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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Jan 31. 2020

#10 호주에서 바리스타

로버트 & 빅토리아의 더블 에스프레소 & 소이 플랫화이트

아이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호주에서 애완동물은 아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남자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는다. 카페에 있으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을 쉽게 본다. 이 산책마저도 일관성이 있어서 카페 손님이 아니더라도 인사하는 사이가 된다.


애완동물이 극진히 대접받는 호주에 무수히 많은 공원은 사람과 동물이 지연스레 공존하는 공간이다. 사람은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지만 다양한 동식물은 공원에서 제 집 마냥 살아간다. 그리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화장실, 바비큐 시설, 식수대, 샤워부스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는데 식수대마다 아래를 보면 강아지를 위한 식수대도 붙어 있다. 공원에서 남자를 위한 공간은 남자화장실뿐이지만 강아지를 위한 배려는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 배려만큼이나 지켜야 할 규칙 또한 다양한데, 여기서 호주 사람의 큰 장점이 나온다. 바로 시민 의식이다. 호주 사람은 유난히도 준법정신이 투철한데 자연에 관한 것이라면 지나칠 정도다. 낚시를 예로 들면, 낚시가 허용되지 않은 곳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는 것처럼 가던 길을 멈추고 신고를 한다. 낚시터마다 잡을 수 있는 생선의 길이를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는데, 이를 어긴 사람은 호주에서 간첩 취급을 받는다.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에서 무탈하게 살아가는 공작새



한국 카페와 달리 호주 카페는 실내 면적만큼 실외 면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호주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서 햇볕을 쬐고 실내에서 달고 온 답답함을 벗어던지려 실외에 앉으려는 사람이 많다. 강아지를 데리고 온 사람이라면 더욱이 실외에 앉는다. 로버트와 빅토리아처럼.


로버트와 빅토리아는 나이가 지긋한 호주 백인 부부로 서로에게 다정다감하다. 결혼해서 세 자녀를 낳고 손자까지 가진 그들은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둘은 이야기할 때마다 눈가에 웃음을 머금고 서로를 보는데, 요즘 말로 꿀이 떨어진다. 은퇴할 나이도 다 되어가고 종종 그들은 함께 여행을 다니는데, 지난해 이집트 여행 중에는 어떤 이집트 갑부가 그녀를 데려가기 위해 지참금으로 제안한 낙타 100마리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배려하고 그녀는 그의 배려를 충분히 누린다.


로버트는 헝가리 출신으로 호주에서 직업은 외과의사이고 빅토리아는 영국 출신으로 은퇴 후 집에서 강아지를 돌보며 살아간다. 그는 저명한 의사로 그녀를 골드코스트에 남겨두고 종종 출장을 떠난다. 그녀 말에 따르면 다른 지방에서 강의를 하고 세미나를 참석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 자녀는 두 사람으로부터 떨어져 시드니에 살고 있지만 강아지가 있어서 그런지 그녀는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 강아지는 네 번째 자녀나 다름없다.


빅토리아는 스몰 사이즈 소이 플랫화이트를 마시고 로버트는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호주에서 더블 에스프레소는 2샷 에스프레소를 말한다. 까다롭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마시는 커피는 몇 가지 옵션이 함께 한다. 에스프레소 2샷을 작은 머그에 담고 에스프레소 추출을 받아내는 2개의 크레머 (Cremer)에 각각 뜨거운 물과 꿀을 조금 담는다. 호주 사람은 대체로 커피를 천천히 마시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중간에 식어버린 커피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뜨거운 물을 따로 부탁한다.


나는 고등학생이 돼서 생애 첫 에스프레소를 맛보았다. 한국에 오픈한 스타벅스에 들어가 메뉴판 첫 번째에 위치한 커피를 주문했는데 그것이 에스프레소였다. 커피라고는 믹스커피밖에 모르던 때라 일어난 참사였지만, 15년이 흘렀음에도 생생할 정도로 쓰디쓴 맛없는 커피였다. 그렇게 에스프레소에 대한 끔찍한 경험을 안고 간 유럽을 여행하다 들른 이탈리아의 한 커피 바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쓰지만 맛있는 커피였다. 두 커피의 간극은 남극과 북극만큼이나 멀었다,라고 기억하고 있다.


에스프레소 머신은 1906년 이탈리아에서 발명되었는데 현재 대부분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만들 정도로 커피의 표준이 됐다. 세계 최대 커피 기업인 스타벅스가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도 미국 최초로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는 스타벅스 성공의 주춧돌이었고 지금도 카페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호주는 유럽에서 떨어져 나온 섬이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만든 유럽식 커피를 마신다. 이미 세계는 드립 (Drip)이나 에어로프레스 (Aeropress) 등의 기기를 이용해 커피가 품은 더 좋은 맛을 탐색해가고 있지만 호주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프레소에 밀크를 넣은 화이트 커피를 마시고 있다.


