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와 소이 차이 라떼
골드코스트에 수많은 동양인이 살고 있는데, 중국 사람이 가장 많고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은 그다음이다. 호주 사람에게 결코 쉽지 않지만 동양인은 서로를 잘 구분해 낸다. 중국 사람은 과하게 큰 상표가 달린 옷을 부자연스럽게 입고 다니며 일본 사람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어 보이는 독특한 스타일의 옷을 자연스럽게 소화한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라면 한국 사람일 확률이 크다.
한눈에 일본 사람으로 보이는 모모는 일본 사람답게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게 퀵-보드를 타고 다닌다. 호주 어디에서나 라이더 (Rider)와 보더 (Boarder)를 쉽게 볼 수 있다. 지나칠 정도로 사람 우선인 환경에서 사람들은 마음껏 자전거나 보드를 즐긴다. 간소한 복장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따뜻한 날씨도 한몫했다고 본다.
호주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나라다. 사람들은 다양한 민족, 언어, 문화만큼이나 다양한 의견, 취미, 취향이 모여 사회를 조화롭고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호주에서 요란스럽게 자전거나 보드를 타고 다녀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누군가 구름을 타고 다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다. 호주에서 다르다,라고 정의하는 것 대부분은 한국에서 여론, 관습이나 대세에 어긋난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얼굴에 타투를 하고 은행 창구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바지만 입은 채 보드를 타고 인도를 활주 하는 사람 모두 호주에서는 한 개인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모모는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원자폭탄은 도시 전체를 초토화시켰고 20만여 명이 희생됐다. 그녀의 조부모님은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도시를 떠나지 못한 채 고통 속에서 도시 재건에 참여했고 모모의 부모님을 낳고 키워냈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무시무시한 재앙을 겪고 복구하며 살아온 일본 사람은 어딘가 대단한 구석이 있다. 그런 대단한 구석이 잘 작동했던 히로시마는 전쟁이 끝나고 국제평화 문화도시로 발전하여 주고쿠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지가 됐다.
비극의 상징이 된 히로시마 도시는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방문해왔다. 덕분에 영어 수요가 커서 다른 도시보다 영어 교육열이 높다고 한다. 모모는 그런 환경에서 일찍이 영어를 배우고 사립 영어학원에서 8년 동안 영어 선생님으로 일했다. 덕분에 그녀는 일본 사람 치고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그녀는 서른 살 전에 비어있는 곳을 채우자는 심산으로 호주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한국 청년에게 도전과 모험의 대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드넓은 호주 땅에 일할 사람이 부족해 세계 도처에 젊은이를 데려올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일본, 영국, 캐나다, 아일랜드 등 다른 나라도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때문에 농촌에 일할 사람이 부족한 일본이 이런 외국인 취업 기회를 많이 주고 있는데 한국도 조만간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만들지 않을까 싶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신청할 수 있는 나라는 제한적이다. 한국, 일본, 서유럽 선진국 출신의 20대 젊은이만 신청할 수 있는데, 비자 기간 동안 부족한 일손을 메우고 광활한 호주를 여행하며 번 돈을 소비하고 기꺼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사람에게 주고 있다. 남미,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에서 온 사람에게 이 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돈 때문에 호주에 눌러앉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비자 법은 매년 조금씩 바뀌는데 현재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3년까지 연장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만큼 호주는 일손이 부족하다. 비자는 만 30세 전에 신청할 수 있고 한 사업장에서 6개월 이상 일할 수 없다. 비자는 1년 단위로 연장 할 수 있는데 농장, 공장, 인구 저밀도 지역 등 지정된 곳에서 3개월 이상을 일해야만 비자 연장을 할 수 있다.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득세를 받지 않던 호주는 최근 소득세로 15%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일해 달라 불러 놓고 예의에 어긋난 게 아닌가 싶다.
8년 동안 한 직장에서 일하다 낯선 나라에 온 모모는 일이나 공부보다 쉬는 것에 취해 있다. 여기저기 퀵-보드를 타고 다니다 괜찮다 싶은 카페를 발견하면 들어가 소이 밀크로 만든 차이 라떼를 마시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그렇게 내가 만든 소이 차이 라떼를 마시게 됐고, 단박에 열렬한 차이 라떼 신자가 됐다.
차이 라떼는 스타벅스 덕분에 누구나 알만한 음료가 됐는데, 호주에서 논-카페인(None Caffeine) 음료로 사랑받는다. 호주 카페에서 커피가 주 메뉴라면 보조 메뉴는 핫 초콜릿, 차이 라떼, 튜머릭 (Tumeric) 라떼 등이 있다. 튜머릭은 카레를 만들 때 주로 들어가는 강황에 갖가지 향신료를 블렌딩 해서 깊고 풍부한 향신료 맛을 낸다. 강한 향신료 맛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튜머릭 라떼와 다르게 차이 라떼는 누구나 좋아할법한 음료다.
