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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Feb 06. 2021

기억이 났어 #007

커피색 스타킹


어느 날 아침. 나는 급히 방을 뒤졌다. 용돈 모아 커피색 스타킹을 찾았다. 인싸 애들이 커피색에 흰 레이스 양말을 신고 다니던 시절. 한번 신어보고 싶었다.


사실 나의 현실은 학폭 피해자. 가면성 우울증을 가지고 있었을 것도 같다. 학교에서 그 짓들을 견디고서 집에 올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을 세팅하고 들어오곤 했다. 집안 사정을 빤히 아는 큰 딸의 비애다. 엄마가 힘들어할 것이 더 걱정되어서다. 아무튼, 그날따라 커피색 스타킹 신은 애들이 예뻐 보여 며칠 돈을 모아 한 개 사봤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내가 포장을 뜯어서 어딘가에 보관했다. 그런데 기억이 안 나네.


나: 엄마. 엄마. 내 스타킹 봤어?

엄마: 무슨 스타킹?

나: 커피색.

엄마: 커피색? 엄마가 까만색 사놨잖아.

나: 까만색 말고 커피색.

엄마: 왜? 날이 이렇게 추운데

나: 그냥 커피색.


엄마는 어딘가 고장 난 듯한 딸의 말투에서 수상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나에게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아침에 나 말고도 애 셋이 등교와 등원 준비를 하는 준 전시 상황에서 내가 단독적으로 엄마의 눈길을 받기가 어려운데. 엄마는 커피색 스타킹 타령이 뭔가 했던 모양이다. 평소에는 공부나 숙제나 패션으로 절대 뭐라 하지 않는 자애로운 엄마이지만, 그날 아침, 자애로움은 없었다. 


엄마: 커피색을 네가 샀어?

나: 응.

엄마: 왜?

나: 그냥, 다른 애들이 신은 게 이뻐 보여서.

엄마: 그래서 커피색 신고 그다음에는?

나: 하얀 양말..

엄마: 안돼.


엄마는 안된다고 했다. 내 인생에서 엄마가 안 된다고 한 건 집에 와서 술 먹고 토했을 때 말고는 거의 없었다. 국민학생 나무가 하드보드지로 필통을 일곱 개를 제작할 때도, 마이마이가 꼭 필요한 이유를 한 달 동안 브리핑할 때도, 없는 살림에 총력 테스트 학습지를 하고 싶다고 할 때도, 수진역에 가서 곧 발목이 상할 것 같은 워커를 사 올 때도 오케이 하던 엄마다. 그런데 고작 커피색 스타킹이 안된다니.


나: 왜 안돼?

엄마: 이상해.

나: 애들 이거 다 신어.

엄마: 누가 다 신어? 윤민이(내 유일한 친구)가 신어?

나: 그건 아니고..

엄마: 번쩍거리기나 하고 다리 두꺼워보여. 교복하고 어울리지도 않아.


엄마는 점잖게 타일렀다.


나: 싫어. 신고 갈 거야.


나는 방을 뒤지며 커피색 스타킹을 찾았다. 나는 엄마가 더 말리지 못하도록 빠르게 스타킹을 신기 위해 스타킹 속에 발을 집어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


짝!


약 0.8 초 후, 척추에 짜릿함이 전달됐다. 나는 소리도 못 내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우리 엄마는 내 등짝을 후려치고는 뒤에서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어디서 아주 이상한 걸 가져다가 어떤 창피를 당하려고. 대여섯 살도 아니고 누가 봐도 이상한 걸로 미련을 판다. 꼭 신고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오른쪽 스타킹을 신었다. 그리고 왼쪽 스타킹을 얼른 신고 빨리 집을 탈출하려고 했다. 왼발을 넣는 순간,


쩌저저저적


하는 미세한 소리. 스타킹 올 나가는 맑고 고운 소리.


내 단 하나의 커피색 스타킹은 나를 인싸로 만들지도 못하고 그렇게 자신의 수명을 다했다. 다시 검은색을 신어야 했다.


나: 엄마. 나 검은색..

엄마: 그냥 가!


엄마의 복식 발성에 위축되고 말았다. 엄동설한에 스타킹이 허락되지 않은 유일한 하루였다. 양말을 최대한 올려 신고, 치마를 헐렁하게 내려 입은 이상한 패션으로 집을 나섰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사춘기였고 엄마는 지극히 내가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이후로는 커피색 스타킹을 산적이 없다. 교사가 되고서는 더더욱 치마를 거의 입지 않았다. 입는다고 해도 발목 위로 올라오지 않는 스커트가 아니면 바지. 엄마. 지금은 커피색 스타킹 신지 않는다네. 안심하셔.


마트에 가면 가끔 커피색이 있는지 살펴본다. 아직도 있긴 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신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외에 엄마의 혈압을 오르게 한 사건 

https://brunch.co.kr/@rainyhojin/99 



Fin.



내가 뭘 입든 이쁘다고 해주는 나의 똥강아지 둘. 작은 강아지도 중학생이 되어 커피색을 신겠다면 어떻게 할까? 사춘기가 온다면? 온다고? 으아아악 아직은 귀여워다오 딸내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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