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조사를 받으면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by 양미숙

지인이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진정을 냈다.

진정인 조사는 마쳤고 피해자 조사를 위한 출석 요구를 받았다.

출석체크는 자신이 있는 터라 어렵지는 않았지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피해사실을 말해야 하며

어떤 사실을 정확하게 말해야 나에게 도움이 될지 머리가 복잡했다.

거울을 보며 피해 진술하는 연습을 해보아야 하나 고민을 하기도 했다.

드라마 속 피해자의 모습을 떠올리고 거울을 보니 너무나도 씩씩한 장골이 눈앞에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된 바, 본인의 특장점인 솔직함을 살려 어필한다.


그런데 사람이란 게 참, 당시에만 해도 가슴이 펄펄 끓을 정도로 심각한 아픔이었는데

고작 한 달이 지났다고 그 감정 다 망각했는지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도 괴롭힘으로 인정이 될까' 싶었다.

그런 채로 복직을 했고 다시 복직한 나를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너무 반갑게 맞아주었고 문제의 직장 상사 그녀는 '나는 미안해하고 있음'의 눈빛과 축 늘어진 어깨로 내 앞에 서서 "변할 것"이라고 말했다.

망각이 아니라 용서였는지 웅크렸던 마음이 조금씩 기지개를 켜며 풀리고 있었다.


그리고 출석 당일.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김을 뿜어내는 성난 날씨도 날씨지만 배울 거 다 배웠는데 지도 보는 법을 배우지 못해 길치인 본인은 처음 가는 고용노동청 주변을 맴맴 돌다 겨우 도착해 진이 다 빠져있었다.

마스크로 가리지 않은 얼굴 일부도 땀범벅인 채로 담당 근로감독관과 대면을 했고 첫인사를 나눴다.


다소 사무적인 말투로 인사를 받은 근로감독관은 예고 없이 피해사실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상시 근무하는 근로자는 몇 명인가요?"

"진정인에 의하면 직장 내 괴롭힘 피해사실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내용인가요?"

"피해사실에 대해 고용주에게 건의한 적이 있나요?"

이런저런 형식적인 질문이 오가고 내가 진술하는 내용에 이따금씩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감독관은 무슨 로봇 인양 사무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기만 했다.


"어떤 처벌을 원하시는 건가요?"

"아니오. 저는 처벌보다는 재발되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제가 피해자 분께는 이렇게 친절하게 말하지만 고용주 대면하면 조사 태도가 달라집니다. 아마 조사받고 나면 고용주도 반성하실 거예요"


근로감독관의 친절 화법에 대한 정의가 무엇일까 생각하는 동안 조사가 마무리되고 있었고 다음 주 중에 고용주 출석 요구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책임 질 사람은 고용주입니다. 선생님이 아니라고요. 의심과 감시 한 사람이 잘못이지 선생님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무거운 책임을 지려고 하다가 그런 선택까지 합니까?"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가슴이 묵직해졌다. 금방이라도 고개를 숙여 울면서 안아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 이런 것이 '친절'이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사심'이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고 그가 말했던 친절 화법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근로감독관은 나의 복잡한 심경을 눈치챘는지 얼른 마무리하려는 듯 진술서에 지장을 찍을 것을 요구했다.

그와 평생을 함께 하시겠습니까에 응답이라도 하듯 얼른 지장을 찍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그는 날씨가 더우니 조심히 가시라고 말하면서 오늘 조사받느라 고생하셨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두 시간이나 조사를 받았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또 이런 일 생기면 전화 주십시오. 이런 일 없어야 하지만! 그럼 들어가세요"


나는 절하듯 안녕히 계시라고 인사를 하면서 그 자리에서 나왔다.

그리고 최근 한 달 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생각했다. 에피소드 같았던 일들이 나를 이만큼 어른이 되게 했나. 아이같이 대처했던 나를 조금이나마 성장하게 했나.

그리고 나를 위해 나서 주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앞으로 갚으면서 살아야겠다. 근로감독관은 근로자의 영웅. 사랑해요 고용노동부.


잡생각들이 이어졌고 집에 도착할 즈음

문득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참말로 고마운 사람들이 니 옆에 있는디,
그깟 너 믿지 못하는 사람 하나 때문에 그려?
한 사람 때문에 좋은 사람 놓치면 안 되는겨


놓치지 않을 거예요.. 당신들...


어쨌든, 다 좋은 데 다시 고용노동부에 피해자로든 가해자로든 방문해서 조사받을 일 없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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