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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Feb 24. 2020

#14 호주에서 바리스타

자넷과 카푸치노

1월 26일은 ‘오스트레일리아 데이’이다. 1788년 1월 26일 영국 함대와 영국 이민자들이 시드니 록스에 최초로 상륙한 날을 기념하는 호주 최대 국경일 중 하나다. 이날을 국가적 ‘개척의 날’로 여겨 다양한 행사를 열어 크게 기념해 왔다. 카페마다 커먼웰스 플래그 (Commonwealth Flag) 라 불리는 호주 국기를 걸어 두고 밤이 되면 폭죽까지 터트려 한국의 광복절이나 미국의 독립기념일에 버금가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호주 시민권을 신청한 이민자가 시민권을 받는 날도 이날이다. 미국보다 짧은 역사를 가진 다양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이 날민큼은 철철 넘치는 애국심을 볼 수 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호주를 방문하는 한국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데이 분위기에 휩싸인 호주 사람 틈에서 흥을 내지만, 이 날은 사실 에보리진 (Aborigine)이라 불리는 호주 원주민에게 가장 치욕적이고 슬픈 날이다. 그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긴 날이자 침략자들은 이를 자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영화 ‘오스트레일리아’ 에서 에보리진의 모습



부메랑을 날리는 에보리진은 광활한 호주 땅의 본래 주인이다. 서유럽 문명사회와 접촉하기 이전에 약 30만 명의 원주민이 50여 개의 부족으로 흩어져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 이민자들이 시드니에 상륙한 후로 수만 명의 원주민이 질병과 기아, 학살 등으로 죽었다. 침략자들이 세운 정부는 보호와 동화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원주민을 유보지로 쫓아냈고 어린아이들은 강제로 외딴섬에 특수 시설로 보내져 문명화 교육을 받도록 했다.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았던 비극적인 침탈의 역사는 ‘휴 잭맨’ 주연의 영화 오스트레일리아 (Australia, 2008)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호주는 집이 없는 사람에게 렌트 보조금을 줄 정도로 복지가 좋은 나라이지만, 도심에서 노숙자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은 대낮에 술병을 들고 거리를 서성이며 혼잣말을 하고 약에 취해 거품을 물며 길바닥에서 잠을 잔다. 노숙자 대부분은 에보리진이다. 에보리진을 부시맨처럼 까만 피부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동안 혼혈화된 탓에 백인처럼 생긴 에보리진도 있다. 노숙을 하는 에보리진은 사회로부터 심각하게 소외돼 있다.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분수대에서 몸을 씻고 화단에서 대소변을 보기도 하며 건물들 틈새에 들어가 잠을 잔다. 이런 에보리진도 렌트 보조금을 포함해 무상 복지를 받지만 대부분의 돈을 술과 마약, 도박에 탕진한다.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있는 것이다.


자넷은 거리에서 노숙하는 에보리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카페에 커피를 사러 온다. 커피를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커피를 주문하고 돈을 낸다. 카페 근처에서 구걸을 하며 은행 입구에서 잠을 자는 그녀는 구걸한 돈으로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자넷은 설탕 다섯 스푼을 넣은 카푸치노를 주문해 마신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지 않아 마지막에 차가운 밀크를 조금 넣어달라고 한다. 이것만 봐도 그녀가 꾸준히 커피를 마셔왔음을 알 수 있다. 설탕이 다섯 스푼이나  들어간 커피는 달디 단 커피 맛 우유가 된다. 주문한 커피는 그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네 스푼의 설탕만 넣고 밀크를 뜨겁지 않게 스팀 해서 만든다. 이미 뜨겁게 스팀한 밀크에 차가운 밀크를 섞게되면 질감이 통일 되지 않아 좋은 커피를 만드는 방법이 못 된다. 커피가 맛있는지 커피 살 돈이 만들어지면 카페에 온다. 어떤 날은 두 잔의 커피를 마시기도 한다. 대부분 계산할 동전을 들고 오지만 지폐를 들고 올 때도 있고 돈이 없으니 내일 갖다 줘도 되냐며 2달러만 던지고 갈 때도 있다. 약에 취해 횡설수설하더라도 계산은 나름 정확하다. 부족했던 돈을 잊지 않고 지불하니 말이다.  


