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과 아몬드 플랫화이트
때로 인생이란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의 문제, 라고 미국인 작가는 말했다. 작가이자 커피 애호가인 무라카미 하루키는 커피를 다룬 글 중에서 이 문장이 제일 흡족스럽다고 했는데, 나도 동감이다. 내 카페 손님 중 이 문장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을 꼽으라면 브라이언일 것이다.
청남방에 반바지를 입고 챙이 짧은 모자와 안경을 쓴 브라이언은 전동 휠체어가 아니면 외출을 못할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그는 종종 두꺼운 책을 들고 전동 휠체어를 타고 카페로 온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어 내려가는 그는 늘 햇살이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전동휠체어를 입구에 세우고 걸어 들어와 주문했지만, 실내로 걸어 들어오지 못하고 손을 들어 주문을 부탁할 만큼 건강이 안 좋아졌다.
한동안 카페에 뜸하던 브라이언을 길가에서 마주칠 때면, 건강이 너무 안 좋아 커피를 마실 수 없다며 애석해한다. 나이 든 손님 대부분 비슷한 일을 겪는다. 호주 사람에게 카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가는 곳이다. 책을 읽거나 수다를 떠는 건 굳이 카페가 아니라도 된다. 그러니 꾸준히 커피를 마시러 오던 손님이 오지 않는다면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로 해석할 수 있다. 건강 문제가 아니라면 더 슬픈 소식을 각오해야 한다.
손님이 건강 때문에 커피를 마실 수 없다고 말하면 바리스타로서 약간의 죄책감을 느낀다. 커피는 건강한 사람에게 활력과 위로를 준다. 하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 카페인과 우유는 해가 된다. 커피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건강보다 중요할 수 없다.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없다면, 커피는 머나먼 곳에 있는 목성 같은 존재와 다를 바 없다.
브라이언은 건강과 관계없이 언제나 두꺼운 책을 들고 카페를 찾는다. 그가 전동 휠체어 주차를 무사히 마치면 다가가 주문을 받아 주고 있다. 그는 전보다 더 심하게 떠는 손으로 신용카드를 내민다. 짧은 순간에도 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브라이언은 두 개의 스위트너를 넣은 아몬드 플랫화이트를 마신다. 늘 테이크어웨이 (Take away) 컵에 주문해 마시는데, 머그가 무거워 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포장을 뜻하는 미국식 영어는 테이크아웃 (Take out)이라고 하지만 호주에서는 테이크어웨이가 일반적이다. 그가 마시는 커피는 레귤러 사이즈 컵에 에스프레소 싱글 샷을 넣고 뜨거운 물을 절반까지 채운 다음 아몬드 밀크를 섞는다. 카페인과 우유를 각각 절반씩 줄인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로우 슈거 한 스푼 넣은 아몬드 플랫화이트를 마셨을 것이다. 흐르는 세월 앞에서 인간의 몸뿐 아니라 그가 마시는 커피마저도 약해지는 것이다.
브라이언은 토요일이면 아들과 함께 카페에 오는데 베이컨&에그 롤 (Bacon&Egg Roll)을 커피와 함께 먹는다. 바싹 익힌 크리스피 (Crispy) 한 베이컨에 토스터로 눌러 납작하게 구운 다음 절반으로 잘라줄 것을 정중히 부탁한다. 그도 호주 사람인지라 컨시스턴트 한 커피와 음식을 원한다. 늘 똑같이 만들어 나가는 커피와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혼자 와서도 종종 먹던 것으로 달라고 한다.
브라이언 아들은 매번 코코넛 밀크가 있는지 묻고는 스몰 사이즈 아몬드 플랫화이트를 주문한다. 규모가 작은 카페는 코코넛 밀크를 찾는 사람마저 적다 보니 준비하지 않는다. 그는 없다는 말에 쿨한 말투로 괜찮다며 아몬드 플랫화이트를 주문한다. 코코넛 밀크를 준비하지 않고서 그를 카페 단골손님으로 만들 수 없다. 호주 사람이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의 직업은 작가였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 은퇴하였지만 작가로서 풍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심하게 떠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간간이 펜을 꺼내 들고 메모하는 모습은 작가로서의 삶이 생업 그 이상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는 더 이상 책을 쓰지 않지만 정부의 복지 덕분에 충분히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건강만 허락한다면 매일 카페에서 아몬드 플랫화이트와 베이컨&에그 롤을 즐길 수 있다. 호주 정부가 쏘는 것이다.
