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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Jan 27. 2020

#09 호주에서 바리스타

조앤과 바닐라 라떼

카페 맞은편 보석상에서 일하는 조앤은 오래전 캐나다에서 이민 왔는데, 아담한 체구에 늘 비슷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보석상은 매일 8시에 문을 여는데, 그녀는 30분 전에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출근한다. 이런 그녀가 매일 아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


조앤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호주에서 카페를 오픈하면 혹독한 스타트를 각오해야 한다. 호주 사람은 중독이란 표현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커피에 의지해 살아간다. 그들은 집이나 사무실에 커피 머신이 있어서 언제나 커피를 마실 수 있음에도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만든 프로퍼 (Proper)한 커피를 마시러 굳이 카페에 간다. 여기까지만 보면 호주만큼 카페 사업하기 좋은 곳은 없어 보인다.


호주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은 카페에서 하루 1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지만, 문제는 지독할 정도로 가던 곳만 간다는 것이다. 좋은 위치에 번듯한 인테리어로 카페를 차려놓아도 눈길만 주며 지나쳐 가던 카페로 간다. 공짜로 커피를 준다고 해도 가던 곳으로 갈 것이다.


가령 매일 카페에서 커피를 사 먹는 사람이 어쩌다 새로 오픈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하지만 커피 맛의 훌륭함과는 상관없이 다음날이면 다니던 카페로 간다. 어쩌다 또 카페를 찾아 자신이 원하는 커피를 커스터마이징 (Customizing) 한다면 좋은 징조다. 이때 우유의 온도나 에스프레소의 강도 등을 물어보고 다음번 방문을 위해 기억해두는 것이 바리스타의 일이다. 여기까지 완벽하게 해냈다면, 또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다시 카페를 찾아왔을 때 진정한 시작이다. 호주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은 원하는 커피를 만들어주는 한 뭔가에 홀린 것처럼 카페를 찾아온다. 손님과 바리스타는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고 형식적으로라도 안부를 묻고 틈이 나면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관계를 형성해 간다. 마치 물렁한 콘크리트가 서서히 단단하게 굳어지는 과정처럼.


카페가 조앤의 보석상 맞은편에 오픈했을 때, 그녀는 커피를 사러 왔다. 라떼에 캐러멜 시럽과 설탕 두 스푼을 넣어달라고 했다. 이 정도면 커피 맛 설탕 음료에 가깝다. 그때는 커피 한 잔이 절실했다기보다는 새 이웃에게 인사하며 커피까지 겸사겸사 해결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며칠 뒤 보석상 이름이 적힌 아이디로 별 다섯 개 구글 리뷰가 달린 것을 보면 말이다.


조앤은 이웃으로서 멋진 환영 인사를 남기고 한동안 카페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어딘가에 있을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셨을 것이다. 간혹 마주치면 모든 호주 사람이 그러하듯 밝게 인사해주었고 카페에서 에그 타르트 (Egg Tart)를 한번 사 먹었을 뿐이다. 그땐 어떤 이유로든 입이 심심했으리라. 하지만 그날 가게는 유별나게도 바빴고 에그 타르트마저 볼품없는 모양으로 완성됐다. 그래서 다음날 제대로 된 에그 타르트 3개를 들고 그녀가 일하는 보석상을 찾았다. 3명이서 일하는 가게에 이쪽도 이웃으로서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보석을 사러 갈 일은 없을 것 같았으니깐. 참고로 호주의 패션이나 액세서리 퀄리티는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약하며 가격도 심하게 비싸다. 그러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불현듯 나타나 커피를 마시더니 매일 어김없이 그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왔다.



포르투갈에서 시작된 디저트 에그 타르트 (Egg Tart)



호주 카페의 커피 가격은 약간 엉뚱하다. 먼저 아메리카노와 똑같은 롱-블랙 (Long Black) 커피는 밀크가 들어간 라떼나 카푸치노와 가격이 같다.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하거나 특별한 밀크를 선택할 때 추가 비용이 든다. 대부분 오백 원 정도다. 그리고 설탕이나 감미료는 추가 비용을 받지 않지만 시럽도 추가 비용이 든다. 카페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캐러멜, 바닐라, 헤이즐넛 세 가지 시럽이 가장 많이 쓰이는데 천 원 정도가 추가된다. 가장 엉뚱한 것은 아이스커피 가격이다. 아이스가 들어간 커피는 대부분 6달러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어 에스프레소 샷과 바닐라 시럽을 추가한 소이 밀크 아이스라테 가격은 기본 6달러에 추가 비용이 2.5달러가 된다. 총 8.5달러 커피가 되는 것이다.