한국 카페에서는 레귤러 사이즈에 에스프레소 싱글 샷을 넣는다면 호주는 더블 샷이 기본이다. 손님이 주문할 때, 더블 샷 커피라는 말이 레귤러 사이즈를 말한다고 보면 된다. 이렇듯 호주는 강한 커피를 즐긴다. 에스프레소 더블 샷은 36g 정도의 작은 양이지만 마시는 사람의 가슴을 충분히 흔들 수 있다. 호주 커피의 바탕이 되는 에스프레소는 호주 커피의 심장과 같은 존재다. 심장이 제대로 뛰지 않으면 멀쩡한 몸이라도 제대로 기능할 수 없듯이 에스프레소 맛에 따라 커피의 맛은 크게 달라진다.


커피 원두를 에스프레소로 추출하면 크레마 (Crema)라는 옅은 황금색이나 갈색 크림 층이 생긴다. 이는 커피에 포함된 오일이 증기에 노출되어 만들어지는 것으로 커피의 향과 따뜻함이 오래가도록 해주는 옷 역할을 한다. 크레마의 아로마는 커피를 마시기 전부터 코끝을 유혹하며 부드럽고 상쾌한 단맛을 지니고 있어 에스프레소의 백미로 통한다. 크레마는 에스프레소 추출 시 짧은 시간에 커피를 불리고 압력으로 밀어내어 생기는데, 에스프레소가 커피의 표준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크레마의 색깔과 그라데이션 정도를 통해 에스프레소가 잘 추출되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블랙커피를 마실 때 크레마가 많아 커피 잔의 표면을 충분히 덮고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지만, 크레마는 옷처럼 적당히 두꺼운 것이 좋다.


에스프레소는 양이나 추출 시간에 따라서 다른 커피 메뉴가 되는데, 아무것도 넣지 않은 순수한 에스프레소를 에스프레소라고 한다. 솔로는 에스프레소 1잔, 도피오는 2잔을 말한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는 가장 진하게 추출되는 순간에 추출을 멈추는데 신맛은 강해지고 카페인 양은 적어진다. 추출 시간이 총 30초라고 하면 20초 정도에 멈추면 리스트레토가 된다. 카페인은 커피 추출 버튼을 누르고 15초 정도 지나야 나오기 시작하는데 중간에 추출을 멈추니 카페인 양이 강제로 줄어드는 것이다. 룽고 (Lungo)는 반대로 에스프레소 추출을 더 오래 해서 커피의 쓴맛을 추가로 만들어내는 커피다. 당연히 카페인의 또한 많아진다.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부은 커피가 아메리카노인데, 호주에서 아메리카노라 하지 않고 롱-블랙 (Long Black)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스프레소를 숏-블랙 (Short Black)이라고 부른다.


로버트와 빅토리아는 내가 만든 커피를 마시기 위해 걸어서 10분 거리를 온다. 그들이 사는 아파트 1층에 장사가 잘 되는 카페가 있는데, 호주에서 유명한 ‘캄포스’ 커피를 사용하고 수준 높은 카페 요리를 맛볼 수 있다. 두 사람은 그 카페를 뒤로하고 내 카페까지 온다. 빅토리아의 남동생이 이 근처에 사는데 지나가면서 한 번 들를 이후로 쭉 여기로 오는 것이다. 강아지를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넓은 실외가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로버트도 빅토리아도 올 때마다 칭찬을 과하게 하고 간다. 호주 사람이 대체로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지만, 두 사람은 커피나 늘 먹는 스크램블 에그와 구운 버섯에 대해 구체적이고 과한 칭찬을 해서 쑥스러움을 유발한다. 


내가 살아온 세월의 2배가 넘는 삶을 살아온 로버트와 빅토리아는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2배 이상 되는 삶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들은 카페가 한가해지는 늦은 오전 시간에 와서 손님이 뜸할 때면 언제나 먼저 안부를 묻고 대화를 걸어온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쩌다 여기 있는지. 왜 커피를 만들게 되었고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같은 농밀한 질문을 한다. 다정다감한 두 사람과 대화는 표면과 내면의 차이를 새삼 실감하게 한다. 내면을 아우르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친밀감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물론 시작은 좋은 커피가 있으면 좋겠다.


호주 카페에서 일하다 보면 시간이 잘 간다. 새벽에 카페 문을 열어 출근 시간 전까지 몰려든 사람들을 상대하고 한숨 돌리고 나면 모닝 티-타임이 시작된다. 점심시간을 넘기고 오후 커피까지 만들고 나면 금방 오후 3시가 되고 퇴근해야 한다. 이렇듯 지루하지만은 않은 하루가 매일 반복되는 곳에서 쉽게 새로움을 만끽하는 것도 무리다. 하지만 로버트나 빅토리아 같은 손님과의 대화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를 상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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