차이 라떼는 차이 분말을 따뜻한 물에 녹이고 라떼에 넣는 스팀 밀크를 푸어링 (Pouring)한 뒤 시나몬 파우더를 살짝 뿌려주면 된다. 커피와 비교하면 대단히 만들기 편한 음료다. 하지만 분말을 사용할 때 물에 어떻게 녹이냐에 따라 질감이 달라지기 때문에 컨시스턴트한 음료를 만들기 힘들다. 분말 녹이는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해 차이 시럽을 사용하는 카페도 있다. 일부 손님의 경우 차이 라떼를 주문하기 전에 파우더 (Powder) 인지 시럽 (Syrup)인지 묻는데, 시럽이면 주문하지 않으려고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좋은 차이 시럽이 없던 시절에 만들어진 편견 때문이다. 시럽이 파우더보다 좋은 이유는, 액체라 잘 섞여서 질감이 부드럽고 맛이 풍부한 차이 라떼를 만들 수 있다. 거기에 만드는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데다 무엇보다 컨시스턴트한 차이 라떼를 만들 수 있다.
모모처럼 차이 라떼를 아몬드 밀크나 소이 밀크 같은 플레이버 밀크로 주문하는 사람이 많다. 플레이버 밀크는 커피와 결합할 때 다 뽐내지 못했던 매력을 차이 라떼를 만나 모조리 뿜어낸다. 우유를 바꾸면 500원 정도 추가 비용이 붙지만 더 맛있고 더 건강한 차이 라떼가 된다.
누가 어디서 최초로 차를 마셨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원지로 알려진 곳은 중국이다. 흙탕물이 흐르는 거대한 황하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깨끗한 물을 마시기 힘들어 끓이고 맛을 낸다는 것이 차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비슷한 예로 로마인이 배탈을 유발하는 오염된 물을 피해 와인을 마신 것과 유럽에서 석회암 때문에 탄산수를 주로 마시는 것을 들 수 있다.
중국의 차는 유럽으로 건너가 티 (Tea)가 되었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커피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 차는 술과 함께 물 다음으로 인류가 즐기는 음료였다. 중국의 ‘아편 전쟁’이나 ‘보스턴 차 사건’을 보면 차가 어느 정도 위치에 있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차이 (Chai)는 짜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지역에서 차를 부르는 말이다. 인도는 차를 마시는 풍습이 없었으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면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인도에서 차이라고 하면 마살라 차이 (Masala Chai)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것은 홍차에 우유, 설탕,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인도식 밀크티 (Milk Tea)로 영어로는 스파이스드 티 (Spiced tea)라고 한다. 인도 사람은 지금까지도 하루를 차이로 시작해서 차이로 마감한다. 차이는 고급 호텔부터 노점상까지 어디서나 흔히 마실 수 있는 인도의 대중적인 음료가 됐다.
중국 ‘보이차’ 가격을 보면 알 수 있듯 차는 어디에서나 귀하고 비싼 대접을 받았다. 그래서 상류층만 마실 수 있는 기호식품이었으나 홍차의 생산량이 소비량보다 많아지고 가격이 폭락하게 된다. 거기에 홍차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품질이 좋은 것은 판매하고 남는 찌꺼기를 버리지 않고 마시게 되는데 이것이 차이의 시작이 됐다. 품질이 떨어지는 찻잎으로 차를 만들다 보니 소량의 찻잎을 오랫동안 우려내고 여기에 우유와 설탕, 인도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향신료를 섞어 마시는 마살라 차이를 만들게 되었고 주변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19세기 차이는 인도에서 서쪽으로 터키까지 가고 20세기 중동 전역에 대중화된다. 터키나 이집트를 여행하면 쉽게 경험할 수 있는데, 차이는 인사이자 친절함의 상징이다. 가정, 회사, 거래처, 상점, 시장 등 어디를 방문하든 손님은 환대의 표시로 차이를 대접받는다. 회사나 가게는 손님과 사원에게 차를 제공하기 위해 차 만드는 사람을 따로 고용할 정도다. 피라미드 근처에서 관광객에게 등쳐먹고 사는 사기꾼도 차이 한 잔을 먼저 대접하고 사기를 친다. 손님의 차이 잔이 비면 더 마시라는 권유를 받는데, 거절은 간과되기 마련이다. 빈 잔 위에 티스푼을 위에 올려놓으면 주인은 차를 더 이상 권하지 않는다.
카페에서 흔히 마시는 차이 라떼는 인도나 터키에서 마시는 차이(또는 짜이)와 많이 다르다.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이 가루에 감미료를 더해 달콤해지고 우유의 담백함이 더해지며 매력 넘치는 음료가 됐다.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된 것처럼. 인도와 중동에서만 맛볼 수 있던 음료는 이제는 세계 어느 카페에 가도 쉽게 마실 수 있게 됐다.
모모는 소이 차이 라떼를 마실 때마다 대단히 감격한 표정을 짓는다. 말 한 마디라도 할 여유가 생길 때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차이 라떼이며 당신은 최고의 바리스타라고 나를 치켜세워준다. 이 음료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알리는데도 열심인데, 호주인 남자 친구를 매번 끌고 와 함께 마신다. 그녀의 격한 추천 때문에 왔다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 카페 장사가 그럭저럭 해서 가게를 접고 차이 라떼교를 만든다면 그녀는 유일한 열혈 신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차이라떼를 전파하러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