 빠져들었다. 내 카페까지 오픈하면서 소소하게 바쁜 일상을 보냈다. 쉬는 날이면 눈부신 풍경을 바라보면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했다. 간간이 ‘마운틴 템보린’ 산자락에 있는 와이너리에서 로컬 와인을 마시고 ‘스핏’으로 자전거를 타며 일상에 특별함을 더했다. 어떤 날은 ‘바이런 베이’까지 가서 돌고래가 넘실대는 바다를 구경하기도 하고 기차를 타고 브리즈번 ‘사우스 뱅크’에 가서 아트 갤러리를 둘러보고 공연을 즐기기도 했다. 골드코스트는 무엇을 하며 살아도 삶에 풍요와 여유를 충분히 허락했다. 낭만을 실현하는데 혼자보다 둘이 낫다지만, 연애보다 하고 싶은 것을 먼저 하고 있다.



마운틴 템보린의 와이너리



비슷한 나이대의 남녀가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이 궁색을 떨만한 일은 아니다. 나는 건강한 솔로이고 근사한 데이트에 필요한 조건은 갖추고 살고 있다. 이런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가더라도 사랑스러운 손님과 친밀해지는 것 또한 충분히 근사하다.


아침에 커피를 사가는 애니는 가끔씩 오후에 메시지를 보낼 때가 있다. 지금 가도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카페에 오면 핫 초콜릿을 마시면서 말이다. 그녀는 퇴근하고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면 이렇게 카페에 들러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약속 장소로 간다. 오후가 되면 그녀는 대단히 지쳐있다. 병원은 매일 아주, 대단히 바쁘다고 한다. 모든 의료비용을 국가가 보조하는 호주에서 병원은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다.


호주의 무상 의료 복지는 이민을 결정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비싼 비용 때문에 죽을 정도가 아니라면 병원에 가지 못하는 미국에 비해 한국도 훌륭한 의료 보험제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일부 진료비와 약값을 개인이 부담하는 한국과 다르게 호주는 진료비 전부를 국가가 부담하고 개인은 약값의 일부를 부담한다.


호주 의료 복지가 사람 중심이라는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어린아이들이 있는 집은 아이가 아플 때 의사가 집으로 방문한다. 홈닥터 (Home Docter)라고 하는 서비스는 노인이나 장애우 등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간 환자는 비자나 비용과 상관없이 먼저 치료하고 나중에 비용을 청구한다. 불법체류자도 아프면 치료를 먼저 받는데, 미국과는 크게 비교되는 부분이다. 호주에서 아픈 사람이 응급실 입구에서 돈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해 죽는 일이 없다.


호주 시민과 다르게 외국인은 간단한 진료 상담을 받아도 6만 원 정도 비용을 내야한다. 아파서 응급실에 실려 가기라도 하면 70만 원 정도 비용이 발생한다. 영주권 없이 호주에서 출산하려면 최소 천만 원 정도 비용을 준비해야 한다.


애니는 병원에 아픈 사람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하지만, 그녀의 수고가 더해져 호주는 좋은 환경과 매력이 넘치는 나라가 됐다. 최근 호주는 이민의 문을 닫고 있다. 풍요는 호주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고 절박함은 외국인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도록 했다. 후한 복지로 나라 곳간에 돈이 떨어졌다는 풍문도 파다하다. 호주는 자국민의 삶을 지키고자 이민자를 제한해 가고 있다. 덕분에 이민 정책은 국가의 돈을 쓰는 사람보다 국가에 돈을 쓰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쪽으로 가고 있다. 국가도 돈이 있어야 복지를 하지 아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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