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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Feb 04. 2021

기억이 났어 #009

엄마가 새벽같이 보내던 그 한문학원





엄마는 교육적으로 투자를 다. 피아노, 한문, 바둑, 그리고 중학교 때는 수학학원을 다녔다. 대학 때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기타를 치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음악을 만든다고 하더니, 정작 지금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현재까지는 내가 가성비는 별로 좋지 않은 딸이다. 사교육이 좋았는가 안 좋았는가는 좀 더 살아보고 결정할 문제다. 하지만 한문은 여러모로 정말 잘 써먹고 있다.


그렇다. 나는 한문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다녔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정확히 학원은 아니다. 주민 복지시설에 가까웠다. 상록마을에서 조금 걸어가면 느티마을이 있다. 느티마을 3단지 관리사무소가 아담하게 있었다. 건물로 들어가서 구석진 곳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된다. 간판도, 이름도 없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한 할아버지가 낚싯대 같은 지휘봉을 들고 안경을 한 번 추켜 올리며 우리 사 남매를 스캔했다. "남 씨들이 왔구먼."


지금부터 이 수상한 한문 강좌 프로그램을 우리가 불렀던 그대로 <한문학원>이라고 부르겠다.


한문학원은 관리사무소 2층을 모두 사용하고 있었다. 1층은 회의실, 강당, 경로당이었던 것 같고, 3층은 단지에 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독서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책상이 배치되어있다. 앞쪽에는 시험 대형으로 열 개 정도의 책상이 따로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뒤편에는 여섯 개 또는 여덟 개의 책상이 마주 보고 모둠을 만들고 있다. 그 책상에는 모포가 깔려있었고 벼루가 듬성듬성 놓여있었다.


일주일에 5회 수업에 한 달 수강료는 만원이었다. 직접 제작하신 교재도 있었고, 꼼꼼하게 인적사항이 적힌 출석부도 있었다. 수강료를 내기 전날에는 꼭, "내일 부모님께 만 원 받아오너라." 하셨다. 하루 여섯 번의 수업시간 중 원할 때 아무 때나 가면 되었다. 첫날에는 교재를 받는다. 먼저 등록한 사람은 일찌감치 어려운 한자를 배우고 있다. 나이, 학년도 상관없다. 초창기에는 주로 한 시간에 다섯 개의 낱말을 배웠다. 낱말이 쓰여 있는 교재를 다 배우면 '명심보감'을 배웠다. 나는 '명심보감'까지 배우고 그만 다녀서 그 이후의 교재는 뭔지 잘 모른다.


강습 법은 매우 간단했다. 아비부, 어미 모, 한 다음에 이것을 각자 가지고 온 한문 노트에 쓴다. 몇 번 쓰는 거 없다. 내가 다 외울 때까지 쓰는것다. 다 외웠다고 생각하면 낱말 하나만 써도 되고 다섯 낱말을 다 써도 된다. 교실 앞에 붙어있는 거대한 화이트보드에 무조건 나가서 이 낱말을 외워서 쓴다. 다 썼으면 선생님이 한번 읊어보라고 한다. 말해보는 거 아니다. 읊어야 한다.


선생님께서 지휘봉을 건네주시면 그걸 들고 내가 쓴 한자를 정확하게 '탁' 하고 가리켜야 한다. 칠판에 지휘봉 두드리는 소리가 안 나면 할아버지 선생님이 어험, 하신다. 그러면 다시 탁 하고 친다. "아비부!, 어미 모!, 부! 모!" 읽고 나면 선생님은 걸어 나오셨다. 순서부터 읽기까지 모두 맞으면 선생님은 "잘했어." 하셨다. 틀린 부분이 있으면 보드마카로 다시 한자를 적으셨다. "이것은 생긴 것은 이래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꺾어야 여." 그날 다 한 사람은 일찍 집에 가도 되고, 한자를 더 배워도 되었다.


