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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May 02. 2020

#20 호주에서 바리스타

그렉 패밀리와 에그 온 토스트

잘 넘긴 금발에 새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에드워드는 커피의 도시 ‘멜버른’에서 왔다. 어쩌다 선글라스를 벗고 나타나면 못 알아볼 정도로 낯설다. 스무 명 넘는 직원들이 일하는 마케팅 회사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그는 종종 카페에 들러 롱-블랙커피에 메뉴 하나를 곁들인 아침식사를 한다.


호주 카페에서 흥미로운 점을 하나 꼽자면 블랙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굉장히 적다는 것이다. 호주 사람들이 유난히 화이트 커피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블랙커피는 집이나 오피스에서 쉽게 만들어 마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드워드가 한 달에 한 번은 카페에서 원두를 사가는 이유다.


블랙커피를 맛있게 즐기는 방법은 다양한데, 보통은 여러 종류의 원두를 섞어 깊고 풍부한 맛을 내는 블렌딩 (Blending) 커피보다는 한 종류의 원두로 단조롭고 깔끔한 맛을 내는 싱글 오리진 (Single Origin) 커피를 사용한다. 거추장스럽게 커피 머신을 사용하지 않아도 필터 커피라고 부르는 핸드 드립 (Hand Drip) 추출만으로도 커피의 풍미를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이 외에도 모카 포트 (Mocha Pot), 프렌치 프레스 (French Press)와 같은 기구들을 사용해서 비슷한 퀄리티의 커피를 만들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나 대부분 카페는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만든다. 열기를 뿜어내는 육중한 기계에서 만들어지는 에스프레소는 차원이 다른 맛과 풍미를 가진 커피다. 원두는 시간이 지나면 숙성이 되는데, 최상의 시기에 충분한 성능의 기계로 추출하면 훌륭한 맛의 커피를 선사한다.


종종 카페를 찾는 에드워드 덕분에 회사 동료들도 카페를 찾는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회사를 경영하는 패밀리이다. 스티브와 케런은 영국인 노부부로 첫째 아들 그렉, 제임스, 찰스, 막내인 또 다른 에드워드(사람들은 테디라고 부른다), 네 아들과 함께 호주로 이민 와서 여섯 식구가 마케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흐린 날씨는 기본이고 밀려드는 난민과 이민자 문제로 시끄러운 영국 런던과 다르게 호주 골드코스트는 화창하고 따뜻하다. 호주 어디를 가나 인건비가 비싸고 일의 진행속도가 느린 데다 자주 아프고 휴일 없이 못 사는 호주 노동자들 사이에서 열심히 일하는 이민자는 쉽게 성공을 쟁취한다. 그렉 패밀리처럼.


물꼬를 튼 에드워드는 정작 종종 카페에 오는데  그렉과 나머지 형제들은 매일 카페에 온다. 아침에 돌아가면서 서로의 커피를 픽업하고 티-타임과 점심시간 사이 카페가 가장 한가한 시간에 브런치를 먹으러 온다. 대부분 직장인들이 티-타임을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가 점심 브레이크만 생각하며 일에 열중할 시간에 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과 ‘기생충’의 열성 팬인 그렉과 형제들은 날씨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카페 실외 테이블을 붙여서 앉는다. 지랄 맞다, 싶은 영국 날씨를 겪다 온 사람들답게 그들은 약간만 바람이 불어도 실내로 들어오는 호주 손님들과 다르다. 그리고 늘 먹던 음식과 음료를 주문한다. 포멀(Formal)한 단어를 사용해 아주 정중하게.


한국의 기사 식당에 ‘백반’이라 불리는 메뉴처럼, 어느 호주 카페에 가도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있다. 사워도우 (Sourdough) 빵 한 조각, 계란 2개에 베이컨 등의 옵션을 곁들인 메뉴다. 에그 온 토스트(Eggs on Toast)라고 부르는데 지역이나 카페에 따라 이름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가격은 $10 가까이 하니 밥 한 끼 가격이다.


에그 온 토스트는 얇게 자른 사워도우 빵을 딱딱하다 싶을 만큼 굽고 버터를 입힌다. 계란은 기본적으로 2개를 올리는데 어떻게 요리할 것인지 선택한다. 한국에서 수란이라고 하는 포치드(Poached), 스크램블(Scramble), 프라이(Fried), 보일드(Boiled) 중에 선택하는데 호주 사람은 대부분 포치드 에그를 먹어서 따로 언급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프라이 에그는 대부분 반숙으로 즐기는데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이라고 부른다. 여기까지가 밥 한 공기에 국 한 그릇처럼 기본에 해당하고 여기에다 여러 가지 옵션을 추가해서 먹는다. 아보카도(Avocado), 구운 토마토, 스모크 살몬(Smoked Salmon), 구운 버섯, 구운 치즈(Haloumi Cheese를 사용한다), 또는 소시지 등 카페마다 추가할 수 있는 옵션은 다양하다. 옵션은 추가할 때마다 3천 원에서 5천 원 정도의 추가 금액이 붙는데 이것저것 다 채우다 보면 2만 원을 훌쩍 넘기기도 한다.