조앤은 바닐라 시럽을 추가한 락토스 프리 밀크 라떼를 마신다. 라떼가 4.5달러이고 락토스 프리 밀크와 바닐라 시럽을 추가하면 6달러짜리 커피가 된다. 그녀가 두 번째 커피를 주문할 때, 앞으로 시럽은 서비스 처리할 테니 5달러만 받겠다고 했고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며 기뻐했다. 이런 식의 서비스는 호주 카페에서 흔하지 않다. 세상에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호주 사람은 공짜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이런 제안에 왜 그러지, 하는 표정을 짓는 호주 사람에게 ‘한국’에서는 이렇게 해, 하고 내 방식대로 마무리 짓는다.


조앤은 출근하는 날 카페에 30분 정도는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일하러 간다. 더 일찍 출근하는 날에도 더 일찍 나와서 30분 정도 커피를 마시고 간다. 쉬는 날에도 가족과 함께 카페를 찾아오기도 했다. 10시간 이상 운전해 시드니 근처 시부모님 댁에 가는 날에는 가는 길에 마실 충분한 에스프레소 샷과 바닐라 시럽을 사가기도 했다. 이렇게 내가 만드는 커피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서서히 단단히 굳어져가고 있었다. 다행히 우리는 바닐라 시럽의 양을 절반이나 줄이는 데 성공했다. 맛있는 커피는 설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바리스타는 말한다.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는 건, 이제 캥거루도 알만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럽이나 설탕을 넣은 커피를 평생 마셔온 손님에게 이 말은 비아냥거림으로 들릴 수 있다. 커피에 넣는 설탕은 행복과 정비례한다. 훌륭한 바리스타라면 손님을 비아냥거릴 생각은 접고 설탕이 필요하지 않을 만한 커피를 만들어내야 한다.


조앤은 가끔 카페에서 점심을 사 먹는다. 도시락을 못 싸올 때면 아침에 커피를 마시면서 점심 메뉴를 추천받아 예약까지 해놓고 출근한다. 호주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로 짧은 편이다. 하루에 8시간 일하고 1시간의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인건비가 높아 근로 계약을 할 때 휴식시간은 무급으로 처리하는 편이다. 1시간의 휴식시간을 호주 사람은 모닝 티타임에 30분 정도를 쓴다. 커피 때문이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30분 정도를 쓴다. 이것을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 대부분 매니저에게 말하고 자율적으로 시간 관리를 한다. 문제는 모닝 티타임을 점심시간보다 여유롭게 사용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다. 샌드위치 하나 먹는데 30분이면 충분하지만, 식당을 찾아가 주문하고 기다렸다가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기에 짧다. 그래서 호주 직장인은 점심 도시락을 싼다. 아니면 샌드위치나 스시 롤 같이 미리 만들어져 있어 빠르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호주 직장에서 매니저에게 보고하고 브레이크 타임을 사용하지만, 가끔 너무 바빠서 브레이크 타임을 갖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호주 직장에서 매니저는 부하 직원에게 온정을 쏟지 않는다. 개인주의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서양의 나라는 대게 비슷하다. 매니저는 직장에서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자신의 브레이크 타임만 생각한다. 부하 직원이 너무 바빠서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직원에게 닥친 상황이다. 자신이 희생하면서까지 도와주거나 하지 않는다. 부하 직원에게 먼저 밥을 먹이고 나서 밥을 먹는 상사의 모습은 동양에서나 볼 수 있다.


조앤이 방문하는 시간은 나름 한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좋다. 그녀는 카페의 모든 부분을 극찬하는 손님이 됐다. 커피는 매우 컨시스턴트 하고, 아침에 전면 유리창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것도 좋고, 카페에서 주로 트는 노르웨이 듀오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 (Kings of Convenience)’ 음악까지. 이런 카페를 언제든 올 수 있는 거리에 두고 6개월이나 다니던 카페를 갔던 것이다. 호주에서 커피 마시는 사람 대부분 그녀와 같다. 다행히 그녀는 앞으로 내가 만드는 커피를 마시러 카페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조앤’을 기다렸다 같은 일을 반복해 가야 한다.


호주에서 카페 사업은 위험한 도전이 아니다. 단지 손님을 기억하고 컨시스턴트 한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사람에게 추천한다. 나머지 일은 전문가의 손을 빌려 처리할 수 있다. 혹독한 스타트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영업 중인 카페를 인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나저러나 혹독한 스타트를 견디며 묵묵히 컨시스턴트 한 커피를 만들다 보면 천천히 단골손님이 생겨난다. 그 손님과 카페의 관계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어 간다. 흑자 영업이 시작되는 궤도에 오르면 매출 변화가 거의 없다. 매일 정해진 양의 커피가 팔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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