호주는 노숙을 하는 사람도 컨시스턴트한 커피를 선호하는 것 같다. 자넷은 상가에 5개나 더 되는 카페가 있지만 언제나 내 카페로 온다. 아마도 그녀의 출입을 막거나 주문을 거절하는 카페도 있을 것이다. 왜냐면 상가 관리 사무소 매니저는 종종 노숙자를 쫓아내면서 가게마다 이들에게 물건을 팔지 말라고 당부하고 가기 때문이다.


상가 주변에 대략 10명 미만의 노숙자들이 있다. 이들을 놓고 상가 관리 사무소 보안 요원들과 경찰들은 매일 소탕 작전을 펼친다. 이 동네 경찰의 유일한 업무일 것이다. 거리에 눕거나 앉아 있던 노숙자들은 이들이 오면 일어나 걸어다니며 비웃는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노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에보리진은 정부가 지정한 60여 개의 원주민 캠프에서 살고 있는데 무지와 무관심 때문에 몸은 성치 않고 평균 수명은 호주 시민에 비해 17년이나 짧다. 70%는 난청을 겪고 있으며 2.5%는 뇌기능 장애가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비위생적인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해야 한 데다 임신 기간 중에도 술과 마약에 의존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3학년의 경우 40%가 문맹이며 평균 33%만 졸업에 성공한다. 원주민 가정의 수입은 호주 평균에 비해 3배나 작고 대부분이 보조금이며 젊은 사람은 50%나 실업 상태에 있다.


호주 원주민 문제는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호주의 감추고 싶은 어두운 단면이다. 호주 교도소 전체 수감자의 4분의 1, 소년원의 59%가 원주민이다. 청소년의 수감률은 다른 인종과 비교해 28배나 높다. 실제로 빵 한 개를 훔치거나 은행 문 앞에서 잠을 잔다는 이유로 체포된 원주민도 있다. 수많은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원주민에게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일그러진 이미지를 가진 그들에 대한 차별은 해를 거듭할수록 심해지고 있다. 질병과 빈곤은 약과 식량으로 해결할 수 있다지만 편견과 차별은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절망은 에보리진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켰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종종 카페에서 음식을 사서 노숙자 손에 쥐어주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구걸하는 노숙자에게 망설임 없이 이만 원이나 되는 지폐를 쥐어주는 사람도 있다. 단골손님 알렉산드리아는 카페에서 식사를 마치고 샌드위치를 추가로 주문하더니 길바닥에서 잠자는 자넷을 깨워 손에 쥐어주고 왔다.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훔치던 그녀의 모습이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경험한 한국인에게 에보리진의 역사는 공감을 일으켜서일까. 호주의 많은 한인 교회는 원주민 문제를 알리고 도움을 주는데 앞장서고 있다. 많은 한국인 선교사가 상처 받은 원주민의 치유와 복음화를 위해 원주민 캠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호주 한인교회들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원주민 봉사활동을 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광고한다. 쉽게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게 닫힌 그들의 문을 꾸준히 두드리고 있다. 그들을 따뜻하고 밝은 햇살 아래로 불러내기 위해서.


호주 정부도 마냥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원주민이 배우고 일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만들고,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원주민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 30조 원 가까이 되는 예산을 사용했다. 애석하게도 이런 노력은 충분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아프고 처절하다.


원주민의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심각해져 가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배고프고 아프며 외로움과 괴로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야기한 문제라며 거론하는 마약 문제는 탐닉보다 탈출에 가까운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꼬여버린 것일까. 이 문제에 답이 있었다면, 호주 정부가 황급히 해결해 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비슷한 역사를 겪고도 상대적으로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을 통해 답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노숙자 중에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자넷이 유일하다. 다른 노숙자들은 술병이나 2리터나 되는 콜라 병을 들고 다닌다. 그녀의 행색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지만 나는 그녀를 다 알지 못한다. 고작 마시는 커피 정도만 알 뿐이다. 멀쩡해 보이다가도 어떤 날은 약에 취해 침을 흘리며 길바닥에서 쓰러져 잠을 자는 그녀는 아주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은 그녀의 일상을 넘어 그녀의 인생, 그들의 인생과 역사를 가로지르는 아주 긴 이야기일 것이다.


침략과 수탈은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남으로부터 빼앗은 땅을 고결한 땅이라 할 수 없다. 원주민 문제를 대하는 호주 정부의 방식은 일방적이다. 그 방식의 반대는 원주민의 땅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이 지독한 절망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겠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했다. 광활한 호주 대륙 위로 펼쳐진 하늘이라면 감히 손바닥으로 어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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