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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룸 Dec 30. 2020

RESET

< 10년을 버텨낸, 혼돈의 내 자리 >




  오늘도 우다다다 뛰어가서 깜박이는 신호등에 겨우 길을 건너고, 스윽 들어오는 만원 버스에 몸을 구겨 밀어 넣는다. 9 정각에 겨우 맞추어 사원증을 찍고, 후욱 한숨과 함께 자리에 내려 앉으며 컴퓨터를 켠다. 9 반이  되기도 전에 벌써 십여 개가 쌓여있는 메일함을 스윽 훑어보고, 급한 전표 먼저 리기 위해 ‘결재요청버튼을 누른 찰나. 컴퓨터가  멈춰버렸다. 바빠 죽겠는데, 바쁜 티를 팍팍 내도 모자랄 판에 하나도  바쁜 사람처럼 컴퓨터가 재부팅 되기를 멍하니 기다리는  밖에 없다. 그동안 IT센터에 전화해서  차례 점검도 받아봤지만,  직후만 잠시    결국 똑같은 문제가 반복 되었기에 이럴  마다 알아서 재부팅을 하곤 했었다. 오늘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다시 IT센터에 전화해서 원격지원을 요청했다.  컴퓨터를 살펴  IT 담당자의 해결책은 컴퓨터를 아예 ‘Reset’ 하고 모든 프로그램을 재설치 하라는 거였다.


  2008년 입사 후, 이 회사를 다닌지 꼭 10년이 되었다. 팀 이동을 두 번 했고 업무와 직무가 세 번 바뀌었지만, 나의 천직을 찾았다고 할 만큼 신나는 일들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 회사는 나와 맞지 않았다. 전공분야와는 전혀 다른 분야에, 무역의 '무'자도 모르는 상태로 입사하여 오직 돈을 벌기 위해서 주어진 일을 꾸역꾸역 해 왔을 뿐이었다. 내게는 어려웠던 일을 해냈다는 쾌감 따위는 없어진 지 이미 오래고,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은 의욕도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그저 '10년' 이라는 세월의 무게만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있고 실수도 많은데, 그럴 수록 '10년 차' 라는 수식어 앞에서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내일 쯤이면 아마 나는 소멸하겠구나 싶던 어느 날, 문득 '아- 내 유효기간이 끝난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이 일이 처음에는 단지 조금 커서 불편한 옷이었다면, 지금은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너무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입고 있는 나도,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도 서로 불편한 순간이 온 것 같았다.

적성에 꼭 맞아서, 이게 천직이라서 다니는 회사원이 몇이나 있겠는가 마는 단지 돈을 벌기위해 하는 일로서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실은 이미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독이며 견뎌온 순간들이 삼세번에 삼세번을 거듭하여 삼세번을 넘긴 터였으므로.


  대학생 시절까지만 해도 기쁜 일이나 힘든 일이나, 거의 모든 일들을 엄마와 함께 나누며 친구처럼 지냈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나서는 기뻐도 기쁘고, 힘들어도 즐거워야만 했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엄마는 해결할 수도 없으면서 온 세상의 걱정이란 걱정은 전부 끌어모아 하기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힘들어진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의지할 수 없게 된 반면, 엄마는 여전히 나에게만 의지하며 당신의 행복을 내 삶을 통해서 찾으려고 했다. 20대 중반이 지날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내 연애사에 대한 참견이 시작 되다가 곧이어 결혼 잔소리까지 이어지면서 친구같던 엄마와는 어느 새 애증의 관계로 변해있었다.


  스물에서 서른으로 넘어왔다. 세 번째 새로운 '십대' 를 맞이 한 것이다.

더 이상 복구가 어려울 만큼 엉망진창으로 데이터가 쌓여버린 컴퓨터 처럼 내 커리어와 가족관계, 내 인생 모든 부분에서 Reset 이 필요한 순간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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