한문학원은 한 일, 두 이 같은 시답잖은 것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가장 처음 배웠던 한자는 효도할 효(孝)였다. 그리고 부모, 형제, 강약, 산업, 인간 같은, 바로 신문을 읽어도 괜찮을 것 같은 한자들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철저한 수준별 학습이었다. 진정한 무학년제를 실행하는 곳이었다.


무학년제의 성공적인 모델, 구범이가 아직도 생각난다. 나이가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렸는데 내가 부모 형제를 배우고 있을 때 이미 명심보감을 외웠던 구범이. 한문 선생님이 틈만 나면 모두가 구범이를 본받아야 한다고 했다. 구범이는 조선시대에 태어났으면 이른 나이에 장원급제를 했을 것 같다. 지금도 잘 살고 있을 것 같다.


매주 수요일은 서예를 하는 날이었다. 삼천 원짜리 서예 붓으로 판본체만 써 봤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정말 많은 종류의 서예 붓이 한문학원 뒤편에 곱게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그 붓 중 하나를 들고(주로 선생님이 골라주심), 화선지를 한 장 받아 들고 서진을 화선지 상단에 올려놓는다. 그러면 선생님이 "너는 오늘 한 일자(一)를 쓰거라." 하셨다. 서예도 철저히 수준별이었다. 한 일자만 한 달을 써야 다음 달에 세로획을 연습할 수 있었고, 또 한 달이 지나면 점을 찍었다. 한 일자를 화선지 다섯 장 정도 가득 채우면 한 시간이 지나가는데 그것을 제대로  못 쓰면 다음 주에 한 일자를 다시 써야 했다. 그렇게 나는 이 년 정도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왜 어떻게 그만두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 이 한문학원에 대한 재미난 에피소드가 정말 많다. 두 편 정도로 나눠서 쓰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늘 시도하다가 정리가 잘 되지 않아 결국 포기했다. 왜 에피소드를 쓰지 못했나 생각해봤다. 나는 이 한문 선생님을 깊이 존경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늘 기억하고 있었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셨다. 늦거나 옷차림이 이상하면 하게 꾸짖기도 하셨다. 내가 유일하게 만난 "훈장님"이다.


내가 교사가 되고 나니 훈장님이 기억날 때가 많다. 특히나 업무를 하고 있거나 내가 아이들을 잠시 놓치고 있다고 생각할 때, 혹은 우리 꼬마에게 내 컨디션의 저조함으로 덜 친절하게 굴 때. 한결같은 모습으로 새벽 여섯 시부터 저녁 여덟 시까지 늘 관리사무소 2층에 가면 항상 같은 모습으로 계시던 한문학원 선생님이 생각난다. 방학 때는 엄마에게 등 떠밀려 사 남매가 모두 새벽 다섯 시 반에 집에서 출발해 여섯 시에 한문학원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졸려 죽을 판인데 선생님께서 우리 어깨를 낚싯대로 톡 치시며, "어머니께서 더 일찍 일어나셔서 너희 깨워 보내신 마음을 생각해야지, 졸면 어떡하느냐."라고 하셨다.


새벽에 가나 저녁에 가나 서예 붓을 깨끗하게 빨아 물기 없이 털어서 나무로 된 붓걸이에 걸어놓던, 늘 어설프게 인사해도 "그래, 나무가 오늘은 일찍 왔구나. 거 앉아." 하시던, 아이들끼리 킬킬거리고 웃으면 "너희 자꾸 떠들면 몹시 혼난다."라고 해서 교실을 웃음바다로 만드시던,

우리가 몇 달을 조르고 졸랐더니 "스승님 성함을 알려고 그러냐."라고 하시고는 한자로 크게 성함을 쓰시던,


'윤용병' 선생님을


이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아마 젊으셨을 때 선생님을 하셨고, 은퇴 후에 한문을 가르치셨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아마 정정하시다면 최소 90세는 넘으셨을 것 같다. 사실 선생님의 나이를 아직도 가늠할 수가 없다. 사실은 1997년 당시 50대셨던 것은 아니겠지? 아닐 거야. 뵙고 싶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그래도.


그런 한문학원이 주민센터에 있다면 우리 꼬마도 꼭 보내고 싶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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