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산을 극도로 싫어하는 충청도 토박이였다. 읍에 하나밖에 없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한 뒤 근처 시내에 있는 비평준화 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논두렁이 나왔고 시내버스를 타는 동안 창 밖을 바라보면 사계절을 뚜렷이 알 수 있는 풍경들이 내내 아우성쳤다. 풀어놓아도 항상 꼬여 있던 이어폰 줄을 풀어 귀에 꽂은 후 한 곡을 반복 재생시켰다. 영화 필름처럼 지나가는 산들을 멍하니 응시하며 귀와 눈의 부조화를 느꼈다. 또다시 다짐했다. 여길 꼭 벗어날 거라고.
그렇다고 학창 시절 추억까지 지루했던 건 아니다. 여고를 나온 나는 당시의 3년이 가장 힘들었고 재밌었다. 재미 옆엔 항상 친구들이 있었다. 점심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함께 외출증을 끊어 떡볶이나 피자를 먹으러 갔고 간혹 밥 버거를 시켜먹기도 했다. 날이 좋으면 운동장 트랙을 돌았다. 공부를 제외하고 우리의 유일한 체력 소모 방법이었고 4층에서 그 모습을 바라볼 때면 왠지 다정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잔상이 오래 남아 있던 순간은 쌍무지개가 떠오른 날이었다. 트랙을 돌던 우리뿐 아니라 선생님들까지 감상에 젖어 눈이나 사진으로 무지개를 담았다. 그날은 유독 트랙을 오래 걸었던 것 같다.
<이만큼 가까이>는 그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인 '나'와 그녀의 친구들 송이, 수미, 주연, 민웅, 찬겸은 과거와 현실을 번갈아가며 성장통과 성장을 함께한다. 과거 그들의 터전이었던 파주는 유난히 춥고 쓸쓸했지만 그들만의 아지트이자 놀이터였고, 신도시 일산까지 가는 유일한 통학 수단이었던 '2번 버스'는 6명의 우정의 상징이었다. 각자 지정석에 앉아 낡고 위험한 버스 상태를 함께 욕했고 때론 고민을 털어놓거나 누군가의 싸움에 휘말려 모두가 썰렁한 공기를 마셔야 했던 추억의 장소. 그곳에선 우정이, 사랑과 질투심이, 결핍과 슬픔이 덜컹거렸다.
'나'는 우연히 주연의 집에 들어왔다가 영화 감상 중이던 그녀의 친오빠, 하주완을 만난다. 평범치 않은 주완의 영화 세계에 얼떨결에 동참하게 된 그녀는 결국 영화와 주완 모두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10대만이 느낄 수 있는 풋풋한 연예는 모종의 사건으로 엉망이 돼버리고, 이는 30대가 될 때까지 5명의 친구들과의 관계에 죄책감과 긴장감을 심어 준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 '나'는 결국 성인이 되면서 그 감정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고, 친구들은 각자의 어른다운 방식으로 '나'를 위로한다.
이 사건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되지만 다른 친구들의 서사 역시 가볍지 않다. 정세랑 작가는 이들을 통해 아직까지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을 곳곳에 등장시킨다. 가정폭력, 직장 내 갑질, 고정관념 등의 뻔한 소재를 뻔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입시켜 입체적인 생각을 품도록 한다. 6명의 친구들 모두 어느 하나 겹치는 부분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부드럽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 든다.
주완의 영향으로 영화미술 일을 하는 30대의 '나'는 DSLR 카메라를 이용해 친구들의 실없는 대화와 모습을 촬영한다. 동영상 속 송이, 주연, 민웅, 찬겸은 10대 때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낯설기도 하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마음은 그대로지만 버스 대신 직장 상사를 욕하고, 유치한 대화 속에 가끔은 철학적인 문장이 튀어나온다. 내가 '나'처럼 요즘도 만나고 있는 고등학교 친구들을 촬영하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왠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을까.
다른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세랑 작가는 침잠하기 쉬운 주제에 구명조끼를 입혀주는 능력이 있다. 조금은 명랑하고 능청스러운 글은 독자가 비통과 원망에 완전히 잠기지 않도록 숨통을 틔어준다. 덕분에 사유한 시간이 많음에도 정신적 피로감은 크지 않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가 생긴다. <이만큼 가까이>에선 10대들의 거침없고 유쾌한 대화와 30대들의 고급진 해학이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만큼 가까운 그들의 명랑한 우정을 통해 학창 시절의 추억을 꺼내보고 싶다면, 먼지 쌓인 졸업장을 펼쳐보듯 읽어보길 바란다.
p. 51
그러고 보면 나는 그때도 MD에 마이크를 달아 친구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곤 했다. 이것저것 말을 시켰다. 결국 크면 대단한 게 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하던 걸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 거구나 싶다.
p. 104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니 원활히 작동하는 권위란 건 좀처럼 목격하기 어렵고 그런 의심으로 나는 어른을, 감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p. 235-236
"일부러 오빠를 끔찍한 사건들에 노출시켰달까. 그런 면에서 난 남자들도 굴절 속에 있다고 생각해. 강철처럼 두드리면 더 단단한 남자, 그놈의 사나이가 될 거라 강요하는데 강철인 남자랑 세라믹한 남자랑은 다르니까. 두드리면 깨지는 남자도 얼마든지 있는 거 아냐? 나약한 게 아니라 아예 종류가 다른 건데."
p. 255-256
"단 하나도 띄어 쓰고, 단 셋, 단 넷도 다 띄어 쓰는데 '단둘'만 붙이는 게 다정한 것 같아. '함께하다'도 함께 쓰는 게 좋아. 사전은 다정해."
p. 296
"줄창 하다보면 뭔가로 연결돼. 놓치거나 떨구지 말고 하다보면 하는 사람도 모르게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의미 없는 패스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