베이컨, 프라이 에그, 사워도우, 할로우미 치즈, 구운 버섯이 올라간 브레키



그렉은 사워도우 한 장에 포치드 에그, 베이컨을 곁들여 먹는다. 제임스는 사워도우 한 장에 프라이 에그, 베이컨을 곁들여 먹는데 배가 고프면 해쉬브라운(Hash Brown)을 추가하고 주문할 때마다 빵은 충분히 토스트 해달라고 하니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찰스는 사워도우 한 장에 프라이 에그, 베이컨, 아보카도 1/4을 추가해 먹는다. 막내 에드워드는 사워도우 한 장에 프라이 에그, 더블 베이컨이라 부르는 베이컨 두 장에 엑스트라 버터를 주문해 먹는다. 여기에 각자 콜라와 커피를 추가해 먹는데 4명이서 오면 10만 원 가까이 지불하게 된다.


에그 온 토스트를 주문하는 한국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설령 팔려고 치면 민망한 마음이 든다. 그만큼 푸짐하지 않지만, 이 메뉴는 호주 카페를 대표하는 기본 메뉴이다. 한 가지 더 확실한 사실은 호주 사람의 주식은 사워도우 빵이라는 것이다.


한국에도 수많은 카페와 베이커리가 있어 다양한 빵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빵이 있다면 사워도우 빵이다. 한국 사람에게 식빵, 프랑스 사람에게 바게트가 있듯이 호주 사람에게 기본이 되는,  신맛의 빵으로 불리는 사워 도우 (SourDough)는 천연발효 빵이다. 뚱뚱한 바게트를 연상시키는 이 빵은 독특한 풍미가 있고 보존기간이 길다. 유럽에서 주로 먹던 것이 호주에서도 가장 사랑받게 됐다. 공기 중에 존재하는 효모균을 이용해 발효시켜 만드는데, 밀가루를 주원료로 하는 화이트 사워 (White Sour)와 호밀가루를 주원료로 하는 라이 사워 (Rye Sour)가 있다. 호주에서 화이트 사워는 플레인 사워 (Plain Sour)라고 부른다. 여기에 잡곡을 넣은 멀티-그레인 사워(Multi-Grain Sour) 도 있다.


프렌치토스트(French Toast)나 햄버거에 사용하는 브리오슈 (Brioche), 크루아상 (Croissant)은 먹는 순간 미소가 나올 만큼 맛있지만 그만큼 버터, 우유, 계란, 설탕이 들어가야 한다. 사워도우는 버터, 계란, 설탕 등 맛을 내는 재료를 넣지 않아 시큼하게 발효되는 밀가루 본연의 맛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빵이다. 하지만 맛은 둘째치고 딱딱하다는 것이 큰 흠이다. 구워서 바로 먹으면 그럭저럭 먹을 만하지만 카페에서는 손님 테이블까지 가는 도중에 식어버려  팔뚝에 힘줄이 보일 정도로 힘들게 빵을 잘라먹는 손님들을 안쓰럽게 쳐다보게 된다. 하지만 이 빵은 식재료에 가공이나 조미료 첨가를 극도로 자제하는 로우(Raw)한 음식을 즐기는 호주 사람 취향에 가장 잘 맞는 빵이다. 그래서일까. 로우 푸드(Raw Food)를 대표하는 초밥(Sushi)을 파는 식당은 호주 어디를 가나 가장 쉽게 눈에 띈다.


사워 도우를 보면 호주 사람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호주 카페에서 가끔 말도 안 되는 메뉴가 말도 안 되게 잘 팔리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만큼 호주 사람은 뜻만 맞으면 쉽게 지갑을 연다.  그 지갑이 가장 쉽고 빠르게 반응하는 단어가 있다면 ‘건강함’이다. 한국 사람이 힐링(Healing)이나 웰빙(Well-being)이라 부르는 치유와 나은 삶을 추구하듯 호주 사람들은 건강과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호주에는 깨끗한 자연 환경과 잘 제도화된 복지 시스템이 있어 굳이 힐링이나 웰빙이 따로 필요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이나 북미 선진국에서 호주까지 온 이민자는 건강만 챙겨도 충분한 호주의 삶을 살기 위해 온다.


그렉 패밀리의 고향인 영국의 역사를 보면 100% 신사적이다,고 할 수 없지만, 영국은 ‘신사의 나라’로 불린다. 영국 사람은 카페에서 주문할 때만 봐도 행동이나 말투가 유난히 신사적이다. 호주는 영국 이주민이 세운 나라지만 억양이나 음식은 물론 커피부터 영국과 많이 다르다. 하지만 영국 이민자들도 최소한의 영국식만 있는 호주의 삶에 어떤 불평도 하지 않는다.


골드코스트는 언제나 화사한 날씨를 자랑하지만 간간이 비가 내린다. 우기와 건기가 있는데 우기가 되면 이슬비, 가랑비, 소나기가 번갈아가며 며칠 동안 이어진다. 이럴 때 호주 사람들은 우산을 쓰지 않고 비를 맞는다. 가끔 찾아오는 자연의 축복을 만끽하듯이. 그리고 뜬금없이 햇살이 드러나 선명하고 큰 무지개를 쉽게 볼 수 있는데,  비 때문에 쳐진 마음이 그 덕분에 금세 밝고 가벼워진다. 그리고 날씨가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느끼게 된다.



아파트 테라스에서 보이는 무지개



그렉, 제임스, 찰스와 두 에드워드는 지극히 평범한 호주식 음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러 매일 카페에 온다. 하지만 이들에게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선글라스를 끼고 테라스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하나의 형식을 즐기는 것이 카페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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