호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당사자는 더 필요하다고 불평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호주 노인 복지는 당장 늙어도 괜찮겠다고 생각될 만큼 좋다. 복지 때문에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이민지 캐나다, 뉴질랜드와 비교하더라도 연금 액수는 호주가 가장 많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호주에서 남자는 65세 여자는 60세가 되면 국가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었다. 최근 정책 변화로 인해 현재는 67세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다. 하나 더 조건이 있다면 호주에서 최소 10년 이상 거주해야만 한다. 지급되는 연금은 두 가지다. 먼저 기초 노령연금 즉 국가에서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주는 연금이고 다른 하나는 개인연금 즉 퇴직금이다. 기초 연금은 1인당 2주마다 50만 원 정도 나온다. 이때 소득이 따로 있으면 천 원의 소득당 500원 정도 차감하고 연금이 나간다.
호주에서 고용되어 일하면 퇴직금을 개인연금 (Superannuation)에 보관한다. 퇴직금은 한국과 비슷하게 10% 가까이 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비즈니스라도 직원의 인건비를 지급할 때 개인연금까지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처럼 빈번하게 퇴직금 분쟁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자영업 같은 스몰 비즈니스의 경우, 퇴직한 후에 퇴직금을 산정하고 지불하다 보니 여차하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 호주 모든 비즈니스는 매주 급여가 지불될 때 원천징수되는 세금과 개인연금까지 계산이 되고 분기마다 세금과 함께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비 없는 벌금 맛을 보게 된다. 이것만 보아도 법과 제도가 약자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호주 개인연금은 몇 년 전부터 70세가 되면 받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전에는 조기수령도 가능했지만 지금은 어렵다. 개인연금 수령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다. 회사에서 납입한 금액이 적으면 적게 받고 많으면 많이 받는 것이다. 이것도 몇 년에 걸쳐 2주마다 받는다. 외국인의 경우도 호주에서 일하는 동안 퇴직금 개념의 개인연금을 받는데, 비자가 만료되어 출국할 때 모두 받을 수 있다.
펜션 (Pension)이라고 하는 호주 연금은 매주 수요일에 지급된다. 연급 지급일이 되면 평소보다 더 많은 노인을 카페나 도박장에서 보게 된다. 기초 연금에 개인연금과 렌트 보조금 등 수많은 복지혜택을 합하면 호주 노인의 삶은 척박할 수 없다. 그러니 연금을 받으면 착실하게 다 쓰는 것이다. 덕분에 호주에서 노인이 굶거나 추워서 죽었다는 뉴스는 보기 힘들다. 호주에서 그런 뉴스는 외계인 침공 뉴스만큼이나 쇼킹한 것이다.
호주는 연금제도 외에 에이지드 케어 (Aged Care)라는 노인을 돕는 복지도 잘 되어 있다. 카페에 에이지드 케어 명찰을 단 보호자와 함께 오는 노인은 꽤 많다. 필요한 사람에 한해 국가에 신청하면 무상으로 도움을 받는다. 보호자는 다양한 일을 도와주는데, 집안 청소나 식료품 쇼핑 외에 커피를 마시러 카페에 함께 가기도 한다. 호주에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란 집안 청소나 식료품을 사는 것만큼 중요하니깐.
브라이언도 에이지드 케어 명찰을 단 보호자와 함께 카페에 올 때가 있다. 보호자는 그가 테이블을 잡고 주문을 마치면 곧장 자리를 뜬다. 한국이라면 보호자에게 커피 한 잔 사주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익숙한 광경일 테지만 호주는 그렇지 않다. 호주 모든 노인이 똑같지 않겠지만, 그는 카페에서 주말에 아들과 함께 올 때를 제외하고 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두꺼운 책을 읽으며 커피 한 잔이 안겨다 주는 따스함을 만끽하는 것이리라.
호주 카페는 오전만 늘 바쁜데, 사람들이 저마다 카페인으로 잠을 쫓아내고 활기찬 하루의 시작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8시에 오는 손님은 8시에, 9시에 오는 손님은 9시에 반드시 온다. 그러니 열심히 커피를 만들다 약간의 여유라도 생기면 오지 않은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브라이언처럼 건강이 좋지 않은 손님은 걱정이 된다. 그럴 때면 카페에 나타나 여전히 커피를 마실 수 있다고 안심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